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창작과 입시 습작 '신발' 전문과 비평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청소년이었던 나는 '고어(gore)'를 좋아했다. 공포 영화를 봐도 손이 쉽게 통과하는 불투명한 유령이 나오는 장르에는 가슴이 뛰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제일 사랑했던 것은 좀비. 아직도 내 책장 중 한 칸은 좀비에 점령 당해 있다. 좀비가 등장하는 이야기 중에는 맥스 브룩스의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와 '세계 대전 z'를 가장 좋아했다. 세계 대전 z는 영화로도 제작되었으니 두꺼운 책이 부담스럽다면 영화를 추천한다.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는 열네 살 때 학교에 들고 가서 친구들과 돌려 읽다가 선생님께 걸린 적이 있다. 선생님의 시점으로는 유해 도서로 보였기 때문에 (실제로도 유해하긴 하다) 일주일 간 교무실에 압수당했던 비운의 책이다.
지금은 어떨까. 나는 고어에 관한 이상한 자부심을 가지고 호기롭게 '서브스턴스'를 보러 갔으나, 삼일 동안 잔상에 시달렸다. 그제야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는 잔인한 콘텐츠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이 기억났다. 몇 번째 시리즈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영화 '범죄 도시'의 초반 5분을 버티지 못하고 바로 텔레비전 전원을 끈 적이 있다. 좀비를 향한 애착은 그대로 남아 있어 종종 신작 좀비 영화를 보러 가지만, 그날 식사는 포기한 셈 친다. 내 본성은 꽤 비위가 약한데도, 청소년인 나는 오히려 잔인한 표현 방식을 즐겼다. 성인들도 쉽게 못 보는 장면을 나는 즐긴다는 허세도 약간 섞여 있었다. 거기에 더불어, 고어물은 이상한 방식으로 나에게 표현의 영감을 줬다. 사람의 몸을 재료로 이리저리 붙여보는 방식을 생각해보게 했다. 내가 영상을 찍거나 그림을 그렸다면 엄두도 못 냈을 테지만, 글을 쓰기 때문에 잔인한 표현을 더 쉽게 시도할 수 있었다. 같은 장면이어도 글로 묘사했을 때 덜 잔인하므로, 그 장면의 폭력성보다 그 표현 방식을 채택한 이유에 더 집중하게 된다. 오늘의 습작에도 지금의 나는 쓸 생각을 못했을 것 같은 잔인한 소재가 등장하니 주의를 요한다.
글제: '이상한 일이었다. 잠시 벗어둔 신발을 신는 순간부터, 남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분명 내 신발이었는데.'를 첫 문장으로 하는 이야기를 창작하시오. (2500자 이내)
제목: 신발
이상한 일이었다. 잠시 벗어둔 신발을 신는 순간부터, 남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분명 내 신발이었는데. 그 신발은 우리 신혼 때 만들어 둔 발가죽 신발이었다. 아내의 발목과 발등에 칼집을 낸 뒤에 껍데기를 벗겨내고 구멍을 뚫어 신발끈을 연결했다. 아내의 작은 발을 내 발 크기에 맞추어 늘리느라 어떤 부분은 투명해질 때까지 얇아져 있었다. 무릇 남편이라면 아내의 그것을 죽으나 사나 신고 있어야 했는데, 발에 생긴 습진에 연고를 바르기 위해 잠깐 벗어둔 것이었다.
처음에는 기름 동동 뜬 연고를 덕지덕지 발라서 어색한 느낌이 드는 줄 알았다. 신발이 아까처럼 발에 딱 붙지 않고 흐늘흐늘했다. 나는 안방 문을 빼꼼히 열고 인주를 불렀다. 인주의 발바닥이 노란 장판에 쩌억쩌억 달라붙는 소리가 났다. 인주의 갈라 터진 발꿈치에서 세월이 흘러내렸다. 젖어서 퉁퉁 부은 발이 무거웠고 발걸음 소리만으로 가슴이 이따금 내려앉았다.
