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는 영원

by 이낭만



이중적인 계절이에요. 쌀쌀하다 싶으면 두꺼운 옷을 꺼내 입다가도 다음날이면 따가운 햇살에 정신을 못 차리곤 해요. 작년 여름은 이미 지나갔는데 여전히 내 옷자락을 잡아요. 나도 더위를 놓지 못한 채 가만히 있는 중이에요.


사실 저는 무더위를 견디지 못해요. 누구나 그러하듯. 하지만 당신과 땀을 흘리며 걸어 다녔던 길은 더위에 질식해도 좋았어요. 싫어하는 걸 감내하다니, 사랑이란 정말 신기해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겼는데 당신이 건넨 커피 한 잔과 웃음이 더위쯤은 가뿐하게 넘기도록 해줬으니까요. 그래서 당신과의 여름을 잊지 못하게 되었어요. 우리는 평생 서로의 여름을 보았지만, 그 해의 여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여름은 영원하지 않아요. 우리가 함께 했던 여름은 서서히 멀어지고 있어요. 비록 당신과 나 사이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길어진다는 뜻은 아니겠지만, 왠지 서운하네요. 그만큼 여름에 만든 추억이 셀 수 없이 많고 화사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겠죠. 이런 얘기를 꺼낸다면 분명 당신은 앞으로 우리가 만드는 가을과 겨울이 기대된다고 할 거예요.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신을 더욱 애정하게 돼요.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꼭 붙어 다녔죠. 텔레토비 슬리퍼를 반대로 신은 채 흙바닥을 뛰어다녔고, <미스터 케이>를 읽고 뒷페이지에 있던 편지를 함께 오렸어요. 아빠가 심어준 단풍나무를 타고 멀리서 큰소리로 엄마를 부르기도 했죠. 초등학교 입학 때는 막내이모가 사준 빨간색 딸기 캐릭터 가방을 멨고 같은 교복을 입은 채 학창 시절을 마무리했어요.


성인이 되고 나서 각자의 학교는 달랐어도 떡볶이는 같이 먹었고, 보고 싶다는 연락을 끊임없이 주고받았어요. 서로를 괴롭히는 사람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나서서 분노해 주고, 주말에는 각자의 애착인형을 껴안으며 음악방송을 봤어요. 당신과의 추억을 나열하려면 10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써야 할 만큼 많아요. 나는 그만큼 당신을 오랜 시간, 열렬히, 사랑하고 있어요.


세상에 구원자는 없다는 말이 있죠. 일정 부분 동의하는 말이에요. 그러나 당신에게만큼은 구원자라는 말 외에 다른 단어는 떠오르지 않아요. 나를 살린 사람이니까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내 옆에 꼭 붙어서 숨결을 불어넣어 줬으니까요. 약을 먹어도 잠이 오지 않으면, 당신은 내가 잠이 들 때까지 머리카락을 만져줬어요. 그렇게 하면 내가 점점 수면의 바닷속으로 빠져드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비 오는 밤, 당신은 갑자기 사라진 나를 찾으러 빗 속을 헤맸고 멍하니 앉아있는 내 손을 잡아 이끌었죠. 어느 날에는 창문에 머리를 박으며 내가 죽음의 속삭임에 넘어갈 즈음, 당신은 나를 침대에 눕히고 푹신한 이불을 덮어줬죠. 우리가 즐겨 듣던 노래를 틀어주고 팔배게도 해줬어요. 죽어가던 나를 살린 사람을 어찌 구원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 누가 뭐라 해도, 그 당시 나만의 구원자는 당신이었어요.


빈칸은 두려움을 선사하죠. 나는 두려움과 친숙한 사람이라서 당신이 떠날까 봐, 나에게 실망할까 봐 걱정스러워요. 알다시피 나는 이별만큼은 두려워하지 않는데, 유독 당신과의 이별은 상상하고 싶지 않아요. 이런 나의 걱정을 듣는다면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이게 저의 내밀한 밑바닥 모습이에요. 이미 당신은 나의 저열한 밑바닥 감정을 알고 있음에도 꾸준히 사랑하고 있죠. 그런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언젠가 당신의 손을 잡고 세계의 끝을 무시한 채 내달리고 싶었던 적이 있어요. 내 앞에서 가슴을 치며 울고 속상해하던 날이었죠. 당신은 일로 스트레스를 받고 타인을 지나치게 염려하고, 그렇기에 남을 챙겨주다가 상처를 받아서 어린아이처럼 울었죠.


후회 없이 잘해주고 베풀고 사랑을 표현하는 건 특별한 재능이에요. 요즘 들어 당신은 타인에게 잘해줘 봤자 소용없다는 말을 자주 해요. 그만큼 많은 상처가 당신의 몸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무겁기 때문이겠죠. 그 무게를 감당하기가 너무나도 힘겨웠던 거죠. 그런 당신을 힘차게 안아주고 싶었어요.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건 순수한 마음이에요. 아무리 시니컬해지려고 해도 당신은 다시 사람들에게 마음을 전달하려고 노력할 거라 생각해요. 재능은 쉽게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나는 당신의 사랑스러운 재능에 힘찬 박수와 격려를 보내요.


사랑은 허상이자 현실이에요. 실체가 없어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지만, 각박한 세상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에 악착 같이 붙잡아야 하죠. 평생을 함께 했고 종종 서로에게 악을 쓰며 싸우기도 했지만 그건 잠깐. 우리의 관계가 끈끈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랑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라고 확신해요.


영원. 불가능하지만 가능해지길 바라는 염원이 담긴 단어. 제아무리 이뤄지기 어려워도 나는 당신과 영원히, 지금처럼 우리만 아는 장난에 실컷 웃고 가끔 싸우고 서운해하고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지었으면 해요.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지금 보내는 건 왠지 떨리네요. 내가 그만큼 당신을 많이 좋아하고 있기에 그렇다고 이해해 주세요. 잘 자요, 나의 쌍둥이 언니이자 사랑스러운 유현. 우리 내일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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