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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o습o관 Sep 26. 2024

03. 경

생각의 뿌리를 따라 가보자.

전에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5년간 함께 일한 내 동료 ㅋ는 ㄹ이라는 치매 노인을 돌보고 있다.

노인의 딸은 병원의 간호사이자 싱글맘이다.

야간 근무 스케줄 때문에 치매가 시작된 노모를 봐줄 사람이 필요해서 동네 사람인 친구 ㅋ가 돕게 되었다. ㅋ를 통해 듣게 된 ㄹ의 노력은 눈물 겨울 정도였다.

미국에 효녀상이 있다면 그녀는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미국에 사는 나는 최근에 들어서야 의무처럼 집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타국 멀리 떨어져 사는 나는 부모님의 건강 이상 소식에도 공항으로 달려가기는커녕 태연히 집에 앉아 전화기만 들썩 거린다. 부모를 떠나 타국 만 리에 와서 사는 것부터가 불효의 시작이었겠지만.

그전엔 간간히 하긴 했지만 딱히 말주변도 없어 굳이 용건이 아니라면 전화를 들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어느덧 부모 마음이 조금씩 이해가 되고 자식을 키우다 보니 이제야 비로소 부모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아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화일 뿐이다. 전화드리는 것으로 부모를 봉양했다 할 수 있으랴.

나의 부모님은 할머니의 생활비를 책임지다시피 했고 때 되면 여행도 보내드렸지만 나는 그런 효도는 다 못하고 산다. 유교가 뿌리 깊은 효의 나라에서 온 나인데 어째 효의 효도 모르는 외국 친구보다 못해도 한참 못 한다.



나이 든 부모를 봉양하고 섬기는 것을 우리나라 사람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흔히들 동양 국가들은 유교 사상에 입각해서 효를 중요시하는 게 대단한 냥 이야기 하지만 내가 아는 서구 사람들 중에도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는 사람들이 많다.

봉양이 영 지나치게 들리는 이유는 미국 친구들 부모 중에는 자신의 노후를 준비한 경우도 많아서 경제적 지원이 필요 없거나 누구의 도움 없는 독립적인 삶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아서다.

그들도 상을 당하면 슬프고 그리워하는데 효를 어찌 유교 국가에만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의무감이나 도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들이 때로는 더 솔직하고 진심어린 사랑에서 나와서 하는 자발적인 행동이니 더 진정한 행동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우리의 정신이 정말 유교인가 싶어 KBS에 제작한 문화대유산 아시아 인사이트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공자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인 효와 충을 설명하며 나오는 3년상과 남편을 따라 죽는 열녀들의 이야기를 보니 감탄보다는 닭살이 돋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게다가 부모가 되니 자식이 3년이나 산에서 지내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느라 힘들길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세상에 나가아 자신의 뜻을 펼치기로 마음먹은 공자가 단순히 신념이 아닌 실질적인 행동방안이나 정책을 제안했어야 한다는 점에서 효는 강력했을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공자 마음 같지는 않았을 테니 다스리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도리라 불릴 만한 강력하고 무조건적이라는 강압도 어느 정도 필요했는지 모른다.

이제 부모가 돌아가시고 3년상을 치르거나 남편을 따라 죽는 일은 없다.

갈수록 부모를 봉양하는 경우도 줄어든다. 부모도 마음이 불편하고 자식도 도리나 의무보다 마음에 더 충실하면 좋지 않겠나 싶다. 그런데 굳이 사랑이라 하지 않고 효라고 하는 이유가 무얼까?  

진정한 의미의 효는 도리와 의무를 강조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근간을 가족, 관계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동서양을 넘어 별 차이가 없겠으나 우리가 효라 부르는 관계의 바탕은 감사와 존경이다.

효를 널리 알린 공로야 인정하지만 공자 이전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던 우리.

한국에서 어른을 보면 고래를 숙여서 인사를 하는 풍습의 시작은 앞 선 생명, 다른 생명에 대한 존경이 아니었을까, 나를 낮추어 배우고자 하는 겸허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언젠가부터 한국 사람들은 너무 겸손해서 자기 홍보를 못한다며 경쟁사회에서 지나친 겸손은 무능력이라는 충고가 떠 도는데 나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겸손한 사람을 좋아한다. 자랑이나 거만함과 자신이 할 줄 아는 것을 할 줄 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겸손은 할 줄 아는 것을 못한다거나 감추는 것이 아니라 나만 잘하거나 특별한 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잘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배우려는 자세다.

우리한테는 그런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여전히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한다고.

더 깊이 숙여 인사를 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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