"인주야, 이거 한 번 신어봐."
신기도 전에 우리는 알았다. 신발끈을 한껏 풀어헤쳐도 인주의 발은 신발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오빠, 이거 내 처녀 적 발이잖아. 인주는 장난스럽게 내 어깨를 밀치고 신발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내 손에 덩그러니 놓인 발가죽이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딸이 목발을 짚고 집에 찾아왔다. 사위는 천으로 싸인 상자 하나를 들고 따라 들어왔다. 사위는 뒤통수를 긁느라 남는 손이 없었다.
"한쪽 발만 잘라낸 애는 또 처음 봤어."
인주가 과일을 깎으며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딸은 신발을 만드는 도중 출혈이 너무 심해 제작을 중단하고 회복기간을 가지는 중이었다. 인주가 짝발이네, 짝발이야, 하고 웃으니 사위도 멋쩍게 웃었다.
사위가 빨간 벨벳으로 만들어진 천을 조심스레 걷어내니 딸의 새하얀 발가죽이 드러났다. 아직까지 맥박이 뛰는 듯 핏줄이 선명했다. 소독약 냄새가 표면에 달라붙어 피부가 더 창백하게 빛이 났다. 인주 처녀 때 발하고 똑같네. 내가 무심코 중얼거리자 딸애와 사위의 눈길이 내 발로 향했다. 장인어른, 그러고 보니 신발은 왜 벗어두셨습니까? 나는 딸 부부의 손을 잡고 미끄러지듯 안방으로 들어간다.
사실 딸네가 오기 전에 몇 번이나 신발을 신으려고 시도했다. 시간이 갈수록 신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그걸 내 체온으로 녹이려면 오래도록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한기를 참아내야 했다. 그보다 더 힘든 것은 내 발과 거죽 사이에서 방울처럼 톡톡 터지는 낯설음이었다. 이것 봐라.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사이 신발이 바뀐 것 같아. 딸애는 신발을 조심스레 받아 들면서 천천히 살펴보았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발톱이 빠진 상처까지 똑같아요.
"하지만 네 엄마의 발이 더 이상 이 가죽에 들어가지 않는단 말이다!"
딸이 토끼눈을 뜨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나를 뚫었고 몸에 뚫린 구멍 사이로 인주가 보였다. 가슴살은 빠지고 앉은 모양대로 살이 흘러내리는 인주가 무슨 일인지 보려고 고개를 쭉 내밀었다. 딸은 제 엄마를 가리려는 듯이 달려가 안겼다. 딸 몸의 굴곡을 따라 인주는 찰흙처럼 찌그러졌다.
딸이 나머지 한쪽 발을 벗겨낼 때 꼭 와달라고 사정을 했다. 인주는 질색을 하며 못 본다고 도리질을 쳤다. 딸은 막무가내로 우리 부부의 팔을 잡아끌었다. 신발은 여전히 녹지 않았지만 체면을 차리기 위해 일단 신기는 신었다.
"정말 마취 없이 해도 되겠습니까?"
구두장이가 딸에게 되새기듯 물었다. 딸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색 레이저가 딸의 발목을 빙 둘러 자르니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매캐하게 올라오는 역한 냄새에 인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 딸은 어금니를 비집고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지 못하고 마음껏 내질렀다. 구두장이가 능숙한 손길로 가죽을 벗겨내자 붉은 근육이 드러났다.
