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사는 동네는 미국에서도 좋은 학군입니다. 직장 따라 이사 올 때보다 더 좋아지는 운이 따랐습니다.
저희 동네에는 Project Idea plus ( PI Plus) 라는 magnet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학군에서 영어와 수학 시험을 봐서 일정 시험 성적이 된 아이들로 꾸려지는 일종의 특별 프로그램입니다.
초보엄마에다 게으른 엄마인 제게 아이가 프로그램에 적합하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이게 좋은 건지 어쩐 건지 아무 정보가 없었습니다. 주변에 아는 엄마들도 없어 귀동냥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편지를 보니 아이가 학교를 바꿔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민이 됐습니다. 어렵사리 만든 친구들을 뒤로하고 4학년에 갑자기 다른 학교로 간다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습니다. 게다가 버스도 이 동네 저 동네 흩어진 애들을 다 태워야 하니 한시간 가량 걸리는 것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담당 선생님께 프로그램에 대한 질문과 제 걱정을 메일로 보냈습니다. 답이 없습니다.
아이에게 가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자기가 만든 기회니 가보고 싶답니다. 궁금하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갑론을박을 뒤로하고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간 프로그램은 제가 그리던 수업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말 그대로 프로젝트 중심의 수업을 합니다. 예를 들면 사회 과목에서는 아이들이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는 프로젝트를 하면서 사회의 역할, 국가의 종류, 독립 선언문 이런 것들을 배웁니다. 이런 것을 배우는 이유는 아이들이 하게 될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를 위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가 관심 있는 사회 운동을 위한 홈페이지를 개발하고 설문지를 발송하고 자금을 모았습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수십 통의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큰꿀이가 보낸던 메일들에 사회 각층에서 일하는 어른들에게 답이 옵니다. 이 숙제를 한다고 밤늦게까지 씨름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진짜 세상을 바꾸지도 못할 텐데, 결국 흉내만 일인데 뭘 저렇게까지 하나 싶은 생각을 하는 제가 부끄러워질 정도입니다. 지금 큰꿀이가 하는 자원봉사 과외 활동은 이 수업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실제 채택되어 운영되는 활동입니다. 또 다른 예는 비율을 계산하는 수학 개념을 배우기 위해 다리를 만드는 프로젝트 수업입니다. 실제 존재하는 다리를 자신이 정한 비율대로 줄이기 위해 모든 부분을 같은 비율로 축소하며 배운 수학을 적용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세상의 다리들을 관찰하고 조사하고 적절한 재료를 정하고, 다리를 만들며 다양한 공법도 공부합니다. 밤늦도록 다리와 씨름하는 아이를 보며 그냥 문제 풀면 되는 것을 어렵게 산다 하고 생각이 슬슬 올라옵니다. 반성합니다. 큰꿀이는 프로그램을 만끽했고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지금도 가깝게 지냅니다.
매년 이 아이들로 인해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일부 부모들의 항의가 있어 프로그램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커트라인을 낮춰주면 조용해지는 모양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이 시험을 준비하는 집단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시험의 목적은 이런 방식 프로젝트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판별하는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 승패로 전락한 것입니다.
언젠가 도서관에 가니 어떤 책들만 따로 사서 뒤에 있길래 저 책들은 뭔데 저기 있냐 물으니 그 프로그램 입학을 위해 사용되는 시험 대비 문제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왜 저 뒤에 두었는지 물으니 훔쳐가는 사람들이 있어서라고 답을 들었습니다.
위의 문제들은 이런 프로그램이 있다면 한국에서도 일어날 법한 일들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국은 학군별로 이런 프로그램들을 나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미국과의 차이는 미국은 인구가 많고 다양한 인종, 가치관이 존재하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미국의 진짜 힘은 다양성입니다. 그리고 다양성의 대항마는 추진력입니다.
