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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야 Jun 28. 2023

우아하지 못한 농촌생활

00. 프롤로그

 

 나의 이전 브런치북 <가장 우아한 복수>를 읽어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사실 이혼하는 중에 시골로 도망쳤다. 비록 은행 지분이 꽤 크더라도 집 있고 차있고 남편 있고 애도 있고 멀쩡한 직장도 있던, 부자는 아니어도 남부러울 것은 없었던 내 인생에 엄청난 폭풍을 마주하며 나는 세상 불쌍하고 찌질한 조무래기가 되었다.


 가출 아닌 가출을 한 남편의 부정행위를 마주하며 이혼을 결심했고, 그 집에서 당당하게 이혼을 진행할 힘도 용기도 없어 대충 짐을 싸들고 아이와 함께 피신한 곳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따로 써보려고 한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도망'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듯 비굴하고 구차한 현실도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이 피난길이 얼마나 나를 위로하고 일으켜 세웠는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며 보내는 시골 생활이 내 남은 인생의 어떤 이정표가 되는지에 대해 글로 남겨둘 필요성을 느낀다.

 우아하고 싶지만 우아하지 못한 도시여자의 시골생활에 대해서.




 사실 이 글은 친구의 한 마디로 시작되었다. 나의 이혼 커밍아웃에 이어, 이 기세를 몰아 도시여자의 시골생활에 대해 뭐라도 써보라는 그 말에 '그래볼까'하며 또다시 우다다다 키보드를 두들기게 된 것이다. 어차피 지금 남는 건 시간이다. 책 읽고 글 쓰고 아이와 슬렁슬렁 동네나 거닐며 상추나 키우는 중이므로 글 하나 더 쓴다 한들 부담될 일도 아니다.


 나는 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내 인생 다시없을 마음의 재활치료 중이다. 개떡 같은 인생을 한탄하며 터덜터덜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 상추밭의 무당벌레에 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도망을 간다. 그러고 나면 눈물이 무색할 만큼 한바탕 폭소를 하게 된다.


 우습게도 사람은 별거 아닌 일에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다. 마냥 슬퍼할라치면 바쁜 시골생활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울다가도 한바탕 웃을 일이 생기면 다시 울기도 애매해서 관둔다. 심각하게 책을 읽다가도 아이가 '뽀찌 뽀찌 (버찌를 말하는 것이다)'를 외치면 돌무더기 언덕을 기어올라가 바들바들 떨며 열매 하나라도 더 따려고 나뭇가지를 휘두르는데 집중한다. 오직 내 목표인 저 까만 열매를 향해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온 얼굴이 보라색이 되도록 버찌를 신나게 먹고 나면 좀 재밌다. 물론 옷에 진득이 밴 과일물을 빼는 것은 별개다.


 겨우 아이를 재우고 맥주 한 캔 들이키다 눈앞에 지나가는 모기를 발견한다. 문득 고개를 드니 깜빡하고 열어놓은 창문 틈새로 들어온 모기떼와 온갖 벌레가 천정을 까맣게 메운 것에 혼비백산하며 양손에 파리채를 들고 퍼덕이는 것이 매일의 생활이다. 비 오는 날 무단 침입한 개구리는 덤이다.

 우아하고 고상하게 이혼의 아픔을 이겨내려 했으나 현실의 나는 아줌마 선캡과 전자 모기채를 한 손에 든, 뜨거운 햇볕에 슬리퍼 모양대로 타버린 줄무늬 발을 가진 여자가 되었다. 슬픈데 웃긴다.


땡볕에서 수확한 뿌듯한 버찌


 서울 집, 옷장 몇 칸을 가득 채운 근사한 옷들과 굽이 닳을까 애지중지하던 예쁜 구두들 따위는 이곳에서 아무 소용이 없다. 처음 여기 올 때 캐리어 가득 담아 온 옷들은 몇 번 서울을 오가며 다시 갖다 두고 후들거리는 몇 벌의 파자마 팬츠와 청바지 두 벌, 티셔츠 몇 벌만 다시 가져왔다.

 가끔 공적인 일로 서울에 갈 때 입어야 할 한 벌의 옷과 구두, 액세서리와 화장품은 다시 캐리어 속에 들어갔다. 이것들을 꺼낼 일이 생기면 마치 갑옷을 챙겨 입듯 비장한 마음으로 캐리어를 연다.


 아, 풀 메이크업이라니! 구두라니! 치마라니!

 오래간만에 멋 낼 생각에 두근거림도 잠시, 구두 신고 밭을 지나 버스정류장 근처까지 가면 기력이 쇠한다. 핫플레이스고 나발이고 다시 돌아가서 상추나 따고 싶어 진다.


 지난 조정기일을 마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가로등이 뜸해지는 마을 어귀에 들어오자 숨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급히 주차를 하고 내리자 소똥 냄새마저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물론 내가 이혼하는 중인 데다가, 도시의 예전 보금자리에 머무는 것이 너무 힘든 나머지 이곳으로의 도피를 미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높은 건물 하나 없이, 저 멀리 산등성이들도 다 눈높이에 맞추어진, 무엇하나 나 잘났다 삐죽 모나지 않은 이곳의 풍경은 나를 달래기에 최적임을 부정할 수 없다.





 사실상 번쩍거리는 도시는 이런 시골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고요히 침잠하던 내 삶의 이면에서 예기치 못한 아름다움을 만난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가 전혀 다른 곳에서 진짜 삶을 발견하고 있다.  


 상실을 이겨내는 이 어두운 시기의 짤막한 나의 기록들이, 그 속에 존재하는 단편적 희망들이 결국 어떠한 미래를 만들지 나는 모른다.

 끝을 알지 못해도, 지금 이것만은 확실하다. 도망친 그 끝에서 얻은 생명력이 결국 내게 다시 살아갈 용기를 주었다는 것. 그러니 이 글이 어떤 어두움을 겪는 누군가에게 아주 작은 반딧불이가 되길 바라며, 지극히 까다로운 도시여자의 찌질하고 슬프지만 희망찬 시골살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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