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가방에서 된장녀를 꺼내다.

문예창작과 입시 습작 '화풀이' 비평

by 정도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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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화에 올린 나의 첫(번째는 아니지만 가장 오래된) 소설을 잘 읽으셨는지 모르겠다. 이 소설은 불구덩이에서 따뜻하게 엉덩이를 지지고 있는데, 오늘은 그 이유를 말해보려 한다. 우선 다른 것보다도 글제부터 한 번 살펴보자.


글제는 ['그녀가 다녀 간 다음 날 아침, 현관에 놓인 커다랗고 검은 가죽 가방을 발견했다.'로 시작되는 3000자 이내의 소설을 창작하시오.]였다. 문예창작과 입학시험에서는 단어, 사진, 첫 문장 등 다양한 형태로 글제를 제시한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태가 '첫 문장 제시'였다. 첫 문장에는 많은 단서가 담겨 있고, 이 단서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글에 담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제시된 문장을 작은 단위로 부수고 분석하는데, 마치 내가 탐정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어, 이번 글제에서만 해도 '그녀', '아침', '현관', '가죽 가방'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글제는 내가 써야 할 소설의 인물과 소재, 시공간까지 중요한 구성 요소를 모두 제시하고 있다. 주요 인물은 '그녀'이며, 그녀는 전 날에 누군가의 집에 방문해서 다음 날 아침에 떠났다. 그리고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소재는 '가죽 가방'이다. 그녀가 굳이 가죽 가방을 현관에 놔두고 떠나 주기까지 했는데,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나에게 쓰레기를 줬다.'하고 다른 얘기를 하면 볼 것도 없이 바로 탈락이다. '글을 얼마나 유려하게 썼냐'가 본선이라면, '글제를 지켰냐'는 예선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주요 소재다. 가죽 가방을 활용하여 얼마나 창의적이고 설득력 있는 글을 쓸 수 있는가를 두고 당락이 결정된다. 내가 문예 창작과 입시를 준비하면서 가장 경계했던 것이 있다면, 다른 입시생과 글이 겹치는 것이었다. 이를 방지하고자 활용했던 방법이 있다면 '단어 꼬리 물기'였다. 이번 글제를 예로 들자면, '가죽 가방'에서 연상되는 단어를 하나 쓴다. 그리고 그 단어에서 연상되는 단어를 이어서 쓴다. 그렇게 꼬리 물기 하듯이 스무 개의 단어를 나열하는데, 당연하게도 가장 마지막에 나온 단어는 가죽 가방과 큰 연관이 없다. 그 마지막 단어와 가죽 가방을 연결하여 문장을 하나 만들어 소설의 중심 문장으로 활용한다. 이 방법을 쓰면 웬만한 우연이 아니고서는 다른 사람과 글이 겹칠 일이 없게 된다. 단어 꼬리 물기는 지금도 정말 좋아하는 방법인데, 내가 세 시간을 앉아서 고민해도 나오지 않을 문장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내가 그때 그 시절에 가죽 가방으로 단어 꼬리 물기를 한 메모가 남아 있어, 이를 보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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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죽 가방'이라는 단어에서 시작해서 '믹서기'를 도출했다. 이 두 단어를 연결하기 위해 '가죽 가방을 믹서기에 갈아버렸다.'는 문장을 만들어냈고, 이를 소설에 반영한 것이다. 난 이 단어 꼬리 물기 과정이 꽤 흥미로운데, '가죽 가방'에서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된장녀'가 도출된 사실이 특히 그렇다. 된장녀라니, 지금은 사어가 된 이 말을 그때의 나는 이렇게 거리낌 없이 썼다고? 명품 다음, 된장녀 다음, 김치녀 다음, 일베가 나오는 이 흐름이 나름의 사캐즘이 아니었을까 하고 혹시나 기대해 본다. 아니, 제발 그랬어야만 해. 하지만 2017년의 나는 여성주의를 이제 막 알아가는 시기였고, 나의 성인지 감수성은 미약했으므로. 그때의 내가 진심으로 가죽 가방에서 된장녀를 꺼내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기억이 애매하므로 더 덧붙이지는 않겠다. 더 아쉬운 것은 '명품'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성찰 없이 그대로 소설에 투영해 버렸다는 점이다.


