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제주기억을 bxd 유튜브에서도 만나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LNqhsXhVpX8
아침에 일어났을 때 여자는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집 나간 정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잠자리가 익숙해지니 누적된 여독이 몰려왔다. 하마처럼 입을 벌려 소리 나게 하품을 하는데, 양치질을 마치고 방 안으로 들어온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멋쩍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공복에 걸으면 배고프지 않아요?
그래서 오늘은 좀 먹고 출발하려고요.
뭐요?
글쎄요, 브런치나 할까 생각 중이에요.
어, 저도 같이 가요!
그래요.
이른 아침인데도 카페 문은 열려 있었다. 돌담집을 개조해 만든 아담한 커피숍이었다. 나무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낭랑한 목소리의 여주인이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했다. 여주인은 오십대 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동안의 외모를 감안하면 그 이상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간다는 표현이 떠오르는 목소리에 앙칼진 발성이 왕년에 배우였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카페 안은 여주인이 평생에 거쳐 모았을 온갖 종류의 빈티지 소품이 창틀과 벽, 카운터와 바닥 곳곳에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자칫 잘못해 톡 하고 건드리거나 스텝이 꼬여 넘어졌다간 큰 사달이 날 수 있을 만큼 빼곡했다. 천장에는 네덜란드 국기가 걸려있었고 벽에는 이탈리아 지도가 붙어 있었다. 이 공간을 꾸미기 위해 들였을 공과 시간이 가히 짐작되었다. 카페는 여주인의 인생의 축소판이었다. 이곳에는 여주인의 취향과 가치관, 살아온 인생의 궤적까지도 담겨 있었다. 이 소품 하나하나에 다 사연이 있겠지. 그 시간을 헤아리자 괜히 마음이 스잔해졌다. 나이가 들수록 보이는 게 많아 큰일이다.
커피 맛 괜찮아요? 여주인이 와 말을 걸었다.
너무 맛있어요. 여자가 대답했다.
예쁜 소품이 참 많아요. 다 어디서 구하셨대요? 내가 물었다.
제가 해외생활을 오래 했거든요. 조금씩 모았더니 이렇게 많아졌네요. 호호
어디 계셨는데요? 여자가 물었다.
젊었을 때 이탈리아에서 첼로를 했어요.
유학하셨구나. 여자가 말했다.
네. 호호
여주인 뒤로 검은색 바탕에 첼로가 그려진 오래된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었다.
뚜이가 뭐예요? 내가 물었다. 뚜이는 카페 이름이었다.
아, 네덜란드 새에요. 제가 좋아하는 새여서.
네덜란드를 좋아하시나 봐요. 카운터 쪽에 세로로 매달린 네덜란드 국기를 보며 내가 말했다.
네덜란드에서도 오래 있었거든요. 한국 돌아오기 전에 거기서 카페 했었어요. 다 옛날 일이네요. 호호
여주인은 말끝마다 호호, 하고 웃었다. 원래 웃음이 많기도 하겠지만 자신과 이 공간에 관해 질문을 받아 더 많이 웃는 듯 보였다. 첼로를 그만두고 이탈리아에서 네덜란드로 넘어가고 다시 한국에 와 이곳 제주에 정착하기까지 여러 인생의 전환점에서 겪었을 기대와 좌절, 희망과 실망 같은 것들이 저 웃음 너머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또 마음이 콕콕 쑤셨다. 왜 자꾸 이런 것들이 보이는지. 어릴 땐 나밖에 몰라 남은 보이지 않았는데 다 나이가 든 까닭이다.
여주인이 돌아가고 여자와 나는 몇 마디 나눈 후 각자의 용무에 빠져들었다. 여자는 sns에 여행 사진을 올리는 듯했고 나는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여자가 물었다.
책을 좋아하나 봐요.
예전에요. 지금은 별로 안 좋아해요.
여행지에 책을 들고 올 정도면 좋아하는 거죠.
원래는 좋아했는데, 지금은 잘 안 봐요.
왜요?
... 사실, 글을 썼었어요.
어울려요.
아니에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한... 5년 정도? 근데 좀 지겨워졌달까. 지금은 안 쓴 지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났고요. 글을 안 쓰니까 책을 안 보게 되더라고요.
실현되지 않은 욕망 때문에 책을 보면 마음이 복잡해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저도 그림 그리는 친구가 있었는데, 전시회도 하고 그러더니 지금은 반찬 가게 해요.
반찬 가게요?
의외의 전개에 놀라 물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붓을 잡았던 손이 주방일로 뭉툭해지고 거칠어졌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또 뭔가를 잘못 먹은 듯 켁켁거렸다.
왜요?
돈 벌어야 하니까.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 웃었고, 나는 어딘지 속상한 기분이 들어 따지듯 물었다.
돈 벌면서 그릴 수 있잖아요.
더 이상 그릴 이유가 없대요.
왜요?
계속 새로운 걸 창작해 내는 게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지금은 다른 중요한 것들이 생겨서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어졌대요. 그 친구가 알바 한 번 안 해보고 그림만 그렸는데, 그림 말고 처음 하는 일인데, 가게 일이 재미있고 잘해보고 싶다고 하네요.
고공 위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줄꾼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현실과 꿈 사이에서 위태롭게 서 있다 자의 혹은 타의로 땅으로 착지한 줄꾼은 마음이 후련했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지 못했다. 땅으로 내려온 후 부러 등을 돌리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켁켁 대던 마음이 이제는 조여 왔다. 다 나이가 들어서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건. 마음이 컥컥 대는 건. 눈가가 젖어왔다. 냅킨을 손가락에 끼워 눈가에 가져다댔다.
울어요?
그냥. 눈물이 나네요. 안구건조증이 있거든요.
왜 우는 거예요?
그 과정이 상상돼서요. 그림만 그리던 사람이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을 거 아녜요.
눈물이 바로 그치지 않아 냅킨을 한 장 더 집어 들었다. 놀란 기색의 여자는 잠자코 있다가 얼마 뒤 다시 물었다.
그래서 글은 더 안 써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다시 써보면 어때요? 공감을 깊게 하시는 거 같아요. 공감이라기보다 그 감정으로 들어간다고 할까. 보통 아, 그렇구나 하고 마는데 그 감정을 직접 느끼는 거 같아요. 더 깊이 들어간다고 할까.
글쎄요.
글 계속 써 봐요. 그런 감성? 감수성?이라고 하나. 누구나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커피를 다 마신 여자는 슬슬 가봐야 한다며 일어났다. 남은 파니니 두 조각을 건네곤 저녁에 보자고 인사하고 떠났다.
글이라...
고개를 가로저으며 책장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