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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야 Jul 16. 2023

너의 단어들

episode 11.

 아이가 입이 트이기 시작하니 재밌다. 어느 순간 내뱉던 단어들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몇 개의 단어를 연속적으로 붙여 나름의 문장을 만들고, 본인의 의사를 나름 정확하게 전달한다. 눈 뜨는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쉼 없이 이어지는 종알거림을 듣고 있으면 아이의 세상이 보인다.


 아이에게 해 주었던 말들이 고스란히 내게 돌아온다. 아침에 일어나서 꼭 내게 뽀뽀를 해주고 얼굴을 쓰다듬으며 서툰 발음으로 '이쁘다'를 해 줄 때에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행복감이 밀려온다. 이 예쁜 입에서 몽글몽글한 좋은 단어가 나올 때마다 엄마로서의 책임감도 더해진다.





 자연 속에서는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많다. 아이가 궁금해하는 것도, 내가 알려주고 싶은 것도 많을뿐더러 하루하루 변하는 풍경에 매일 새로운 단어가 나온다. 아이가 다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되도록 다양한 표현을 쓰려고 노력한다. 허수아비처럼 머리털이 돋아난 옥수수, 비눗방울 같은 포도, 해님처럼 동그랗고 노란 꽃, 팝콘같이 뛰는 개구리...


 비가 잠시 그친 오후 짧은 산책을 나선다. 마을 입구까지 가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내게 알려준다. 집 앞의 꽃, 몇 걸음 더 가서는 버찌나무, 그다음엔 호박과 옥수수, 그리고 고구마. 진흙밭에 뛰어드는 아이에게 '벌'이 나와서 콕 쏜다고 하면 부리나케 뒤돌아 뛰어나온다. 코너를 도는 길의 꼬꼬집, 야옹이들, 또 다른 호박 넝쿨, 고추, 그리고 그 앞에 펼쳐진 논밭 앞에 잠시 머문다. 일렁이는 논을 보며 '저기 봐바, 초록색 호수야'라고 말해주면 서툰 발음으로 초록 호수를 말한다.


 코너길 안전거울에 비치는 마을의 초입까지, 혼자 걸어가면 금세 스쳐 지나갈 그 골목을 아이와 천천히 걸으면서 이곳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된 것 같다.

 도랑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나, 멀리서 나무들에 가려져 군데군데 끊어지는 새소리를 흉내 낸다. 골목길 여기저기에 아이의 단어와 웃음소리가 배어있다. 너의 단어들, 나는 결코 흉내 내지 못할 모호하면서도 가장 자연의 소리에 가까운 그 말소리들. 비를 맞아 파란빛을 띠는 골목을 지나며 나는 벌써부터 이곳이 그리워졌다.  

 

 아이는 자연 속에서 색채를 배웠다. 초록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얼마나 다양한 채도와 명도가 존재하는지 눈으로 직접 보고 받아들인다. 햇빛 속 노랗게 보이던 마당이 비 오는 날엔 푸른 회색이 되는 것도, 아침에 새빨갛게 피어나던 꽃들이 저녁이 되면 몽환적인 보라색이 되는 것도, 마른 풀줄기가 노란빛이 되고 결국 흙색이 되는 것 내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 보고 배우는 중일 것이다.



 사물을 지칭하며 붙이는 형용사가 이 집 마당을 닮아있을 때, 나는 때론 감동한다. 땅을 밟으며 배우는 변화무쌍하고 풍부 자연의 가르침이 아이 정서의 바탕이 되는 것 같아서.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으며 함께 흙탕물을 첨벙거리며 나누던 우리의 말들이 이 계절을 닮길 바란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 아이는 말을 배우며 꽃이나 나무, 새, 동물소리로 내게 힘을 주었다. 예쁜 풍경을 닮은 그 단어들은 스산한 잿빛의 풍경 속에 갓 돋아나는 노란 형광빛 새잎처럼 눈부시고 경이로웠다.

 

 언어는 힘이다. 나는 아이가 이것을 꼭 알았으면 좋겠다. 세련된 언어가 아니어도 자연을 닮아 담백하고 유동적이며 포용하는 힘이 있는 언어. 우리가 매일 걷던 짧은 산책길의 하루하루가 무르익던 것처럼 너의 언어도 그렇게 빛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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