실제로 저런 프로그램이 있는지 모르는 부모들도 많습니다. 편지를 받은 아이만 아는 것이고 기껏해야 주변 친구 몇몇이 알 뿐입니다. 이 프로그램에 온 아이들은 유독 동양계가 많습니다. 동네에서는 소수인종인 중국, 한국, 인도 아이들이 이 반에서는 소수인종이 아닙니다. 저는 이유를 교육열에서 찾습니다. 교육열이 높은 한국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정말 관심도 없는 부모도 반이 넘고 편지를 받고 안 보낸 가정도 가끔 있습니다. 한국은 교육열이 높고 비교적 단일화된 인종과 가치관으로 모두 알게 될 뿐 아니라 일단 안 이상 가만히 있기 힘들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프로젝트 수업의 가장 큰 장점은 공부의 쓰임을 바로 실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공부의 목적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하고 싶은 공부만 해야 한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다리를 만들고 싶지 않은 아이도 홈페이지를 만들고 싶지 않은 아이도 해야 합니다. 하는 과정에서 재미를 찾는 거지요.
책을 강조하는 교육관을 가진 분들은 자주 자기주도 학습을 이야기합니다. 저도 자기주도 학습의 힘을 믿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자기 주도는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이유를 찾아가며 하는 공부입니다. 공부의 동기는 이유가 있어서일 수도 있지만, 배움의 즐거움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이유를 모르지만 배워야 하는 공부는 어떻게 할까요? 좋아하는 공부나 이유가 있는 공부만 해야 한다는 발상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공부 좀 하는 미국 고등학생들은 모두 엔지니어가 되겠다고 합니다. 그럼 문학 수업은 사라져야 할까요? 엔지니어가 되고 싶은 아이들에게 이유가 없을 텐데 말이죠. 아마도 제일 큰 피해자는 문학을 모르고, 읽는 즐거움을 모르고 어른이 된 아이들이지 싶습니다. 이 아이들에겐 공학자의 삶을 다룬 문학을 소개한다거나 공학으로 일어나는 문제를 다룬 문학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관심이 가는 주제이면서도 문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를 체험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르치는 한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어가 배우고 싶어서 온 아이들, 어른들의 한국어 실력은 정말 금방 자랍니다. 하지만 한국어가 정말 좋고 관심이 있어서 배우는 아이들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럼 배우고 싶은 아이들만 배워야 할까요? 모국어를 배우는 가치를, 이유를 이해하기엔 지금은 너무 어릴 수도 있습니다. 배워야 한다고 해서 온 아이들이 많지만 그 아이들이 공부를 통해 한국어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한국어 맛을 알게 하는 것이 제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에게 재미난 한국책을 소개합니다. 한국어로 쓰인 책이 재미날수록 제 어깨가 올라갑니다. 책으로 할 수 있는 건 이것저것 다 해 봅니다. 이봐라.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 이렇게 맛깔난 한국어, 네가 한국어 모르면 어떻게 읽겠냐. 이래도 안 배울래? 그리고 그 시작이 지금 제가 글을 쓰는 이유로 이어졌습니다.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를 통해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 배움에 대한 즐거움을 많이 제공해 주는 수업까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유는 학생이 스스로 발견해야 합니다.
