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세계』_ 09. '낭만주의', '헤겔', '키에르케고르'
0. 노발리스의 끝사랑
소피는 뜨악합니다. 18세기 말 독일의 한 천재 시인이 스물셋의 나이에 고작 14세 소녀와 약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말이죠.(물론 이른 약혼은 당시의 일반적인 풍습) 하지만 뒤이은 이야기를 듣고는 경악합니다. 안타깝게도 열다섯 번째 생일을 맞이하고 꼭 나흘만에 죽은 그 약혼녀의 이름이 '소피(Sophie von Kühn)'였거든요. 알베르토의 이야기를 듣던 소피도 마침 생일이 지난 뒤 꼭 나흘이 되는 날이었어요.
약혼녀를 잃은 그 천재 시인의 이름은 노발리스(본명 : 게오르크 필립 프리드리히 폰 하르덴베르크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새브리깡..., 낭만주의 특유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담아 개척자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novalis를 자신의 필명으로 삼았대요. ). 그는 평생 소피를 가슴에 품고 살다가(사실 약혼 한 번 더 했지만) 독신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28세의 젊은 나이였죠.
좌절된 첫사랑과 평생의 순애보, 그리고 천재의 요절이라니.
낭만 합격입니다.
1. 칸트가 남긴 유산
알베르토는 "낭만주의는 독일에서 시작되었다."는 언급으로만 간단히 넘어갔지만, 우리는 왜 하필 독일이 낭만주의의 발상지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만 더 짚어보기로 해요. 늘 해오던 일이기도 하고, 어쩌면 이런 작업이야말로 오늘 만날 헤겔 식의 사고방식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영국과 프랑스가 점차 뚜렷한 국가 정체성을 형성해 가던 18세기, 독일(당시로서는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제후국과 자유도시들'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편의상 독일이라고 하겠습니다.)은 여전히 근대적 의미의 국가(국민 국가_nation state)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어요. 국가로 통일되긴커녕 30년 종교전쟁의 끝이었던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제국 내 각 지역의 자치권이 강화되면서 오히려 전쟁 전보다도 더 분열된 상태가 되어 버렸죠.
말하자면 당시 독일은 여러 왕국과 공국, 자유도시(city)들의 느슨한 연방 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었던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는 보편 타당한 이성적 규범을 바탕으로 사회를 개혁하려는 계몽주의적 이상을 실천할 수가 없었어요. 중앙정부가 부재했으니 제국 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의식(이를테면 같은 정치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이나 규범도 없었고, 이성적 논의를 할 공공영역(법으로 합의된 제도)도 없었으니까요.
칸트의 계몽주의도 그래서 가장 깊은 내면을 향했던 것(이성 비판)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붕괴 직전의 분열된 제국(칸트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프로이센 왕국에 살았어요.)에서 그가 찾을 수 있었던 계몽주의의 활로는 개인의 내면밖에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칸트가 비판철학으로 개척한 '내면의 계몽'에는 역설적으로 계몽주의에 저항하는 사상적 실마리가 숨어 있었답니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보편적 이성의 규범을 세우는 작업이었지만 동시에 "개별적 자아의 자유"를 피력하는 과정이기도 했거든요. 외부 경험은 내면에 있는 의식의 필터를 거쳐 인식으로 완성된다는 생각에는 '내면적 자아가 인식의 근본'이라는 시각이, 의식에 내재된 이성 또는 보편 법칙에 따라 온갖 현혹을 극복해내는 것이 곧 자유의 실현이라는 자유의지론에는 '의지의 개별성'을 강조하는 태도가 내재되어 있었어요.
즉, 칸트 철학에는 "진정한 보편성은 자율적 개인의 자유에서 비롯된다"는 숨은 결론이 있었던 거예요. 이는 계몽주의적 이상과 괴리된 현실에 낙망하던 독일 청년들의 숨통을 틔워줍니다. '그래, 보편적 규범과 합리의 질서로 우리의 자리를 찾을 수 없다면, 우리는 규범적 이성에 갇히지 않는 내면의 자유를 통해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더 큰 통합과 연대의 길을 열어나가자.'
자연적 자아를 향한 감성적 탐구와 내면의 자유를 통해 부당하게 분리된 것들을 통합하고자 했던 낭만주의적 이상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계몽주의라는 사상적 유행을 그대로 따라 가지 않고 가장 독일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소화해냈던 칸트의 저력이 결국 새로운 사상의 씨앗이 되었던 것입니다.
2. 민족의 발견
그 씨앗은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칸트 교수님에게 신학을 배우던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를 통해 조금씩 싹을 틔웁니다. 헤르더는 훗날 민족주의 역사관의 뿌리가 되는 중요한 저서들을 발표하는데요, 그 저서들엔 '이성'이라는 단일한 척도를 기준으로 모든 시대와 민족을 재단하는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이 형형했죠. 그는 각 민족과 시대가 저마다의 고유한 가치와 독자성을 지닌다고 생각했거든요.
그의 이런 생각은 당시의 새로운 학문적 유행이었던 '비교학'적 시각에서 비롯됐습니다. 기억하시나요? 헬레니즘을 다뤘던 챕터에서 언급했었던 "역사비교언어학". 18세기 인도로 파견을 나갔던 영국 동인도회사의 윌리엄 존스가 시작한 학문이라고 소개 드린 적이 있었죠? 맞습니다. 아주 나중에 이런 학문도 등장한다고 소개했던 그 시대에 벌써 우리가 도달한 거예요. 지금 한창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고 있잖아요?
