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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야 Jun 29. 2023

상추밭 손님과 어머니

episode 02.

 재택근무 중인 친구에게 뭐 하냐고 물으니 강아지 산책 중이라고 했다. "좋은 인생이다"라고 하자 친구는 "너도 좋은 인생이다"라며 웃었다. 한가롭게 햇볕에 빨래나 널고 대낮부터 맥주 한잔 들이키며 책 읽는 시골 라이프, 얼마나 멋진가.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혼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만 빼면 좋은 인생이 맞긴 맞지. 문득 올라오는 인생사 한탄을 시작하기도 전에 친구는 내 글에 대한 감상평으로 나를 대신해 내 결혼생활에 대한 육두문자를 시원하게 날려주었다. 이런 친구가 있는 것을 보면 좋은 인생이 맞다.





 이어서 나의 바쁜 시골라이프에 대한 소소한 담소를 나눴다. 한밤 중의 고라니 울음소리가 얼마나 기괴한지, 오늘 하루 내가 몇 마리의 파리를 때려잡았는지, 아이와 보내는 하루가 얼마나 짧은지, 상추가 얼마나 빨리 자랐는지, 그리고 상추밭에 물을 아무 때나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친구에게 알려주었다.


 내가 계속 상추, 상추 거리는 이유는 내가 키우는 유일한 작물이 상추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생명력 강하다는 선인장이나 스투키도 여럿 죽인 식물살인마인데, 처음으로 내 손에서 살아남은 것이 저 고마운 상추밭이다. 내가 심은 것은 아니지만 햇볕에 비실비실 죽어가던 것을 가족들과 함께 소생시켜 수확의 기쁨을 얻었으니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

 오고 가는 길에 상추들의 안부를 살핀다. 장마가 오면 상추는 끝이라는 열무 아저씨의 이야기에 솔직히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아직 상추들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말라비틀어진 상추의 가장자리를 떼내며 엄마는 식물도 사람도 가지치기가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아직도 가지를 하나둘씩 쳐내는 중인데 내 상추는 저 혼자 누런 잎 벗어던지고 실컷 푸르게 쑤욱 자라나더니 얼마후면 떠날 것이라 한다. 얼마 전 글에 인생은 이별과 상실의 연속이라 썼는데, 하다못해 식물까지 내게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상추밭 변천사


 벌써부터 아쉬워 매일 상추들을 보러 간다. 어차피 내일 또 비가 온다 해도, 우리가 주는 물은 조금 다를 것이라며 열심히 물을 떠다 날랐고 내친김에 '상추밭에 물 주기' 기념사진도 찍었다. 상추밭에 늘 찾아오는, 나를 혼비백산하게 만들던 무당벌레들과 메뚜기인지 귀뚜라미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작은 손님들조차 조금 아쉽다. 자연 속 생활에 익숙해진 아이는 제법 식물들을 보살필 줄 알게 되었다. 가끔 상추 머리채를 잡아 뜯긴 하지만, 요즘은 꽃을 보면 되도록 꺾지 않고 쓰담쓰담 '예쁘다'를 해준다.

 상추는 가도 우리에게 애정이 남을 것에 위안을 얻는다.

 고맙다 상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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