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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야 Jun 28. 2023

최첨단 아날로그 인생

episode 01.


 이곳에 처음 오던 날, 도망자 답지 않게 짐이 산더미였다. 룸미러로 힐끗 본 뒷좌석에는 한가득 실은 짐에 끼인 아이의 이마만 조금 보일 뿐이었다. 혹시나 달라진 환경에 불안해할까 봐 아이 이불까지 꾸역꾸역 챙겨 온 탓에 짐을 싣는데도, 빼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로켓프레시며 당일배송에 익숙한 도시 엄마는 무서웠다. 새벽녘 문을 열면 당연히 도착해있어야 할 우유라던가 요구르트는 이제 없을 테니, 터치 몇 번으로 냉장고를 채우던 편리함마저 도시에 남겨두고 테트리스하듯 트렁크를 꽉 채워왔다. 온갖 아이 간식과 생필품을 챙긴 탓에 차가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 슬픈 와중에도 준비물은 기가 막히게 챙겼다.





 동네에 작은 슈퍼가 있지만 진짜 장사를 하는 것인진 확실치가 않았다. 근현대사 박물관 같은 데서 볼 법한, 미닫이 유리문에 '수 퍼'라고 쓰여있는 진짜 구멍가게다. 나는 이 정겨움과 찐 빈티지함에 매료되어 꼭 한 번 구경을 가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뿌연 유리문은 늘 닫혀있었다. 아무리 주변을 얼쩡대도 인기척이 없더니, 날씨가 좋아지자 주인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늘 한 바구니와 함께.


 아이 손을 꼭 잡고 마침내 열린 호기심 천국에 들어갔다. 발을 내딛자마자 툇마루에서 마늘을 까던 주인아주머니가 '애기가 먹을 과자는 없어요'라며 멋쩍게 웃으셨다. 애기 과자뿐 아니라 내 과자도 없었지만 막걸리와 맥주는 냉장고 한 가득이었다. '역시 농촌에는 막걸리죠'라는 헛소리를 겨우 참으며, 꼭 한번 와보고 싶었는데 가게가 늘 닫혀있어서 하시는 줄 몰랐다고 말을 건넸다. 아주머니는 '팔게 없어'라며 깔깔 웃으셨고 나는 그 쿨한 대답에 같이 웃었다.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생필품을 사려면 차로 5분, 걸어서 40분 거리의 읍내로 나가야 한다. 코스트코 한 바퀴 돌 정도의 시간에 읍내 한 바퀴를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단층의 건물과 가정집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정겨운 동네에 있을 건 또 다 있다. 하나로마트라던가, 다이소, 저가형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나 치킨집까지. 편의점도 각 브랜드 별로 네 개나 있다. 지금의 내 글을 있게 한 도서관도 그곳에 있다.

  

 도서관 대출카드를 만든 날, 언덕 아래 커피집에서 신메뉴라고 대문짝만 하게 써붙인 달디 단 커피를 샀다. 나는 커피 취향이 확고해서 늘 같은 커피를 마시는데, 이 날은 왠지 평소라면 절대 마시지 않을 그 신박한 메뉴가 먹고 싶었다. 복잡한 상황에 처하면 희한하게 자꾸 안 하던 짓을 하고 싶어진다. 차갑고 달달한 커피를 쭉 들이켜니 머리가 띵해지면서 아주 먼 곳에 여행을 온 기분이 들었다.


사실 도서관이나 글쓰기도 그 안 하던 짓 중 하나였다. 어릴 때는 책을 참 좋아했지만 스마트폰과 함께 내 책꽂이는 증식을 멈췄고, 사실 글쓰기는 초등학교 때 일기 이외에 제대로 써 본 것이라곤 대학원 논문이 다였으니. 

 빠르고 자극적인 세상에 살던 나는 시간이 멈춘 동네에 와서 종이책을 뒤적이는 아날로그 인간이 되었다.


코코넛 커피에 엑스트라 시럽 플리즈


  

 생각해 보면 나는 영상을 별로 안 좋아한다. 유튜브도, 티비도 잘 안 본다. 그나마 넷플릭스 인기 시리즈 몇 편 보는 것이 고작이고, 책이 원작인 영화는 일부러 안 본다. 책을 읽다가 중요한 문장이나 감상평은 노트에 손으로 메모한다. 맥북을 쓰면서도 그 옆에 항상 노트를 둔다. 


 결국 디지털을 벗어나진 못하더라도 나는 분명 아날로그의 미학을 사랑한다. 느리고 섬세하고 정다운.

 아직도 구매한 지 10년은 된, 세월만큼 망치 같은 무게감을 지닌 오래된 디지털카메라를 쓴다. 물론 이 카메라의 감수성 폭발하는 빈티지한 화질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요즘 이런 디카를 쓰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메모리 카드에 저장된 사진을 랩탑이나 휴대폰에 옮기는 귀찮음을 감수하면서도 굳이 이 카메라를 고수한다. 묵직한 무게감도 마음에 들고, 메뉴얼 모드로 노출을 조정하며 빛을 가늠하는 그 과정이 만족스럽다. 

 폴라로이드 사진을 좋아한다. 빈티지 옷들도 좋아한다. 건조기나 식기세척기는 최고의 발명품이라 떠들면서도 가끔은 설겆이하며 멍때리는 시간을 사랑하는 최첨단 아날로그 삶인 것이다.






 도시에서 세 가족의 삶이 저물어 갈 때 즈음, 나만 빼고 다들 휙휙 인생을 살아내는 것 같은 그 느낌이 견디기 힘들었다. 초췌해진 내게 밥을 사 먹이겠다는 친구를 만나러 가던 길, 공황장애가 이렇게 오는 건가 싶을 정도로 차도 위 빼곡히 지나가는 차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감각의 일부를 상실한 느낌이었다. 나사하나 빠진 것 같은 그 더러운 기분에 더욱더 참을 수 없이 서글프고 슬펐던 것 같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다 같이 느리다. 어제 산책길에 경운기를 타고 털털거리며 지나가 아저씨를 오늘 또 만났다. 어제처럼 여전히 느리게, 그러나 평화롭게 논길로 사라진다. 골목 초입의 단층집은 마당에 가득한 농작물이 훤히 다 보이는데, 그 집 아저씨는 어제처럼 라디오를 허리춤에 메고 또 같은 고랑을 따라 물을 준다. 느리지만 꾸준하고 부지런하다. 이는 도시의 삶보다 훨씬 더 인내가 필요하며 섬세한 것이다.


성실한 옥수수


 느리고 반복적인 삶이 지루할 틈이 없는 것은 성실한 자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는 내 아이만 하던 정류장 앞의 옥수수가 어느새 버스 정류장 간판만큼 자랐다. 장미는 어느새 지고 나리꽃이 여기저기 만개했다. 느린 삶이 자연을 감상할 여유를 준다. 그리고 나를 관찰할 시간도 준다. 매일매일 천천히, 자세히 보아야 아름다운 것들을 만나며 나도 조금씩 다시 꽃 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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