소설 속에서 '나'와 '숙희'는 절친한 친구였는데 모종의 이유로 관계가 틀어진다. 그로 인해 '나'는 '숙희'에게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느끼게 된다. '나'의 입장에서 소설이 진행되기 때문에 '숙희'는 비교적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소설 속에서는 천진하게 웃는 모습 한 장면, 임팩트 있는 대사 한 두 줄만이 '숙희'를 설명한다. 나는 '숙희'라는 인물을 더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가죽 가방, 명품이라는 상징을 사용했다. 낡고 해졌지만, 가운데 로고만큼은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이제 그만 돌려 말하자. 나는 '숙희'를 '된장녀'로 묘사했다. 여기서 나는 정말 큰 실수를 저질렀는데, 독자가 오독할 여지를 남겼다는 점이다. 내가 쓰고자 한 것은 그 나이대 여자아이들끼리의 우정과 미묘한 긴장감이었고, 거기에 인물을 편하게 표현하기 위해 '명품'이라는 소재를 적용하였다. 그러나 상징을 섬세하게 통제하지 않은 탓에, 소설의 큰 줄기가 이른바 '여적여' 구도로 읽히게 된다. '된장녀'가 수더분한 여자를 괴롭히는 모습이 주가 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소설 속에서 절정이 되는 '숙희'의 대사에서 펑 터져버린다.


"이거 줄게. 그 나이 되어서도 멀쩡한 가방 하나 없는 게 안쓰러워서, 쓰던 거라도 가져와 봤어."

괴, 괴롭지만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 보자.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징을 그대로 가져오면 다른 문제점들도 많지만, 그냥 글이 촌스러워진다. 진부한 상투어를 나열하는데 세련되기도 어렵다. 내가 쓴 표현과 완전히 대비되는 장면을 하나 제시하고자 한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주인공 배타미가 천 가방을 쓰는 신입 사원에게 자신의 명품 가방을 주는 장면이 있다. '지위도 직급도 없으면 명품으로라도 날 부풀려야 한다'라는 배타미의 말에서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는데, 과거의 내가 저런 대사를 쓴 적이 있어서 그랬나 보다. 명품=과시라는 상징을 사용한 것은 비슷하지만, 드라마에서는 그것을 한 번 더 뒤틀어서 부하 직원을 보호하는 배타미의 인격을 부각했다. 이 장면이 그 당시 나에게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이때까지 창작물 속에서 명품은 소유자의 인격적 결함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만 활용되었는데, 검블유는 이를 멋지게 전복한 것이다. (사회인이 꼭 명품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 드라마도 2019년작이므로 그 사이에 이 멋진 전복도 조금 빛바랜 느낌이 없잖아 있다. 어쨌든 일상을 비일상으로 바꾸는 것이 창작물의 역할이고, 창작자는 상징을 새로 만들 자신이 없으면 적어도 비틀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 지금의 내 생각이다.


내가 쓴 소설에서 여자아이들 사이의 우정을 묘사한 방식만큼은 마음에 든다. 나는 이 주제를 문창과 입시 내내, 그리고 지금 와서도 자주 반복하고 변주한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여자애들은 앞뒤가 다르고, 믿을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의 우정은 진짜가 아니라는 말로 도망가지 않아서 좋았다. 그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숙희'를 사랑했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했으므로. 그래서 '내'가 받은 상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숙희'가 두고 간 가죽 가방을 마구 찢고 뜯고 훼손하며, 마지막에는 믹서기에 넣어버린다. 그때 선생님은 '내'가 분노하는 방식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셨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람이 믹서기를 꺼내어, 코드를 꼽고, 가방을 담아서, 작동 버튼을 누를 수 있을까? 그 말에도 동의하지만, 난 그래도 믹서기를 사용하는 장면이 마음에 든다. 분노에 몸을 못 가누는 사람이 갑자기 믹서기를 꺼내오는 장면이 이 소설을 연극으로 전환시키는 것 같다. '나'는 아무도 보지 않지만 연극을 한다. '숙희'를 가루 내어 그를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여자아이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할 기회가 있을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줄이겠다.


기념비적인 첫 소설을 함께 살펴보았지만, 과거의 나는 빻았고 지금의 나는 많이 성장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말하자면 관성이 무섭다. 관성이 생길 정도로 내 사고는 어떤 기찻길을 따라 일직선으로 쭉 달려가고 있었고, 나는 그 폭주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 기찻길은 나와 이 세상이 함께 뚝딱뚝딱 지었으니 민관협력사업이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얼마나 많은 뇌 내 선로가 절벽으로 향하고 있을지 두려워지고 만다. 그 절벽 아래에는 이 소설이 빠질 불구덩이가 있을 예정이다. 그러나 그 기찻길의 궤도를 수정하는 것도 나와 세상이 함께 하고 있다. 앞으로도 진부한 상투어를 내뱉게 되는 일이 있겠지만, 쓰면 안 되는 말 정도는 구분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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