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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Aug 23. 2023

경험주의

이제 제주기억을 bxd 유튜브에서도 만나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iPUB-irj57c


가게 안에 들어서자 도민은 야자수가 그려진 주황색 셔츠를 입은 남자와 어깨를 부딪치며 인사했다. 도민이 상대와 근황을 나누는 동안 나는 뒤에서 이곳을 훑었다. 하와이에 가본 적은 없지만 미드에서 본 것만 같은 이국적인 곳이었다. 그럴싸하게 흉내 낸 것이 아니라 현지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오기 위해 세심하게 신경 쓴 티가 났다. 서핑보드, 야자수 잎, 우쿨렐레 같은 소품 외에도 한쪽 벽에 알파벳 대문자로 메뉴가 적혀 있어 더 그런 듯했다. 시간이 흐르며 벗겨지고 몇 겹을 덧칠한 짙은 옥색 페인트도 이곳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하와이안 꽃으로 잘 알려진 플루메리아가 프린팅된 식탁보가 깔려 있었다.

뭐 먹을래?
저는 많이 못 먹을 거 같아요. 오빠가 골라요.
달고기 먹어봤니?
고기는 부담스러운데.
생선이야.

살짝 민망했지만 바로 되받아쳤다.

갈매기같은 거네. 기 이름을 한 생선.
그건 잘 모르겠다만, 몸에 달이 그려져 있거든. 그래서 달고기야.

도민은 달고기 튀김과 맥주를 시켰고 나는 제주구좌당근주스를 시켰다. 제주에 와서 언제부턴가 평소에 먹지 않는 것들, 하지 않았던 행동, 의외의 선택을 이어가고 있었다. 바이킹도 그중 하나였고, 당근주스도 그러했다. 서울이었다면 이 나이에 놀이동산에 갈 일도, 음식점에서 당근주스를 주문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처음 먹어본 달고기의 맛은 담백한 생선가스 같았고, 당근주스는 너무나도 건강한 단맛이어서 다시는 먹지 못할 것 같았다.

여기는 어떻게 알게 되었어요?
아까 걔가 여기 사장이거든. 예전에 오래전에 제주 여행하다 만났어. 게스트하우스에서. 사장 와이프도 같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고. 같이 여행 다니고 그랬는데 둘이 결혼할 줄은 몰랐지.
와, 여행하다 만나서 결혼까지 한 거예요?
잘 만난 거지. 둘이 하와이를 너무 좋아해서 거기 여행 가서 살고 하다가 제주에 정착해서 레스토랑을 열었지.

도민이 맥주를 마시며 말을 이이었다.

여기가 워낙 특이하잖아. 그때 막 블로그 같은 게 유행하면서 여행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진 거지. 한동안 잘 되다가 입소문발 좀 떨어지니까 그때 또 외국인들이 오기 시작하네. 근처에 국제학교가 있거든. 그쪽에 또 소문이 난 거야. 미국 같은 데가 있면서. 지금은 이 동네 유명 식당이 됐지.

도민이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인생 모르는 거야.

도민은 그 말을 자주 했었다. 지난번에도, 이번에도, 오래전 어느 술자리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인생 모르는 것이기에 고민할 바엔 그냥 부딪쳐 보라고. 한 곳이라도 더 다니고,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고, 더 많이 경험하라고. 그의 말은 프랜시스 베이컨, 존 로크 같은 철 지난 철학자의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 진짜 의미는 실제적인 경험과 연결되었을 때 비로소 파악될 수 있다는 경험주의.


나는 굳이 분류하자면 이성주의 쪽이었다. 똥인지 된장인지 굳이 먹어야 아는 것 아니지 않냐며 합리적 이성을 강조했고 내려와야 하는 산을 힘들게 오르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삶이 자주 재미가 없었던 건 과도하게 머리를 쓰고 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적지 않은 나이가 되어 깨닫고 있다. 인생에 정답은 없지만 살아가는 데는 경험주의 쪽이 현명하지 않을까, 세상이 경험해야 하는 대상이라면 그 사실만으로 생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한다.

한라산 갈 때 뭐 준비해야 하지?
준비할 거 없어. 내가 다 있으니까.
아주 자신만만하네.
그날 윗세오름으로 가서 서귀포로 내려올 거야. 너희들 컨디션을 보고 호텔을 잡을지 게스트하우스로 갈지 보자고. 내가 항상 가는 게스트하우스가 있는데, 거기 사람들이 진짜 좋거든. 여기 사장도 거기서 만났고. 다음날 서귀포 쪽을 둘러봐도 좋을 것 같고.
준비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편하네.
참, 신발은 사야지. 그 신발로는 못 가. j 오는 날 시내 가서 신발을 사자.
좋아요.
차 반납은 언제야?
잠깐만. 내가 이번엔 확실히 적어놓았지. 삼일 뒤네. 우리 한라산 가기 전전날 아침.
이번에는 렌트하지 말아 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짐은 내가 옮겨줄게.
짐을? 그럼 난 고마운데, 회사 안 가?
휴가 낼라고.
우리 때문에?
겸사겸사. 오랜만에 보는 건데 재밌게 보내면 좋지.

도민이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맥주를 들이켰다.

역시 경험주의자의 논리는 간명해서 좋다.




왔던 대로 가면 돼.

도민은 간단히 인사하고 버스를 타러 갔다. 7시가 넘어 슬슬 어두워지고 있었다. 제주의 밤이 얼마나 깜깜한지 알기에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내비에 목적지를 찍고, 음악을 틀었다. 숙소까지는 30분 정도 소요될 거라고 했다.

여기가 맞나.

석양이 사라지면서 도로는 어두워졌다. 올 때 탔던 해안도로는 온데간데없고 내비는 자꾸 산속으로만 데려갔다. 이러다 라산까지 가는 거 아니야... 가로등도 없고, 오가는 차량의 불빛도 없고, 내비의 지도상에는 오로지 산만 있었다. 창밖의 우렁찬 바람 소리가 차 안까지 그대로 들어왔다. 모닝을 뒤집을 것만 같은 바람이었다. 갑자기 멧돼지나 자유로 귀신이라도 출장 나오면 어쩌지 겁이 나 음악의 볼륨을 높였다.

자신감은 개뿔. 무서워 죽겠네.

바이킹은 내 안의 어린아이의 자신감을 키워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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