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에 대한 고찰 - 진화심리학으로 바라보기

복숭아 하나, 외로움을 건너는 다리

by 공상과학철학자
본 브런치북은 과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에 대해 탐구해 보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철학을 함께 생각해 보는 시리즈입니다.


꿀벌은 어떻게 이리 기하학적이고 실용적인 6각형의 벌집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가운데 칸들에는 여왕벌이 알들을 낳아 집어넣고, 가장자리 칸에는 일벌들이 꿀과 로열젤리, 꽃가루를 저장해 활용하는데, 아마도 3각형, 4각형으로 집을 지었던 녀석들은 도태되고, 6각형으로 집을 지은 벌들만 살아남아 유전자가 이어져 왔을 것이다.


꿀벌의 세계는 고도의 협력 사회이다.

교미 성공 후 바로 내장이 터져 죽는 수벌, 한 번의 교미 비행을 마친 후 벌집 속에 갇혀 알만 낳는 여왕벌, 그리고 꽃에서 식량을 조달해 벌집에 비축하는 일벌의 협동은 추운 겨울에도 이들을 버티게 하고, 대를 이어 후손을 이어나갈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무리에서 혼자 떨어져 나간 꿀벌은 죽어버리고 만다.

쫓겨난 뚱뚱한 여왕벌은 날지 못해 굶어 죽거나 말벌과 새에게 잡아먹히며, 길을 잃은 일벌은 집이 없어 겨울에 얼어 죽고, 교미를 못하고 살아 돌아온 수벌은 벌집의 꿀만 축낸다고 일벌들에 의해 쫓겨나는데, 짧은 구조의 입으로는 꽃의 꿀을 빨아먹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이렇게 무리 생활을 하며, 혼자서 생존하기 어려운 동물은 꿀벌뿐만은 아니다. 이러한 동물에는 개미, 까마귀, 사자, 코끼리, 침팬지...

그리고 인간이 있다.


다차원적 사고를 할 줄 알고, 오래 달리기를 잘한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신체적 능력이 없었던 인간에게는 단체 생활을 통한 협력은 생존에 필수 조건이었다.

혼자 떨어진 인간은 맹수를 대적할 수 없었고, 사냥감을 혼자 사냥할 수도 없었고, 과일나무를 먼저 차지한 침팬지 무리나 다른 인간들에게 밀려 과일을 딸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아무리 혼자 똑똑하다고 한들 무리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발목을 접질려 절뚝이며 걷게 되었는데 보호해 줄 동료가 없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사람에게 무관심하고 무리 생활을 배척하는 유전자는 후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수백만, 수십만, 수만 년을 계속해서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 무리생활 유전자이다. 무리에서 떨어지면 죽는다고 인식하는 유전자는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물론 문명의 발전에 따라 조금은 모습을 변화시키면서 무리생활을 이어갔다. 농경사회에서는 마을에 공동 주거 구역이 조성되었고, 대가족 위주 씨족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살며 함께 농사와 육아를 수행했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공장에 모여서 함께 일하기는 했지만, 도시에 일자리가 생기면서 대가족은 해체되고 점차 핵가족화되어 갔다. 인간의 무리생활 본능이 산업혁명 경제 시스템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마을 단위로 모여 살며 함께 일하고 서로 아이를 돌봐주기보다는, 일자리를 찾아서 새로 지어진 격벽의 도시 주택에 정착했고, 옆집에는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현상이 생겨났다.


시간이 더 흘러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2024년 기준 대한민국에서 혼자 사는 1인 인구의 비율은 35%, 2인 인구의 비율은 30%를 넘는다. 옆집에서는 누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일터에서는 서로 협력하기보다는 경쟁하고 평가당하는 케이스만 점점 많아지고 있다.

무리에서 떨어지면 죽는다는 유전자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그리워하는데, 우리의 주거와 일터 환경은 완전히 반대로 와버렸다. 현대 산업사회의 제도와 환경이 사람의 사회적 유전자와 정면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가 된 채, 무의식 속에서는 생존의 위협이 켜지고, 머릿속에서 분비되는 코르티솔과 아드레날린. 이것이 바로 현대인이 직면한 외로움과 고독감의 근원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연결을 시도한다. SNS를 통해 익명의 사람과라도 소통하려고 하고, 술집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람이 많은 야구장이나 축구장에서 환호하고, 취미가 같은 사람들과 함께하려 한다.

