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창작과 입시 습작 '먹을 수 있는' 전문 및 비평
동물을 죽이는 이야기는 최악이다. 인간의 잔혹함을 보여주기 위해 동물의 죽음을 이용하는 장면을 특히 싫어한다. 자기 인생이 안 풀린다고 개 고양이에게 화풀이하는 지질한 인간이 세상에 너무 많다. 이야기에서조차 동물을 그런 식으로 사용해 봤자 악을 향한 전율을 느낄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동물에게 친절한데 인성이 박살 난 캐릭터가 더 매력적이다. 또 신비롭고 아득한 느낌을 주려고 빨간 금붕어를 수조에서 꺼내는 것도 싫다. 바닥에 붙어서 헐떡헐떡하는 금붕어의 눈을 클로즈업하지 말자. 시작하자마자 싫다는 말을 폭포처럼 쏟아내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습작을 뒤적거리다 보니, 내가 그런 글을 쓴 적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오늘의 습작에서는 동물 한 마리가 죽음 직전까지 간다. 그런 글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주의를 드린다.
글제: 다음의 다섯 가지 단어(통조림, 목성, 낙타, 장마, 밝은 방)를 모두 사용하여 이야기를 창작하시오.
제목: 먹을 수 있는.
낙타와 나는 끝없는 사막을 계속 걸었다. 헤아릴 수 없이 넓은 사막을 보고 있자니, 역설적으로 터무니없이 좁은 방 같았다. 사막 무늬 벽지가 발린 밝은 방일뿐이었다.
우리 부족의 우두머리가 말했다. 우리의 낙타들 중 한두 마리는 지금 죽여야 한다고. 모든 낙타를 데리고 다음 목초지까지 이동하기엔 여유가 없다고. 무슨 낙타를 도살할지는 회의를 통해 정하겠다고 했으나 결과는 뻔했다. 당연히 약하고 볼품없는 내 낙타. 내가 젖을 입에 흘려 넣으며 키웠던 내 아들을 잡겠다고 할 것이다.
어른들은 낙타를 무슨 통조림 따위로 취급한다. 물과 지방을 저장하는 걸어 다니는 통조림. 다들 착각하고 있지만 내 낙타의 볼록 솟은 혹 안에 든 것은 지방이 아니다. 나의 정자와 태양이 만나 생겨난 또 하나의 창조다.
우리 엄마가 말하길, 별을 보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 별의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금성이었나 목성이었나 북극성이었나. 난 왠지 목성일 것 같다. 목성의 목은 목구멍의 목. 숨의 목이니까. 그래, 목성만 찾아 남쪽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그곳에선 네가 좋아하는 과일도 실컷 먹을 수 있겠지. 나는 최소한의 물과 식량만 챙겨 내 낙타를 이끌고 길을 나섰다.
우리 부족이 걸어온 길을 거슬러 가다 보면 다른 부족민 하나 둘 쯤은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문명에서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고 실제로 그랬다. 설상가상으로 우리가 지나온 길은 바람에 쓸려 허공으로 날아갔다.
목성이 뭔지 누군가에게 물어볼 심산이었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안 지나가는 상황에서 나는 나의 숨길조차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게 한심했다. 그렇게 먹고 마시지 못하는 시간이 이어지고, 어느새 내 낙타의 혹이 홀쭉해져 축 늘어졌다. 그 안에 분명히 있었던 것이 없어졌다. 우리 다리 여섯 개는 힘을 잃고 무너졌다. 세균에 의해 썩어가는 것조차 사치였고, 다리는 다만 내리쬐는 태양에 존재의의를 잃어버렸다.
나는 허공으로 날아가며 속삭였다.
"낙타야 나를 먹어라."
그리고 나도 공평하게 너를 먹겠다.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되고 너의 혹은 다시 부풀어 오를 것이다. 나는 너를 한낱 식량으로 보지 않고 사랑하는 가족이며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는 중이다. 나는 기어서 널브러진 돌을 주워 마지막 남은 한 줌의 힘으로 나와 너의 피부를 짓이겼다. 나는 오아시스를 만난 듯이 붉은 피를 투명하게 받아들였다. 낙타의 피는 날아가는 나의 다리를 잡아 붙들었지만 정신은 잡지 못했다. 나는 한참 동안 식사를 했고 너는 나를 먹지 않았다.
나는 문득 정신이 들었고, 피가 뚝뚝 흐르는 팔을 낙타의 입에 가져다 대었지만 낙타는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숨만 색색 내쉬었다. 나는 그제야 낙타가 초식동물임을 상기했다. 그땐 이미 내 식사는 다 끝나 있었다. 그리고 나서야 비가 왔다. 긴 비가 될 것이다. 어쩌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장마가 될 것이다. 낙타는 숨만 색색 내쉬었다.
