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야 Jul 19. 2023

마지막 산책, 작별 인사

episode 12.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 내일이면 나는 다시 내 집으로 돌아간다.

 그새 짐이 늘어나 두 번에 걸쳐 짐을 날랐다. 단출하게 남은 캐리어 하나에 남은 물품을 넣고 지퍼를 닫으니 하나의 챕터가 마무리되는 기분이었다.

 도서관에 마지막으로 책을 반납하고 천천히 시내를 걸었다. 늘 가던 카페에서 커피를 사고, 길거리에 서서 꽈배기를 먹으며 가끔 지나가는 버스를 구경했다. 눅눅한 장마철 공기, 낮게 내려앉은 하늘에도 왠지 푸근한 기분이 드는 것을 보면 이곳이 마음의 고향이 된 것 같다.


그리울 마을 도서관




 꿈꾸듯 지나간 지난 몇 달간 나는 이곳에서 삶을 배웠다. 내 인생의 가장 힘들었던 시간, 그 회색의 봄을 생명력 가득한 여름으로 바꾸어준 , 우연처럼 찾은 시골 동네에서 삶을 마주하며 나는 이제 웃는다.


 소중한 이웃 사람들, 그리고 말없이 나를 치유해 준 자연. 이웃집을 하나씩 스쳐 지나가며 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도는 마지막 산책에서 나는 조금 울었다. 걸음마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느리게 펼쳐진다.

 어둠 속에 넘실거리는 논 건너편에 작은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눈물에 번져 보이는 골목 끝 노란 가로등 불빛에 내가 지냈던 하얀 이층 집이 보였다. 그 옆에 옹기종기 이어지는 나의 이웃집들, 그 길에 자수처럼 놓인 지난 몇 달간의 추억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노란 햇빛이 가득했던 어느 봄날, 한 엄마와 아이가 골목을 걸어 내려온다. 아이는 채 자라지 않은 길가의 꽃들을 보며 기뻐했고 엄마는 애써 웃었다. 초록잎이 막 돋아나는 황토색 논 위에 하늘이 담겨있다. 엄마가 '나비야' 노래를 부르자 아이는 나풀대는 꽃처럼 춤을 추며 길을 따라 내려간다. 


 슬부슬 비가 내리는 조용한 논두렁을 걷던 여자가 소리 내어 운다. 길의 꽃들은 이 봄에 여자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눈물로 번진 길 옆의 하얀 꽃들의 안개. 산책길 끝에서 제비꽃이 피어있는 카페로 향한다. 눈을 비비며 들어간 카페에서 글을 쓴다.

 

 여자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한 아름 싣고 이층 집을 향해 간다. 마당 구석에서는 아이가 자동차 장난감을 타고 논다. 그들은 가지만 있던 나무에 싹이 돋은 것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는다. 한낮에 타오르듯 만개한 양귀비 사이를 지나 상추밭으로 간다. 아이가 작은 물병으로 상추에 물을 준다.


 해가 내리쬐는 점심 무렵, 버찌나무 아래에서 아이와 엄마가 나뭇가지를 휘두른다. 까만 버찌가 후드득 내리면 풀숲을 헤치고 얼굴 가득 보라색 과일물을 들이고 웃는다. 방의 작은 창문으로 보이는 버찌나무에게 아이가 인사를 한다. 송골송골한 땀방울처럼 매달린 열매들, 잘 구워진 호두과자처럼 햇볕에 탄 아이의 조막만 한 손.


 언덕의 성당 뒤로 노을이 깔리자 마을 귀퉁이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처음 맡아보는 알싸한 냄새에 아이가 코를 막고 골목 끝까지 뛰어간다. 모퉁이 길에 꽃을 심던 김 씨 아저씨가 웃는다.


 항아리집 앞에 노란 고양이가 길을 건너고, 골목 끝 우사로 가는 서울우유 트럭이 덜컹거리며 지나간다. 희미해지는 차량 소음 사이로 들리는 개구리 소리, 산에 부딪혀 반사되는 새들의 노랫소리.

 꼬꼬집 뒷마당에 밀짚모자가 왔다 갔다 한다. 어린 거위와 새끼 고양이들 사이로 아이가 뛰어든다. 형광 연둣빛 포도알 사이로 흩어지는 아이의 웃음. 소나무에 매인 풍경을 울리는 한 여름의 바람. 밤이면 작은 파라솔 아래에 모여 나누던 수박과 맥주, 현명한 어른들의 말소리가 주던 위안들.


 저녁 산책길에 아이의 할머니가, 때로는 할아버지도, 이모할머니도, 그리고 어느 날은 온 가족이, 또 어느 날엔 동네 이웃이 함께 걷는다. 논길의 좁은 둑을 따라 우사를 향해 걸어가는 길에 아이는 엄마 등에 업힌다. 남색 하늘 중앙에 서있는 산을 향해, 노란 불을 따라 집으로 간다.





 매일 걷던 이 길, 파랗고 보라색이던 꽃이 있던 자리에 나리꽃이 활짝 피었다. 군데군데 갈색으로 저물어가는 여름 꽃 들, 장맛비에 길가로 쓰러진 작은 흰 꽃들이 구슬처럼 발아래로 흩어졌다.

 우리는 아마 이곳을 매일 그리워할 것이다. 자주 놀러 오기로 이웃들과 약속했다. 사람이 마음을 나누는데 시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내 아이에게 큰 사랑을 베풀어주고, 내게 인생을 가르쳐 준 분들과 헤어지는 것은 참으로 쉽지가 않다. 이제 더 이상 일상을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아쉽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 인연을 이어나갈 것이다.


 방을 정리하다가 아이를 업어주었다.

 창 밖의 버찌나무, 제 할 일을 다 하고 작은 벌레들에게 나뭇잎을 내어주며 그늘이 되는 그 나무. 아이가 버찌를 부르고, 나무는 대답이 없다. 내년 이맘때 와서 또 버찌 따먹자. 그땐 너의 손도 가지에 닿겠지.


가장 슬프고 가장 빛났던 23년 여름


이전 12화 너의 단어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