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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장현 Mar 03. 2024

경계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단념

커피 추출 레시피를 조정할 때는 생각해야 할 변수가 상당히 많다.


너무 많은 변수를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 보자면, 첫 번째로는 바리스타가 정하기 나름이라 통제가 가능한 원두량, 추출량, 분쇄도, 추출 온도, 압력 등의 것들이 있는데 나는 이것들을 내부 요소라 칭하겠다.


반대로 외부 요소라 말할 법한 것은 사람이라면 어찌할 수가 없는 그날의 날씨나 매장의 그 누구도 통제가 불가능한 지금 온 고객과 다음 올 고객 간의 방문 간격(커피 추출로 대입하면 현재 추출과 다음 추출 사이의 간격) 같은 것들이 있다.


마지막으로는 한 매장의 일개 바리스타 사원이 통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원두의 배전도나 로스팅 날짜, 물의 조성 같은 것들처럼 내외부의 경계에 조금씩 걸쳐있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경계선 요소라 부르겠다.


통제가 가능한 내부 요소가 있고, 아예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소가 있으며, 어떻게 좀 해보면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주는 경계선 요소들이 있는 건 커피 추출에서뿐만이 아니라 카페를 운영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이 다 이런 느낌일 것이다.


내부 요소는 자기 하기 나름이니 자기 뜻대로 열심히 하면 되고, 외부 요소는 어차피 손댈 수가 없는 부분이란 것을 누구나 알고 있으니 빠르게 포기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일을 하며 얻는 모든 불행은 경계선 요소에 의해 생긴다고 생각한다.


1. 가져간다며 일회용 컵에 음료를 받더니 매장에 착석하여 마시고 있는 상황.

2. 외부 음식을 가져와 매장에 착석하여 먹고 있는 상황.


위와 같은 상황을 마주한 바리스타라면 대부분은 고객에게 가서 안내 말씀을 한 번 정도는 드릴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뒤에도 변화가 없다면 내가 추천하는 방법은 그냥 단념하기이다.


내가 가서 다시 한번 더 말하면 바뀔 거라는 생각에 재차 안내하는 건 그래서 바뀌면 본전이고, 바뀌지 않으면 자신의 화만 불러일으키고, 최악은 언쟁으로 번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싸움의 최대 피해자는 일하던 자신이 될 게 뻔하고, 싸워서 득보다 실이 많다면 그 싸움은 굳이 안 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알아들을 사람은 한 번으로 충분히 알아듣고, 이 경우엔 그냥 들을 생각이 없는 거다. 안내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하는 사람에게 잘못이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여기서 누가 잘했냐 잘못했냐는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올 고객들을 위해 해야 할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나 매장 곳곳 더러워진 곳을 닦는 것에 비하면.


안다는 것의 반대말은 모른다가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런 경계선 요소를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란 착각의 늪에 빠져있던, 아니 지금도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바리스타이다.


착각의 늪에 오래 빠져있다보면 악어떼가 나를 노리고 몰려온다.


이 악어들은 내가 바꿀 수 있을 거라 착각했던, 제멋대로인 오늘 처음 본 고객이 아니라 내가 바꿀 수 없단 걸 모르는, 늘 나와 함께한 내 머릿속에 있던 생각이다.


생각을 끊어낼 수록 평지로 돌아온다. 단념하라. 썩은 동아줄 잘라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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