미국 고등학교는 대학처럼 원하는 것만 골라듣는다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선택이 조금 있긴 하지만 들어야하는 필수 과목들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미국은 선택을 줄 수 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고등학생인데 구구단도 아직 못 외는 아이들과 대학 수학을 하는 아이들이 모두 존재하는 게 미국 학교니까요. 학생 수도 무시 못합니다. 예를 들어 기초 과목을 모두 들은 고등학교 4학년이 되면 작문을 위주로 하는 반, 대학에서의 학점을 준비하는 반, 영어가 제 2외국어인 아이들을 위한 영어반, 세계 문학반 등 이런 식으로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각반에 25명 가량의 아이들로 채워집니다. 한국에 이런 반들이 생긴다면 어떨까요? 어느 반으로 갈지 대충 예상이 됩니다. 나머지 반들은 하나둘 사라지겠죠. 게다가 이젠 저출산의 문제까지 생겼습니다. 한반도 다 안 채워지는 상황에 이렇게 다양한 선택지를 준다면 선생님 한 분에 학생 한명일 수도 있습니다. 돈이 많다면야 문제가 없지만 어느 나라나 교육재정은 보통 국민 세금에서 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구가 줄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 마당에 성공 보장이 아닌 교육에 더 많은 세금을 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제 이야기의 끝이 역시 한국은 안 돼. 한국 사회는 다 뜯어고쳐야 해. 이러니 미국 미국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신다면 이건 한국에 계신 선생님들 힘 빠지는 소리일 것 같습니다.
상황에 맞춰 만들어진 것이니 무조건 미국 것이 좋은 거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 수영을 배우러 가면 초등학교 시절 3년 정도 배운 저보다 수영을 못하는 고등학생들이 수영을 가르칩니다. 그런 고등학생 선생님들의 수영 실력을 문제 삼는 부모는 별로 없습니다. 이게 성에 안 차면 돈을 아주 많이 내고 프로 코치에게 가면 됩니다. 물론 프로코치라고 하더라도 한국에서 체대를 나오고 국대출신인 수영선생님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이미 미국에 아이를 유학 보낸 수많은 부모님들이 눈치를 챘습니다. 한국이 낫구나. 그런데 영어 교육에 있어서의 장점 때문에 강행합니다. 다양성에 힘으로 일단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도 덜 받습니다. 그러면 이번엔 한국어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정체성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이번엔 또 어디로 이사를 가야 할까요?
한국에는 경제에 관심이 많은 큰꿀이가 읽고 푹 빠진 '최강의 실험경제반 아이들'을 쓴 김나영 선생님 같은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게을러 많이 몰라서 그렇지 아마 많이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큰 소리는 못 내시겠지요. 대세가 말하는 결과, 성공, 입시, 성적이 목적이 아니니까요.
한국이고 미국이고 안 되는 사람은 계속 안 된다고 하고 된다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도 해 냅니다. 그리고 그분들과 함께 가는 방법은 무얼까 생각해 봅니다. 세상이 바뀌고 제도가 바뀔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하루하루 크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방법을 모색합니다. 이사를 갈 능력도 없고 게으른 저는 다양성과 추진력을 이어주는 관계,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책, 찾은 이유를 이뤄내는 습관이라도 가르칩니다.
큰꿀이가 주말마다 하는 무료 과외 봉사에서 만난 한국에서 유학을 온 지 얼마 안 되는 초등학교 여자아이가 갈 때마다 묻는답니다.
언니 pi plus 예요?
전 6년을 몰랐는데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는데 정보력이 대단합니다.
왜냐고 물으니 자기도 들어가고 싶답니다.
그래서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닌데 과외를 받으러 주말반납하고 온답니다.
그럼 왜 들어가고 싶냐고 물으니 그래야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답니다. 이건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나 이왕이면 좋은 대학 가서 좋은 교수님께 배우고 싶으니까요.
문제는 다음입니다.
뭐 배우려고?
모른답니다.
공부하는 게 좋으냐고 물으니
싫답니다.
뭘 하고 싶냐고 물으니
한 번도 신나게 놀아본 적이 없어서 놀고 싶답니다.
도서관 바로 앞엔 공짜 눈썰매장이 떡하니 펼쳐져 있는데.
아이 어머님이 큰꿀이 엄마인 저를 만나고 싶다며 아래층에서 작꿀이와 희희닥거리고 있는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한국에서 선생님이셨다고 소개하시네요.
대학 갈때 추천서를 써 주시겠다고 감사한 제안을 하시지만 대학 가려고 하는 봉사가 아니니 웃으며 넘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