내가 또 한 가지 즐기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인간을 일부러 극단적인 상황에 몰아넣어 잔인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장르다. 재난 상황에서 혼자 살겠다고 다른 사람의 발목을 붙잡는 모습, 데스 게임에서 남에게 총구를 겨누는 장면. 다 보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인간은 추하고 잔인하다'는 감상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 이번 습작에서 나는 주인공을 극단적인 기아 상태에 몰아넣고 친구를 잡아먹게 유도했다. 다 읽고 나서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질문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런 이야기 구조를 만들게 된 이유로 글제 탓을 조금 해보고 싶다.
문제는 무자비하게도 다섯 개나 되는 단어를 제시했다. 한 단어로도 정신이 없는데 다섯 개라니. 이런 글제가 나오면 단어들 사이의 위계나 관계를 정해주는 것이 좋다. 모든 단어를 중심 소재로 사용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주인공이 되는 단어 하나를 선정한다. 나는 가장 중심이 되는 소재로 낙타를 선정했다. 낙타가 사막에서는 비상식량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통조림을 낙타를 비유하는 소재로 채택했다. 목성은 주인공의 목표 그 자체다. 이 세 단어와 비교하면 '장마'나 '밝은 방'은 중요도가 낮다. 시공간을 묘사하는 소재로 사용한 것이다. 각 단어의 중요도에 차이를 두긴 했지만, 어쨌든 이 단어를 사용한 개연성은 있어야 한다. 지나가는 말로 쓱 흘려놓고 '어쨌든 썼으니까 글제를 지켰다'라고 주장하는 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글제의 조건이 많고 복잡해질수록 내가 쓰고 싶은 글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문예 창작과 입시는 시간제한이 있다. 2018학년도 시험을 기준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예외적으로 약 7시간 정도의 긴 시간을 주었다. 이 시간을 꽉 채우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이 없어서'라는 변명을 원천 차단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일반 대학교의 경우, 많아 두세 시간 정도 주는 것이 보통이다. 서울예술대학교 극작과의 경우 시험 시간이 단 90분이다. 글제의 조건을 다 맞추는 발상을 한 순간, 바로 글쓰기에 돌입해야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다. 그래서 나도 다섯 개의 단어 구슬을 꿰어 맞춘 순간 돌이킬 수 없이 결말로 달려간 것이다. 변명하자면 그렇다. 예를 들어, 나는 '장마'라는 단어를 소진해야 했다. 고민하다가 주인공이 낙타를 해치고 나서야 비가 오는 장면을 썼는데, 필요 이상으로 잔인한 느낌이 든다. 10분만 더 기다리지. 세상에는 그 10분을 더 못 기다려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있긴 하지만.
(낙타 위 사진 주의)
지금 찾아보니 낙타도 오래 굶은 상태가 지속되면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낙타는 유사반추동물로 3개의 위장을 가지고 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위장(C1과 C2)에서 혐기성 미생물이 식물의 셀룰로오스를 분해한다. 반면 세 번째 위(C3)의 말단부에는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인 프로테아제와 염산을 분비하는 위샘이 존재한다. 그래서 C3는 잡식 동물의 위장 환경만큼 강하진 않더라도 산성을 띤다. 그러니 낙타도 고기를 먹었을 때 단백질의 일부는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속이 더부룩하거나 가스가 차는 느낌을 받겠지만. 그러니까, 글 속의 낙타는 주인공을 먹을 수 있었는데 먹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기특한 낙타가 있을 수가. 굿 낙타, 굿 낙타.
마지막으로 '나의 정자와 태양이 만나 생겨난 또 하나의 창조다'라는 표현을 짚어보겠다. 이 시기, 나는 이상하게 정자, 난자, 자궁에 대한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어른스러운' 글쓰기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내 나이가 글에서 드러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미성숙한 사람이 쓴 글은 미성숙하게 보일 것 같아서다. 물론 '미성숙'이라는 말은 성인의 입장에서 청소년을 내려다보는 말이고, 모든 사람은 그의 나이가 어떻든 성숙, 미성숙이란 말로 판단할 수 없다. 그래도 나는 얕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고, 성에 관한 메타포를 사용하면 어른스러워 보일 것 같았다. 정말 부끄러워서 올리지 못했지만, 자판기 속 음료수가 자판기에게 "이곳은 당신의 자궁입니까?"라고 묻는 대사를 쓰기도 했다. 어른스럽다기보다는 자궁을 선망하는 뒤틀린 사람으로 보인다. 있어 보이려고 쓴 말은 언젠가는 들키는 것 같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이든, 미래의 나에게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