사회가 강요한 당신의 외로움을, 당신의 유전자는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이런 활동은 물론 긍정적이지만 분명한 한계도 있다.


왜냐하면, 생존하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사람이었지만, 생존하는데 가장 위협이 되는 것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수천만 명의 아메리카 토착인들을 살해한 것도 사람,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 캄보디아인들, 르완다인을 죽인 것도, 제주도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을 죽인 것도 사람이었다.

1980년의 광주

그리고 이것은 문명 사회 속에서만 일어난 특별한 현상도 아니었다.


선사시대 수렵 채집을 하던 시기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한 무리가 더 좋은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다른 무리들과 끊임없이 싸우고 죽였다.

침팬지 무리를 비교적 수월하게 몰아냈고,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 무리들과 싸울 때는 치밀한 준비와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가장 무서운 건 사람 무리와의 충돌이었다. 과일을 따러 조금 멀리 나갔다가 길을 잘못 들어 사람 무리를 만나면 둘 중의 하나였다.

잡혀 죽거나, 아니면 안도하거나...

이를 가르는 유일한 기준은 내가 속한 무리냐, 아니면 다른 무리냐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사람은 함께 무리를 이루는 집단의 수가 커지고 뇌가 발달할수록, 사람에 대한 판단이 중요해졌다.

내 무리 사람이냐 아니냐의 가장 중요한 판단에서부터, 내 무리 속 사람이라면 한 명 한 명의 특징을 기억하고, 표정을 읽고, 행동을 관찰하고, 배려하며 사회적 협력을 잘 한 사람이 더 많이 생존했고, 번식에 성공했고, 그 유전자가 이어졌다. 두뇌 활동의 상당한 부분을 '사람'에 대해 사용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나 사람을 경계하면서도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 한다.

초면인 사람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는 일단 경계모드가 발동한 후, 그 사람이 해롭지는 않은지를 본능적으로 파악하려 한다. 그리고 차츰 마음을 열어간다.

친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은 기쁘지만, 사람이 꽉 찬 지하철과 붐비는 거리의 사람들을 비집고 가는 데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마찬가지로 현대인의 외로움을 치유하는 것 역시 단순한 인간관계의 수나 SNS의 팔로워 숫자가 아니다.


근본적인 것은 사자가 쳐들어온다고 해도, 힘든 일이 생겨도, 믿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하며 내가 보호받고 있고, 그 사람을 위해 나도 역할을 한다는 느낌이다.

사냥에 성공하면, 좋은 일이 생기면, 믿을 수 있는 내 무리의 사람과 나누며 이야기 꽃을 피울 수 있는 환경 그 자체다.

그리고 설령 사회 구조 때문에 이 환경이 쉽지 않더라도, 기억하자.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나 언젠가는 무리에서 떨어져 독립적으로 지내고, 무리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안심해도 괜찮다.


인류는 호모사피엔스 초기 10명, 20명 무리를 이루던 것에서 7만 년 전에는 이미 150명 수준까지 자연적으로 무리를 늘렸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신화, 믿음, 상징을 중심으로 뭉치면서 그 무리의 크기는 수천, 수만 명 단위로 늘어났고, 근현대에 와서는 국가를 형성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나의 무리'를 크게 본다면 국가가 될 수도 있다. 물론 국가가 사람들을 돌보는 제 역할을 하고 있고, 당신이 그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면 말이다.

국가라는 단위가 너무 커서 내 무리라는 동질감이 잘 안 느껴진다면, 당신이 속한 지역 종교나, 정치 사회 단체나, 취미 동아리의 사람들이 당신의 무리가 될 수도 있다.

그 속에서도 뭔가 허전하고 외롭다고? 그렇다면, 당신의 무리는 당신의 가족일 수도 있고, 연인일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무리의 크기가 아니다.


맛있는 복숭아를 맛본 다음에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당신의 외로움은 이미 치유되고 있는 중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복숭아를 건네는 용기를 내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 사람도 외로움 속에서 기다리기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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