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 위에 올라탄 당신을 만난 건 20년도 더 지난 꿈에서였어요. 기억은 시간이 자취를 밟으면서 저화질로 남아 흐릿해지겠지만, 당신이 앉아있던 샛노란 초승달은 아직도 선명해요. 흔한 미소나 찡그림 없이 무표정으로 일관했던 그 얼굴. 화려한 꽃무늬 조끼를 입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은 모습. 솔직히 조금은 섬뜩했어요. 그 꿈을 꾸자마자 당장 거실로 뛰쳐나갔으니 말이에요. 생전 당신과 대화를 나누거나 감정을 교류했던 사람이 아닌, 내 앞에 나타난 연유는 무엇일까. 그걸 알려주러 다시 온 적이 없으니 아마 평생의 물음표가 되겠죠.
나는 당신의 궤도를 엄마와 아빠를 통해서 들었을 뿐이에요. 팩 하는 성미와 성실함, 예민한 신경을 갑옷처럼 입고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멈추지 않고 늦은 밤에도 잠들지 않아 당신을 고단하게 했을 아이를 품에 안았다는 사실. 식사시간이 되면 밥을 먹이고 낮잠과 밤잠 가리지 않고 보채는 나를 재우고, 보행기에 태워 놀아주던 따뜻함. 개미만 한 몸집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살 수 있을지 염려하던 마음까지. 그때 내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당신만이 알고 있겠죠. 만일 내가 웃었다면, 그 웃음이 당신의 상흔을 조금이라도 어루만져주는 손길이었을까요?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말을 통해 당신의 역사를 가늠해요. 삶이 당신을 얼마나 괴롭혔을지 감히 짐작할 수 없어요. 사납게 구는 사람과 종결되지 않는 노동은 당신이 무조건적으로 감내해야 할 노선처럼 여겨졌을 테죠. 격동의 일상을 보내는 와중에도 아들과 결혼할 여자의 편을 들어주었죠. 그것이 때로는 오해하기 좋을 언행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당신이 지닌 서슬 퍼렇고도 따뜻한 마음은 그 여자, 나의 엄마를 지켜주었어요. 당신의 힘은 강인한 보살핌이 되어 현재의 나에게까지 이행되었어요.
여전히 엄마와 아빠는 내가 무언가를 이루고자 할 때 당신에게 간절히 기도해요. 생을 마감하기 위해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도 이미 저승길에 당도한 당신이 나를 그 문턱에서 밀어내길 바랐어요.
질병으로 고초를 겪고 있어 잠들기도 어려웠던 그때, 나는 머리를 감싸고 꿈속 당신을 떠올렸어요. 약간은 냉담하던 그 무표정. 반쯤 미쳐버린 나는 그 표정을 내 마음대로 해석했죠. 마치 이 세상을 부디 살아달라는 요청으로 말이에요. 자의적인 해석으로 그 얼굴에 의미를 부여했어요. 그 덕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사랑의 중요성을 외치며 다른 이들이 삶을 버티길 바라고 있어요.
내가 제일 먼저 사랑을 말해야 하는 사람은 당신이에요. 당신에게 줄곧 건네고 싶었던 사랑, 당도하지 못할 언어일지라도 꼭 한 번은 말하고 싶었어요. 나는 먹던 숟가락으로 된장찌개를 떠서 밥에 비벼주고, 한 술 크게 떠서 입에 넣어주는 사랑이 좋아요. 고생했다며 멀리서 소박한 선물을 보내는 사랑이 좋아요. 곤히 잠든 얼굴에 입술을 맞대는 사랑이 좋아요. 닫힌 마음을 열고 용기를 불어넣는 사랑이 좋아요. 질병마저 끌어안아주는 사랑이 좋아요. 당신이 지상에 있었다면, 지금쯤 나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온갖 방식을 동원해 마음을 표현했을 거예요. 내 인생에서 당신이라는 사람을 겪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애석하게도 나는 지상에서 당신과 함께 했던 추억을 기억하고 있지 않아요. 단지 그 꿈, 신비로운 형체의 초승달 위에 앉아 어린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꿈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에요. 내가 당신을 기억하길 바라는 차원에서 일부러 나타난 것이라면 정말이지 탁월한 방법을 택한 것 같아요.
덕분에 나는 현재까지도 그 꿈을, 이승의 기억도 없는 당신과의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내뱉곤 하니까. 그래서 때로는 당신과 낭만적인 사랑을 주고받는 상상을 하니까. 낭만이 환상이라는 커튼에 불과하고, 그 커튼을 걷어내면 알고 싶지 않은 부분을 목격할지라도 사고가 얕은 나는 아직도 당신과 키워나갈 낭만적인 사랑을 기다려요.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이면 참 좋겠어요.
이야기를 기반으로 만들어낸 상상력과 강렬한 꿈의 합치로 구성된 나의 당신. 나는 당신이 먹이고 재우며 키운 당신의 아이예요. 지금까지 당신을 잊지 못하고 틈만 나면 당신 이야기를 꺼내고, 내가 모르는 당신의 서사가 궁금해 부모님에게 물어보는 건 내가 당신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일 거예요.
그런 나에게 몇 년 전 조카가 생겼어요. 배 아파 낳은 아이는 아니어도 나는 조카를 내 아이라고 생각해요. 올해 여섯 살이 되는 조카는 말도 술술 잘하고 감정표현을 거리낌 없이 하고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리며 포옹할 줄도 알아요. 나는 그 아이가 사고를 멈출 때까지 옆에서 지켜주고 돌봐주려고 해요. 누구에게도 쉽게 순종하지 말고, 침묵하지 않기를 바라며 자유롭게 연상하도록 내버려 둘 거예요. 당신이 나를 지켰던 것처럼, 나도 그 아이를 지키려고요.
당신의 역사는 내가 자각할 새도 없이 내면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어요. 여전히 초승달에 앉아 내려다보던 모습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요. 그토록 차가워보이던 달이 유독 당신이 앉아있을 때만큼은 적당한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며 혼자 생각하기도 해요. 대담하고 잔정이 많았던 당신을 기억하는 방식은 제멋대로 꿈을 해석하는 일이에요. 나는 이제 당신의 얼굴에서 섬뜩함을 지우고 온화함을 봐요.
현세에서 당신을 만날 기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사후 세계에서는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요? 어디든 상관없어요. 내가 당신에게 이 마음을 고백할 기회를 주길, 꼭 그러길 바랄 뿐이에요. 한때는 소녀였고 딸이었고 어머니였고 할머니였던 사랑하는 상화, 오늘도 당신이 타고 있던 초승달이 내 앞에 나타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