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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할 수 없는 말

카메라가 켜진 순간 말의 힘이 자랐다.

by moviesamm

국어 시간. ‘말의 힘’에 대해 이야기 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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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을 하지 않는 것, 말을 줄이지 않는 것,
그리고 왜 우리가 말로 서로의 마음을 건드릴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 하고 있었다.

교과서 속 단어들
‘표현’, ‘소통’, ‘상대방 입장’.
단어는 깔끔했지만 아이들 표정은 어딘가 텅 비어 있었다.

“그럼… 너희가 직접 말을 바르게 쓰는 캠페인 영상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교실 전체가 들썩였다.
책상이 삐걱거리며 움직이고, 모둠이 꾸려지고,
누군가는 갑자기 할리우드 감독처럼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욕하지 않기를 연기하는 아이들의 역설


‘욕을 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영상촬영
그런데 문제는, 욕을 안 하겠다던 아이들이
욕을 하는 척하는 연기를 너무 즐긴다...

소리 없는 욕. 입모양만 하는 욕. 얼굴만 찡그리는 욕.
그리고 <매트릭스>급의 슬로우 모션 욕 시연까지...


“야, 욕 안 한다며!” 다른 모둠이 외치면
“예술적 표현입니다!”라고 응수한다.
예술적 표현이라는 말은 참 편리한 방패막이다.


그러다

“선생님… 욕하는 척만 해도 기분이 이상해요.”
한 아이가 조심스레 말한다. 연기인데도 기분이 이상하다니.

말은 소리만 만드는 게 아니라 공기를 흔들고, 그 흔들림이 귀를 건드리고,
귀가 움직이면서 마음까지 흔드는 것이라는 걸 아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몸으로 알아채고 있었다.


줄임말로 줄임말을 설명하는 모순...


두 번째 줄임말 남용을 줄이는 영상 촬영. 곧이어 시작하자마자 들려온다.

“야 편집은 알잘딱깔센으로!” “갬성 자막 넣자!” “오케이 쌉가능!”

…나는 뒤에서 조용히 머리를 감싸 쥔다.


줄임말을 줄이는 캠페인을 촬영하면서
줄임말을 풀스택으로 쓰는 아이들.

이건 거의 다이어트 방송 촬영하며 치킨 뜯는 장면이다.


“헐 근데 이거 대본에는 풀어서 써야 하잖아.” 웃으면서도 아이들은 말했다.


줄임말은 편리한데, 정작 전달하려면 풀어서 말해야 한다는 것.
‘끼리’는 빠르지만, ‘남’에게는 그냥 외계어일 뿐 이라는거

‘말을 줄이지 말자’는 건 규칙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자는 마음의 문제였다.
아이들은 짧게 말하려다가 오히려 더 긴 설명을 하게 되는 말의 아이러니를 배우고 있었다.


편집실에서 발견한 말의 온도


편집 시간이 되자 아이들의 눈빛이 다섯 배는 더 진지해졌다.

BGM 음악이 틀어지고 효과음 후보들이 줄줄이 나오고 자막 색깔을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여긴 페이드인!” “저긴 줌인!” “엔딩은 잔잔하게!”

영상 편집은 결국 선택의 문제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울 것인가.
어디를 강조하고, 어디를 덜어낼 것인가.


“선생님, 말도 그냥 자동 편집됐으면 좋겠어요. 기분 나쁜 말은 잘라내고, 좋은 말만 남게.”

그 순간 다른 아이가 덧붙였다.

“근데… 이미 뱉은 말을 어떻게 다시 찍어~” 교실이 잠시 고요해졌다.

아이들은 웃으면서 배우고 장난치면서도 정확하게 이해했다.
영상은 다시 찍을 수 있지만, 말은 언제나 생방송이라는 걸.


카메라 뒤에서 배운 진짜 국어

아이들이 만든 영상이 재생되었다. 서툴지만 진심이 담긴 장면들
욕을 참는 연기, 줄임말을 풀어쓰는 대사,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이들이 직접 쓴 메시지들이 흘렀다.


“여러분 ! 욕 없이 웃기는 게 더 멋있어요.”
“말 줄이지 않아도 더 선명하게 들려요.”
“말은 편집이 안 되니까… 처음부터 조심해야 해요.”


그 메시지가 스크린에 떠 있는 동안 교실은 조용했다가—
곧 이어 터져 나오는 박수와 웃음으로 채워졌다.

그 웃음 속에는 뿌듯함, 부끄러움, 성취감, 그리고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기쁨이 있었다.


이번 국어는 단어가 아니라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을 배웠다.

욕을 안 하면서도 웃길 수 있고, 말을 줄이지 않으면서도 재밌을 수 있다는 걸

말이 길어지는 만큼 생각은 더 깊어지고, 영상을 길게 만들수록 서로를 더 많이 바라봤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면서 사람을 배웠다. 그리고 그걸 영상으로 남겼다는 게 참 귀엽고, 참 대단하고, 조금 부럽기까지 했다.


말은 생각의 옷이다. 옷이 구겨지면 생각도 구겨진다. 옷을 잘 다려 입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아이들은 그 시간을 가졌다. 촬영하고, 편집하고, 다시 보고, 고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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