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창작과 입시 습작 '가벼움' 비평
저번 글의 글제는 특이하게 그림으로 주어졌다. 제시된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의 골콩드. 글을 쓰려고 골콩드를 샅샅이 뜯어봤는데도 이 그림의 해석은 지금까지 알지 못한다. 그림이나 음악을 글제로 주는 대학은 많지는 않은데, 이런 특이한 시도를 하는 곳들은 단연 예술 대학교다. 문예 창작과 입시 당시,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학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였다. 2018학년도 한예종 극작과 시험에서 갑자기 머리 없는 불상 사진을 주고는, 이 사진을 참고하여 상처 입은 영혼이 치유되는 이야기를 쓰라는 문제가 나왔다. 그때의 아득한 기분이란. 이런 글제를 다룰 때는 너무 주관적인 감상으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려고 한다.
사람마다 그림과 음악을 접했을 때 드는 감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골콩드를 보고 가장 처음 생각난 것은 출근하기 싫어서 도망가는 직장인들이었다. 그렇다고 정말 출근길에 일탈하는 직장인 이야기를 썼다가는 어김없이 글제를 지키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제시된 그림과 음악을 모티브로 사용하는 방법이 가장 안전하다. 음악이라면 그 선율을 이야기 속에서 사용하는 것. 그림이라면 그림의 요소를 직접적으로 따오는 것. 골콩드에서는 '공중에 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야기에 직접적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드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골콩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추락하고 있는가, 상승하고 있는가?
사실 추락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이 글제에서 가장 많이 나왔던 시도는,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과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들이었다. 어떤 사람이 떨어지느냐, 떨어진 후에 어떤 사건이 벌어지느냐 등 독창성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는 많지만, 나는 다른 사람과 겹치는 이야기 구조로 눈에 띌 자신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림 속 사람들이 승천하고 있다고 보고, 중력이 사라진 세계를 상상하였다.
습작 '가벼움'에서 주인공은 '중'(스님이 아니다)이라는 이름의 인외였다. 지구의 중심에서 쳇바퀴를 돌리며 중력을 만들어 내는 '중', 그의 정체성은 '아이스에이지'에 등장하는 다람쥐 스크랫에서 따왔다. '중'은 어떤 이유에서 자신의 일에 염증을 느끼고는 중력을 포기한다. '중'은 정말 내 취향 범벅인 캐릭터인데, 중력이 없어진 탓에 천장 모서리에 끼어 오도 가도 못하는 어린아이에게 '꺼내줄까요?' 하고 물어보는 장면이 특히 마음에 든다. '중'은 나름대로의 친절을 발휘하는데, 그 친절을 베풀면 어린아이는 하늘로 멀리멀리 날아가게 된다. '중'에게는 어떠한 악의도 없다는 점에서 순수한 인외가 주는 위화감을 느낄 수가 있다.
더욱이, 나는 어린아이 캐릭터를 보고는 아연실색했는데, 내 거의 모든 글에 '의도치 않게'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과 닮았기 때문이다. 속을 짐작하지 못하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내뱉는데 이로 인해 주인공을 변화시키는 인물들 말이다. 어린 동양인이어도 백발이어야만 할 것 같은, 억지로 원전을 찾자면 에반게리온의 나기사 카오루 같은 친구들이다. '의도치 않게'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이런 인물을 등장시키는 걸 경계하고 있음에도 어느새 조연들이 다 나기사 카오루같이 변해 있기 때문이다. 설정의 엉성함을 신비로움이라는 포장지로 감쌀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쉽게 사용하는 것 같다. 인물의 목표와 의도를 견고하게 계획하지 않으면 껍데기 같은 아련함만 남는다. 그래도 어린아이의 '무거워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대사는 글의 주제 의식과 연관이 있어 무게감이 느껴진다.
