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처음 쓴 소설은 따뜻한 불구덩이로 보내자.

문예창작과 입시 습작 '화풀이'

by 정도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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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면 당연하게도 삶에서 가장 처음 쓴 소설이 있기 마련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 문장 구조가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문예 창작과 입시를 시작하면서 쓴 소설이 내 첫 소설은 아니다. 내가 가장 처음 쓴 소설은 말하자면 2차 창작이다. 노빈손 시리즈 홈페이지에서 '내가 쓰는 노빈손'이라는 이름의 2차 창작 플랫폼을 제공했었고, 거기에 12살인 내가 '노빈손, 하늘을 날다'라는 소설을 올린 적이 있다. 사이트가 유실되면서 내 첫 소설도 날아갔지만. 오늘 보여줄 소설은 입시를 준비하면서 쓴 가장 첫 소설이며, 내가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나의 가장 오래된 소설이다.


글제: '그녀가 다녀 간 다음 날 아침, 현관에 놓인 커다랗고 검은 가죽 가방을 발견했다.'로 시작되는 3000자 이내의 소설을 창작하시오.


제목: 화풀이


그녀가 다녀 간 다음 날 아침, 현관에 놓인 커다랗고 검은 가죽 가방을 발견했다. 군데군데 손 때가 묻고 실밥이 뜯어져 초라하지만 가운데 로고만큼은 확실히 빛나고 있는, 10년 지기 내 친구를 닮은 그런 가방. 그것을 보고 있자니, 난 아직도 그 애를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우리는 생명의 푸르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은 장미 넝쿨처럼 얽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웠다. 심지어 뜻을 모르고 내뱉는 욕에서도 풋풋한 무순 냄새가 났다. 닫히지 않은 성장판(혹은 닫히지 않았다고 믿은 것)은 우리 가슴속에 무한한 희망을 심었으며, 그것이 스러져 썩더라도 어딘가의 거름이라도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 나이대 여자애들이 다 그렇듯이. 하지만 숙희는 그중에서도 무언가 달랐다. 뽀얀 피부에 쌍꺼풀이 없어도 커다란 눈, 작달막한 몸집이 사랑스러웠다. 그 애가 웃을 때 휘어지는 눈은 휘영청한 달밤과 같았다. 어느 면으로 보나 나와는 다른 비범함을 품었다. 우리가 단짝이라는 사실은 내가 가진 얼마 안 되는 자랑거리였다. 숙희야, 넌 내 인생의 자랑이었을지도 모른다.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왜 싸웠던 걸까. 너에게 내 간 쓸개가 다 뭐니, 원한다면 내 유일한 장점인 속눈썹이라도 뽑아줬을 텐데. 그때 마침내 머리에 이가 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은 우연일까? 이는 우리 부모 세대에 존재했다고만 알려져 내려오는 전설이었다. 이는 대한민국의 암흑기와 공장 매연 냄새를 연상시켰으며 나아가 미개함을 상징했다. 아이들은 내 손길이 닿을라치면 재빠르게 도망갔다. 혐오스러운 눈빛을 쏴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치 벌레가 아니라 내 가난함이 옮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수십개의계단을올라우리집에도착하자마자빨간고무대야를끌어당겨와머리를감았다.머리를발작적인손놀림으로쑤셨다.엉킨머리를잡아뜯으니수십가닥이뽑혀나왔다.내기분처럼예리해진손끝이두피를긁었다.엷게배어나오는붉은그것이하얀거품을분홍색으로물들였다.거품이턱을타고떨어졌다.수만개의벌레의알이엉겨있는것같은분홍색거품을헤집고헤집었다.눈물로붉어진두눈이찾았다.이는없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에게 둘러싸인 너를 보았다. 애원하고 싶었다. 너희의 싱그러운 솜털에도 닿지 못해 생명력을 잃어가는 나를 봐줘. 나무껍질처럼 푸석해진 내 머리카락을 봐줘. 내가 너에게 다가가자 아이들은 홍해처럼 갈라졌고, 그 끝에 선 너의 눈은 초승달같이 휘어졌다.


나에 대한 소문이 점차 사그라졌지만, 내 감정의 일렁임은 커질 때 숙희의 얄팍한 팔이 내 팔에 팔짱을 껴왔다. 그 팔은 집게였다. 내 감정의 봉지를 얄팍한 집게로 밀봉하고 냉장고 깊숙한 곳에 넣어버렸다.

"영희야, 우리 화해하자."

그 말은 내 분노를 사르르 녹이지 못하고 다만 꽁꽁 얼릴 뿐이었다.


그것이 냉장고 특유의 멸치 지린내를 풍겼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축적된 냄새. 냄새 때문에 그것을 꺼내 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두었다. 숙희와 나는 지금까지 관계를 유지해 왔다. 숙희는 나를 불쑥 찾아왔고, 어느 순간에는 연락을 끊었으며, 어떤 날은 상냥했지만, 대부분은 신경질적이었다. 그럼에도 관계를 끊어내지 못한 이유는.


어제도 숙희가 다녀갔다. 너는 갓난쟁이 아들을 키우는 고통과, 자기를 아니꼬워하는 시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마구 쏟아냈다. 내가 듣는지 마는지는 상관없어 보였다. 마치 배설하는 것처럼 모든 악한 감정을 내려놓자, 그녀는 후련한 듯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다 현관 앞에서 문득 생각난 듯이 멈칫하더니,

"이거 줄게. 그 나이 되어서도 멀쩡한 가방 하나 없는 게 안쓰러워서, 쓰던 거라도 가져와 봤어."

그러고는 가죽 가방을 툭, 두고 나갔다.


이 행동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하다, 처리해야 할 서류와 네가 어지럽힌 집 안을 정리하다 보니 하룻밤이 넘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 가방을 다시 발견했을 때 가방이 떨어지며 났던 툭 하는 울림이 되살아나고, 내가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그 감정이 생각났다.


난 너에게 전화를 걸기로 마음먹었다. 네가 가방을 두고 갈 때 했던 말과 그 행위 자체가 무례했다고 따질 것이다. 어쩌면 이때까지의 너의 배려 없는 태도를 끄집어낼 수도 있다. (신호음이 한 번) 그렇게 따지다 보면 1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른다. (두 번) 그 소문은 네가 냈는지, (세 번), 나를 쳐다봤을 때 지었던 예쁜 웃음은 뭐였는지, (네 번) 우리가 싸운 이유는 무엇인지. (다섯 번) 물어보고 싶은 것이 태산인데, 네 옥구슬 같은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


허탈함과 초조함이 물러가고 연결되지 않은 전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느낀 그것이, 안도감인 것을 의식하자마자 분노가 몰려왔다. 오갈 데 없는 분노는 덩그러니 놓인 가죽 가방으로 향했다. 네 피부 같이 부드러운 가죽을 칼 끝으로 느꼈다. 자석 부분을 도려내자 피가 뿜어져 나왔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로고를 찢어내려 하자, 가방이 그것만은 안 된다며 애원했다. 찢어발겼다. 난 가방 속 깊숙이 손을 넣었다. 더 깊숙이, 더, 더 아무도 닿은 적 없는 가장 끝의 가죽을 뜯어 밖으로 꺼냈다. 가장 야들야들하고 연약하며 팔딱팔딱 숨을 쉬고 있는 그것. 그것의 비참함을 마음껏 감상한 후에 나는 그것을 믹서기에 넣었다.


가장 처음 쓴 소설. 역사의 시작이라고 부르고 싶다. 1화에서 내가 과거의 습작이 꽤 마음에 든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이걸 아직 안 읽어서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나는 이 단문을 불구덩이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다음 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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