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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골목에서 짝퉁 피자집을 만나다

책익는 내숲길

by 김 준 호 Feb 12. 2025

골목은 도시의 시간을 품는다. 오래된 건물 사이를 흐르는 좁은 길은 수많은 이야기를 지나왔고, 그 속에는 사람들의 일상과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나는 새로운 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그곳의 골목을 걷고 싶어진다. 길을 잃는 순간조차도 그 골목이 품은 시간 속에서 특별한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동네의 내숲길을 걷다가, 문득 몇 년 전 아내와 함께 걸었던 나폴리의 스파카나폴리(Spaccanapoli)가 생각났다.       

이탈리아 나폴리의 골목

스파카나폴리는 나폴리를 가로지르는 길고 곧은 골목으로, ‘나폴리를 쪼갠다’는 뜻을 지닌 이름처럼 도시를 두 개로 가른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단순한 도로가 아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도시 장면처럼 고대 로마 시대의 그리드형 도시 구조를 그대로 간직한 채,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삶이 이어지는 공간이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거리, 수백 년 된 건물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나는 이 골목을 걸으며 나폴리의 시간을 마주했다.       


좁은 길 양옆으로 빽빽이 들어선 건물들, 창문에서 펄럭이는 빨래, 거리를 가득 채운 상점들. 가게 주인들은 손님을 부르며 손짓했고, 거리 한편에서는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했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창문 너머로 이웃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이 펼쳐졌다. 이 골목에서 사람들은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존재가 아니라, 공간과 함께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유명한 장소들을 마주하게 된다. 산타 키아라 수도원, 산 도메니코 마조레 성당, 그리고 전통 장식품을 파는 산 그레고리오 아르메노 거리. 이 모든 곳이 스파카나폴리 위에 얽혀 있었다. 걷는 것만으로도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골목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역시 먹거리다. 나폴리는 피자의 본고장. 아내는 미리 검색을 해 두고, 이탈리아 3대 피자집 중 하나인 ‘소르빌로’가 이 골목에 있다고 했다. 우리는 좁은 길을 따라 걷다 마침내 ‘소르빌로’라는 간판을 발견했다. 드디어 나폴리에서 진짜 피자를 맛볼 순간이었다.       

루콜라 피자

피자는 기대 이상이었다. 두툼한 도우에 진한 토마토소스, 상큼하고 살짝 쌉싸름한 루콜라와 고소한 모차렐라 치즈, 소금기 맛이 있는 하몽고기가 어우러진 루콜라 피자. 우리가 상상했던 그 맛이었다. 아내와 나는 만족스럽게 한 조각씩 먹으며 나폴리 피자의 진수를 음미했다. 하지만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실내는 평범했고, 특별한 유명세를 자랑하는 가게처럼 보이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골목길을 나오던 우리는 우연히 또 다른 ‘소르빌로’를 마주쳤다. 그런데 이곳은 아까 우리가 갔던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붐비고 있었다. 궁금해진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점원에게 물었다.       


“저기 저 골목 안에도 소르빌로가 있던데, 같은 곳인가요?”       


점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 거긴 짝퉁이에요. 여기가 진짜 소르빌로입니다.”       


순간 아내와 나는 멍해졌다. 우리가 갔던 곳은 원조 소르빌로가 아니라, 같은 이름을 내건 가짜 가게였던 것이다. 피자 맛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폴리까지 와서 짝퉁 소르빌로에서 먹었다는 사실이 조금 허탈했다.      


아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찾아볼 걸. 제대로 된 소르빌로에서 먹었어야 했는데…”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맛있었잖아. 그리고 여행이란 원래 이런 해프닝으로 기억되는 거지.”       


아내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오히려 이 실수 덕분에 나폴리의 골목이 더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썬, 저녁에 소렌토 가서 더 맛있는 거 먹자."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어디선가 또 다른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짝퉁 소르빌로에서 피자를 먹어 실망한 썬


골목은 단순한 길이 아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온기가 있고, 도시의 시간이 녹아 있다. 스파카나폴리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 같은 곳이었다. 관광객에게는 흥미로운 여행지이지만,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하루하루가 쌓이는 삶의 배경이 되는 곳.       


여행에서 길을 잃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경험을 만드는 순간이다. 우리는 실수로 짝퉁 피자집에 갔지만, 그 덕분에 나폴리의 골목은 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다음에 다시 나폴리를 찾는다면, 이번에는 진짜 소르빌로에서 피자를 먹고 싶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그때도 우리는 이 골목을 다시 걸으며, 나폴리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시간을 또 한 번 느끼게 될 것이다.       

골목은 길을 잃는 즐거움을 선물한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나폴리의 스파카나폴리는 바로 그런 골목이었다.


스파카 나폴리 거리의 한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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