연기가 내 눈을 감겼고 비명이 내 귀를 막았다. 손과 발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침을 뚝뚝 흘리는 내 발이 가죽을 뱉었다. 딸은 이제 제 것이 아닌 거죽을 보았다. 구두장이는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운동화 끈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딸은 이제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구멍을 보면서도 울었다. 인주도 같이 울었다. 딸애의 숨이 넘어가면 인주도 헉헉거리며 숨을 삼켰다. 딸의 눈이 헤까닥 넘어가자 인주도 눈을 뒤집으며 내 신발을 낚아챘다. 들어가지 않는 발을 억지로 구겨 넣으니 오래전 수선한 부분의 실밥이 뜯어졌다. 인주는 개의치 않고 너절한 신발을 신었다. 신발끈까지 리본 모양으로 묶고 난 뒤에야 인주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오랜만에 처음부터 끝까지 실눈을 뜨고 읽은 글이다. 실눈을 뜨면 덜 잔인해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 걸까? 같이 괴로움을 견디며 읽어주신 분께는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이번 글제도 내가 제일 좋아했던 첫 문장 제시였다. 주요 소재는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신발'. '나'는 벗어 둔 신발을 다시 신었는데, 신발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위화감을 느낀다. 마치 학창 시절, 삼선 슬리퍼가 남의 것과 뒤바뀌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듯이. '나'는 이 위화감에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한다. '내'가 아주 예민한 사람이거나, 신발이 뒤바뀌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물건임에 틀림없다. 나는 후자에서 더 매력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신발과 연관된 발상을 이어간다.
결혼하면 남성은 여성의 발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평생 신어야 한다.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디스토피아를 구성하여 살면서 문득문득 느껴왔던 불합리함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나'는 옛날에 만들어둔 신발과 지금의 아내의 발이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신발이 뒤바뀌었다는 편집증적인 망상에 시달린다. 이렇게 사소한 의심으로 견고해 보이던 관습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가부장제는 예나 지금이나 나에게 연약하게만 느껴진다. 같은 극끼리 마주 보는 자석처럼 쉽게 튕겨나갈 것만 같다.
이 글에서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인주'처럼 보인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인주, 사고방식의 급격한 변화를 겪는 것도 인주기 때문이다. 인주는 처음에는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된 딸을 웃고 놀리기만 한다. 그러나 '나'의 의심이 트리거가 되어 인주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마취 없이 발가죽을 찢어발기는 딸의 모습을 보며 인주는 무언가를 깨달았고, 바로 내 것이라는 듯이 신발을 낚아채온다.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 뒤 180도 달라진 모습이 되는 양상이 전통적인 주인공의 모습과 부합한다. 다만, 인주가 딸의 고통을 보고 관습의 불합리를 깨닫는 흐름이 판타지 같긴 하다. '이렇게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하는 나의 소망이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 같아서 부끄럽다고 할까.
이 글이 직접적인지 우회적인지 나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글을 쓸 당시의 나는 괜찮은 알레고리라고 생각하며 적었던 것 같다. '발가죽 신발'이라는 잔인한 소재는 현실의 불합리를 극으로 치닫게 만드는 장치였고, 이야기 속에서 잘 작동하고 있다. 다만, 서브스턴스를 볼 때도 느꼈던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현실의 부조리를 묘사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소재를 차용하는 것은 왕왕 있는 일이다. 그런데 특히,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이야기에서는 의도가 어찌 되었건 사용되는 것은 결국 여성의 몸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브스턴스에서도 아름답게 주무르거나 잔인하게 찢어발길 수 있는 몸은 '수'의 몸이었다. 비판적 의식을 담았지만, 내 글에서도 여성의 발가죽이 너무 쉽게 떨어져 나간다. 딸은 자신이 고통받는 모습을 전면에 전시하여 인주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만, 결국 크게 보면 결국 발가죽을 잘라야 하는 관습에 따르고 있는 모습이다. 여성이 고통받는 모습을 통해서만 세상을 비판할 수 있나, 하는 아쉬움이 들어 다른 방식으로의 돌파구를 찾아보고 싶다.
이건 여담이지만, 문창과 입시 중반 즈음을 지나게 되면 사람 이름 짓는 게 일이다. 전편의 습작에서도 주인공의 이름이 '인주'였다. 나는 인주라는 이름을 즐겨 썼는데, 어떻게 보면 어린아이 이름 같고, 어떻게 보면 중년의 이름 같아서 그 경계에 있는 신비로운 느낌을 좋아했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내 습작 속에서 인주는 산전수전을 다 겪게 된다. 미안하다, 인주. 굳세어라, 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