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혹자는 현재 한국이 중국보다 한 발 앞서 테크 강국이 된 데는 컴퓨터 시스템에 훨씬 적합한 한글체계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한글의 장점은 한자에 비교해서 배우기 쉽고 수만 가지 조합으로 현존하는 대부분의 소리를 글로 구현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한글의 장점이라 하더라도 이는 다른 글자들도 나름 갖고 있는 장점이다. 그런 글자라는 것을 가진 민족이 우리만은 아니지 않나?
한글 창제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설민석 강사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의 가장 큰 의미는 애민정신이라고 한다.
그는 세종대왕을 백성을 사랑한 임금으로 묘사한다. 낭만적이다.
하지만 사랑해서만이라면 다른 방법도 많았을 것이다.
다른 역사학자들은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뒤에는 왕권을 강화하고 양반 세력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순수한 사랑만이었는지 왕권 강화와 양반의 견제의 방법인지 두 가지 다 인지 몰라도 방법으로 사람을 선택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사람을 다루는 방법으로 글을 선택했다는 점은 더 놀랍다.
글을 만드는 것이 왕권 강화와 어떻게 견제의 수단이 될까?
글은 의사소통과 교육의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백성이 읽고 쓸 수 있는 글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대중문화와 대중 교육의 시작이고 민주주의 전초 단계가 된다.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를 반대한 이유는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와 같다.
어리석은 인간에게 소중한 한 표를 똑같이 나눠야 한다는 것은 위험하다는 걱정에서다.
사회 돌아가는 것에 관심도 없고 이제 막 대학을 들어간 20세 청년과 사회. 경제. 정치 분야의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60세가 세상을 보는 깊이가 다른 것이 확실한데 투표에서의 가중치는 정확히 1대 1이다.
우리는 왜 지금 평등이라는 가치를 보편적인 가치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을까?
그런데 바로 세종대왕의 신선한 발상이 이 부분이다.
어리석은 인간을 현명한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면?
누구나 현명한 인간이 될 수 있다면?
나이가 어린 청년은 청년의 시각으로 어른은 어른의 시각대로 사회를 관찰하며 돌볼 수 있다면?
절대로 변하지 않는 인간
본능에만 충실한 인간
눈앞의 것에 일희일비하는 인간
우리는 인간의 민낯도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세종은 그런 인간들에게 글을 선사했다.
세종이 글을 선택한 이유가 무얼까?
정계섭 작가의 '말로 배운 것이 산 지식이 되지 못하는 이유'라는 책에서 나온 언어의 목적을 되새겨 보면
정보전달, 사교, 유희, 감정표현, 질문, 성찰이 있다.
말은 있으나 글이 없던 인간이 글이 생기면서 생기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기록과 성찰이 아닐까.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비로소 나를 돌아보고 나의 부족함을 느끼게 되면 인간은 배움을 갈구하게 되지 않을까.
조선왕조실록이란 소중한 문화유산에서도 알 수 있지만 왕의 업적과 시시비비를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는 글은 정치세력에게 그 무엇보다 매서운 회초리가 아니겠는가.
훈민정음이 반포된 후에도 한자를 더 많이 사용했고 실제 한글이 널리 통용되고 사용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가까워져서라고 한다. 그러니 한글자체가 시민의식이나 지식수준을 갑자기 고취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세종대왕이 남녀노소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는 한글을 만들어 배포한 일은
누구나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동기부여인 동시에 희망이 됐을 것이다.
세종이 인간을 사랑한 방식은 가능성에 대한 열린 마음이었다.
최고가 아니라 최선에 대한 가능성이다.
세종이 뿌린 누구나라는 가치는 평등과 맞닿으며 자유 민주주의의 씨앗이 됐다.
지금 민주주의의 메카라 불리는 1776년 미국 건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초석이었다.
성찰을 통해 깨닫고자 하는 인간
글자를 만들어 깨달음을 돕고자 한 임금
늘 새로운 도전을 하는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