'사과'가 가지는 상징은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지금 봐도 꽤 좋다. 사과가 등장하는 마지막 문단을 쓰고는 나 자신의 글쓰기 능력에 취해(으아악 그만둬!) 책상 앞을 떠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중력이 없어졌다 다시 생기는 과정에서 사과가 어린아이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뉴턴이 중력을 처음 발견했던 일화와 새로운 시작을 연결하려는 시도였다. 이런 상징을 시험장에서 뚝딱뚝딱 만들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실 발상은 8할이 운, 2할이 엉덩이 힘에서 나오는 것 같다. 이때 나는 나만의 상징 수첩을 들고 다니며 임의의 물체에 상징을 부여하고 그것을 메모하였다. 이런 방식은 사실 산문보다는 운문 시험을 보는 입시생들에게 더 효과적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물체를 비일상적으로 바라보는 시도는 또 다른 시야를 트여주고, 시간 죽이기에도 좋아서 지금도 자주 하는 놀이다.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면 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뾰족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중'이 중력을 포기한 이유는 사람들이 타인을 밀어내기 시작하면서 쳇바퀴가 삐걱거렸기 때문이다. 이 '타인을 밀어내다'라는 표현이 당시 사회의 어떤 점을 비판하고자 한 문장인지 명확하지 않다. 이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두 번째로 기도하게 되는데, 제발 이 표현이 뭉뚱그린 혐오를 뜻하는 말이 아니기를 바란다. 어떤 집단이 어떤 타 집단을 밀어내는가(배척하는가)를 정의하는 작업은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보편과 특수, 주류와 마이너, 주체와 타자를 뒤섞어버리며 '혐오의 시대'와 같은 오묘한 말을 쓰게 된다. 잠깐, 이 시기 내 말버릇이 '세계가 10cm의 자라면 5cm가 되는 지점을 밟아보고 싶다'였다는 것을 방금 기억하였는데, '뭉뚱그린 혐오 설'에 무게가 조금 더 실리게 되었다. 지금은 5cm가 되는 지점은 존재하지 않거니와 그것을 밟으려고 해 봤자 이로울 게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뭉뚱그리는 건 내 고질적인 문제다. 나는 분란을 싫어하며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고픈 불가능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조금의 호감도도 깎아 먹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수록 내가 쓸 수 있는 문장이 줄어든다. 나는 누구나 인정하는 순수한 악만 비판할 수 있고, 주인공은 도덕적인 선택만 할 수 있다. 내 천성을 거슬러 의도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내 글쓰기의 가장 큰 목표다. 그런 의미에서 내 첫, 그리고 마지막이 되지 않아야 할 단행본을 소개드린다.
'오뉴월에도 빛이 내리고'에서도 '중력'이라는 소재가 등장한다. '오뉴월'이라는 가상의 위성은 지구 주위를 돌다가 추락할 위기에 처한다. 세 명의 중학생은 오뉴월이 추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때까지 내가 썼던 SF가 지구를 탈출하는 이야기라면, 이번 글에서는 중력을 느끼며 지구에 단단하게 발을 딛기로 하였다. 나는 작가의 말에 '지면에서 둥둥 뜨는 내 발을 붙잡아준 중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라고 썼다. 그때보다는 조금 뾰족해졌는지, 아니면 여전히 뭉툭한지 나는 객관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혹시 기회가 된다면 평가를 부탁드린다.
저번 화에서 나는 'SF를 몰랐는데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이 글을 썼기 때문에 SF를 썼다'라고 말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 문장을 썼는데, 나의 연속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깊은 우울의 골짜기를 넘고 나면, 이전의 내가 기억나지 않게 된다. 실제로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현상을 자아의 불연속성이라고 표현한다.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난 것 같은 흥분도 잠시, 나는 끝내 외로워진다. 어떤 일을 겪어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의 과정이 깡그리 날아가고, 항상 찰나만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습작 '가벼움'을 읽었을 때 좋았다. 나는 과거에도 항상 나였고,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