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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Aug 30. 2023

변하지 않는 취향

이제 제주기억을 bxd 유튜브에서도 만나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ebJJhxqw-_A&t=183s


너는 왜 목욕탕을 안 가냐.

딸과 함께 목욕탕에 다니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던 엄마가 언젠가 했던 말이다. 일 년에 두세 번 혼자 목욕탕에 가는 엄마는 팔과 다리와 몸통 전면까지는 어떻게 할 수 있어도 등만큼은 도저히 혼자 해결할 수 없었다. 언젠가 세신을 받은 적도 있지만 성에 안 찼거나 돈이 아까웠는지 이용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등은 언제나 미완의 과제였고 겨울만 되면 가려움은 더 극심해져 효자손을 곁에 두어야 했다. 간혹 본가에 내려가면 엄마는 나를 화장실로 불러 등을 밀게 했다. 그러면 하던 일을 멈추고 홀딱 벗은 채 쪼그리고 앉아 있는 엄마 뒤에 같이 쪼그리고 앉아 허연 등을 밀었다. 이태리타월이 도로가 나듯 지나가며 살갗이 빨갛게 일어났고 묵은 때가 지우개가루처럼 밀려 나왔다.

목욕탕에 가지 않는 이유는 심장을 옥죄는 듯한 뜨겁고 갑갑한 공기 외에도 나의 알몸을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는 게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나 역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누군가의 맨몸을 보는 것이 편치 않았다. 특히 가슴이 배꼽까지 내려온 할머니들이나 수술자국이 또렷한 어머니들의 몸은 여자의 일생을 목도하는 것만 같았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죄를 지은 것 마냥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런 내가 온천엘 다 오다니. 대견하네.

여행 13일째. 혼자서 이렇게 잘 쏘다닐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이 여행의 힘인지, 제주의 힘인지, 저 밑바닥에 내재되었던 도전 정신이 십분 발휘되고 있었다. 이곳은 국내 몇 안 되는 탄산온천이었고, 탄산이 노폐물 배출과 피부 미용에 좋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이번 기회에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혹시 모른다. 나이가 들면 취향이 변하듯 온천을 좋아하게 될지도.

하얗게 김이 서려 있는 유리문을 열자 뜨거운 공기가 훅 끼치며 목욕탕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수십 평 되는 공간을 가득 메운 나체의 여자들이 저마다의 자세로 서있거나 앉아 있는 모습이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를 연상시켰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나 역시 한 폭의 회화의 한 장면이 되어 샤워를 마치고 생리혈 냄새가 나는 노란 탄산 물에 몸을 담갔다. 검은 돌로 쌓아 올린 벽에 걸린 대형 안내판의 설명에 따라 냉탕과 온탕, 열탕, 사우나를 번갈아 오가며 모공이 확장되었다 수축되기를 기다렸다. 그 시간은 지루했고 숨이 막혔다. 나이가 들어도 취향은 변하지 않았다.

신선한 공기를 맡기 위해 대여한 수영복을 입고 노천탕으로 올라왔다. 탁 트인 하늘이 막힌 숨을 뻥 뚫어주는 것 같은 해방감을 주었다. 왼쪽으로 솟아 있는 산방산과 시선을 나란히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낮게 깔린 집과 밭, 그 사이로 깔린 도로를 보니 여태껏 사람이 산을 보는 게 아니라 산이 인간군상을 보는 게 아닐까 싶었다. 사람이 나고 죽고, 집이 세워지고 무너지고, 없던 도로가 나는 과정을 저 산방산 오래도록 지켜보았을 것이다.

한바탕 욕탕에서 시간을 보낸 나와 달리 노천탕 사람들은 이곳으로 먼저 온 모양이었다. 나와 달리 그들의 머리는 메말랐고 얼굴은 보송했다. 젊은 커플들은 신혼여행지에서나 입을 법한 화려한 수영복에 풀메이크업을 하고 욕조에 들어가 있었다. 욕조물에는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가지와 누군가의 발에서 떨어진 분진과 머리카락이 떠 있었다. 여탕보다 더 작은 욕조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불편해 이곳에서도 십여 분을 머물다가 도로 나왔다. 경험하니 확실히 알겠다. 취향이란 단순히 호오의 구분이 아닌 한 인간의 시그니처와 같아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목욕탕은 나와 맞지 않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이번에도 내비는 나를 산으로 안내했다. 한번 와본 길이어서 그런지 낯익은 표지판과 슈퍼가 보였다. 어제 그렇게 무서웠던 곳이 오후의 태양 아래에서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두려움의 정체는 미지未知였다. 삶에서 겪게 되는 대부분의 선택장애는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한다. 두려움을 깨는 방법은 기지旣知뿐이고, 알려면 공부하거나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이성주의자든 경험주의자든 궁극적 지향은 같을 것이다. 앎으로써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 수없이 마주하는 선택의 순간이 어려운 것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 나라는 한 인간을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석양을 보기 위해 사람이 많은 협재를 넘어 금능해수욕장으로 왔다. 모래사장을 걷다 난간에 걸터앉아 해가 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낙조를 머금은 붉은 태양이 서서히 바다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태양 주위로 몇 겹의 붉은 띠가 선명한 빛을 발하며 태양을 호위하고 있었다. 맹렬히 타오르는 용광로 속 주철 같이 불타는 태양이 바다 아래로 사라진 후에도 붉은 띠는 충직한 호위무사처럼 한참을 빛을 밝혔다. 제주를 떠날 날이 머지않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내일은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오고감의 연속, 만남과 이별의 반복, 익숙하면서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금능이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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