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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숙소에 돌아오니 여자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여자와 지내는 네 번째 밤이었다. 각자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테이블에 앉아 그날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하루의 루틴이 되어버렸다.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관심을 가져주는 것. 여행지에서나 가능한 낭만이었다. 여자는 오늘 산방산을 바라보며 걷는 올레길 10코스를 완주했다고 했다. 무려 6시간 거리였다.
저는 오늘 탄산온천 다녀왔어요.
어쩐지 얼굴이 좋아졌어요.
그래요? 잘 모르겠는데.
여기가 반짝거려요.
여자는 검지로 나의 볼을 가리키며 동심원을 그렸다. 아까 다 같이 쓰는 물에 얼굴을 담글 수는 없고 손에 탄산물을 묻혀 얼굴을 지그시 눌러줬는데 확실히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걸으면서 무슨 생각하세요?
내내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여자를 처음 본 날 여자는 걷다 보면 생각이 정리된다고 했었다.
회사일도 생각하고, 나이 드신 부모님 생각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런 생각도 하고, 이것저것 생각하는 거 같아요. 저는 그런 게 있거든요. 회사 생활하고 뭐 하고 하다 보면 머리가 복잡해지잖아요. 이거 좀 위험한데, 과부하가 올 것 같다 싶으면 올 스톱하고 걸어요. 트래킹도 다니고요. 일 년에 한두 번은 제주도에 오는 거 같아요. 자연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신기하게 정리가 돼요. 정리된다는 게 고민이 해결되고 그런 건 아닌데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랄까.
여자의 직업은 프로그래머였다. 그전에는 여행 가이드로 전 세계를 누볐지만 좋아했던 일이 일이 되자 더 이상 그 일을 좋아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수요가 많고 진득하게 앉아서 하는 일을 찾다 보니 프로그래밍이었고 국비 지원 프로그램을 수료해 취업에 성공했다. 그때 여자의 나이 마흔이었다.
마흔이면 되게 늦은 나이잖아요, 특히 여자한테. 그때는 잘한 선택일까 고민 엄청 많았는데 돌이켜보니 잘한 거 같아요. 늦게 시작해서 좋은 점도 있거든요. 주변에서 많이들 도와주고. 제 인생에 마지막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몸 받쳐줄 때까지 오래 버텨야죠.
전혀 다른 분야라 힘들 것 같아요.
오히려 재밌어요. 원래 하던 일과 달라서. 힘든 것도 있는데, 떠나고 싶을 때는 지금처럼 떠나요. 확실히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해야 즐길 수 있는 거 같아요. 일은 일이니까.
여자에게는 자기 확신이 있었다. 결실을 이뤄낸 자의 자신감이 있었다.
남자친구 있어요?
여자가 물었다. 잠시 b의 얼굴이 어른거렸지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왜요?
그러게요. 있으세요?
사실...
여자에게는 같은 취향과 취미를 가진 연하의 애인이 있었다. 여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쿵짝이 맞는 상대였지만 언젠가부터 상대가 예전 같지 않다고 했다.
하루는 등산을 하는데 등산 가방이 크고 무겁잖아요. 내가 아침부터 음식 준비하고, 제 가방에 컵이니 음식이니 잔뜩 들어있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나 무거워, 했는데 뭐라는지 아세요? 나도 무거워 그러는 거예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여자는 그때 일을 생각하니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여자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뭐가 문제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여자에게 대답했다.
무거웠나 보죠.
여자는 나의 반응에 살짝 당황한 듯 보였다. 그리고는 그것이 왜 문제인지를 빠르게 설명했다. 예전에는 자신의 가방을 상대가 들어주곤 했다는 것이다. 연애가 길어지며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소홀해졌다는 것 같았다. 설명을 할수록 여자는 점점 더 화가 나는 듯했고, 다소 높아진 언성으로 다른 일화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퇴근하고 저녁 먹고 나왔는데 힘들다고 자기 먼저 집에 간다고 잘 들어가라잖아요. 자기만 힘든가. 나는 안 힘든가. 나도 일하는데. 힘들면 다음에 만나자고 하던가. 만나서 시큰둥한 표정으로 앉아서 기운 빠지게 하고 밥만 먹고 들어가라니. 그게 말이 돼요?
이번에도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니 여자가 답답한 듯 말했다.
아니, 저를 집에 데려다줘야죠. 요즘 세상도 흉흉한데 밤에 어떻게 여자 혼자 그렇게 보낼 수가 있어요?
데려다줘요?
항상 그렇게 했거든요. 저를 집에 데려다주고 자기는 택시 타고 집에 가고.
와, 저는 연애하면서 그런 대접을 받아본 적 없어요. 집까지 데려다주거나 같이 등산을 한다거나 뭘 들어준다거나.
b의 이야기였다.
제가 보기엔 남자친구분이 되게 사랑하시는 거 같은데요? 연애 초기도 아니고 그렇게 하는 사람 없어요.
여자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아무래도 여자는 이전과 달라진 상대에게 헤어짐을 고하고 제주에 온 것 같았다.
다시 잘해보시는 거 어때요? 그런 사람 없어요.
내 집이고 싶은 숙소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제주기억은 사실과 허구 사이에 있으며 이야기를 위해 과장과 각색이 있음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