18세기 유럽에 비교학적 시각이 유행했던 것은 식민지 개척을 통한 무역 확장 덕분이었어요. 식민지에서 만난 다양한 이방인들과 잘 협상(a.k.a. 식민 지배)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문화를 연구해야 했거든요. 무역에 투자하는 자본가들이나 정보에 민감한 지식인들에게도 이방의 자료는 중요한 정보였겠죠? 대학 졸업 후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다양한 문화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던 헤르더도 한창 유통되던 그 자료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뜻밖의 자아 성찰과 맞닥뜨리게 되죠. 유럽과 판이한 문화를 지닌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계몽주의가 주장하는 '보편적 인간 이성'을 돌아보게 만든 것이에요. 모든 상황에 다 똑같이 들어맞는 보편적 이성이라는 게 가능한가? 싶었던 것이죠. 게다가 이방의 '다른 민족'에 대한 인식이 깨어나자 "그럼 우리 민족은 어떤 민족인가?"하는 질문도 함께 고개를 들었어요.
답을 얻고 싶었던 헤르더는 마침내 스스로 "민중의 노래(Volkslieder) 수집 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릅니다. 다양한 민족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보고서, 여행기, 선교사 기록 등을 통해 각 민족의 정체성이 그들이 사용하는 고유한 언어나 문화를 통해 드러난다는 통찰을 얻었거든요. 원리가 그러하다면, 자신도 민요, 신화, 전설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언어 등을 통해 독일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적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죠.
"모든 민족은 그 환경 속에서 나름의 완전성을 지닌다"는 문화 상대주의를 바탕으로 시작한 이 선구적 실천은 독일의 민족 정신(Volksgeist_국민정신으로 번역하기도 함)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훗날 역사비교언어학, 민속학 등 다양한 비교 학문들의 탄생에도 큰 기여를 합니다.
그리고 그 배경엔 '질풍노도 운동'(Sturm und Drang)이 있었어요. 독일의 낡은 질서와 문예 전통에 반항하던 젊은 지식인들의 공감대가 점차 퍼지며 17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1776년, 같은 운동에 동참하고 있던 희곡작가 클링어(F.M. Klinger)의 작품 제목(그게 바로 Sturm und Drang)에서 따온 이름을 얻어 더 널리 퍼지게 됩니다.
3. 아이돌의 탄생
'질풍노도 운동'은 계몽주의적 이상(이성과 규범)과 괴리된 독일의 (봉건 권력이 기득권을 쥔) 현실 속에서 청년들의 불안(내 자리는 어디에 있지?)과 갈망(자아 실현)이 프랑스의 루소가 남긴 자연주의적 감성과 셰익스피어가 남긴 서정적 문학의 영향을 자양분 삼아 폭발한 문화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의 사상적 토대를 닦은 사람이 헤르더라면, 문학을 통해 폭발시킨 사람은 청년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였죠.
헤르더와 괴테는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처음 만납니다. 본래 독일 땅이었지만 루이 14세 때 프랑스 영토(독일인이 많이 사는 프랑스 땅)가 된 그 도시는 당시 프랑스의 선진 문화가 독일로 유입되는 주요 길목이었죠. 헤르더는 여행 도중 지병이었던 눈병이 악화되어 안과 명의가 있다는 그곳에 수술을 각오하고 머물던 참이었어요. 괴테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유학 온 스물한 살 법대생이었고요. (스트라스부르는 법학으로도 유명했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당대의 선진 도시)
마취가 없던 시절(외과 의사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 빠른 톱질이었던 시절), 수술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결심하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헤르더의 눈병은 그만큼 심각했습니다. 수술을 받은 후에도 빛이 잘 들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죠. 그 어두운 방에서, 고통에 예민해진 헤르더의 신경질을 받아내 가며 괴테는 그의 시중을 듭니다.
헤르더의 압도적인 지식과 통찰에 매료되었거든요. 처음엔 당대 떠오르는 지성이 자신이 있는 도시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에 그저 가벼운 호기심으로 찾아갑니다. 아버지의 강압 때문에 별 흥미도 없던 법학을 마무리하러 타지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괴테는 본래 문학, 예술, 철학에 더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막상 만난 헤르더와의 대화는 전혀 가볍지 않았어요. 괴테는 앞 못보는 헤르더를 통해 거의 개안開眼을 하는 느낌이었죠.
헤르더는 괴테에게 영국의 완전히 다른 문학 작품들과, 스코틀랜드 국경 지방의 민요 등을 소개했습니다. 특히 인간의 깊은 자아를 드러내는 셰익스피어의 거침없는 내면 묘사를 높이 평가하며 예술가는 외부의 모방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율적이고 독창적인 힘으로 창조해야 한다는 새로운 '천재' 개념을 설파했어요. 이는 당시 프랑스 고전주의에 심취해 있던 괴테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고대(그리스-로마) 예술의 완벽한 형식미를 추종하는 고전주의는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사실상 유럽의 주류 예술관이었어요. 그런 만큼 18세기 독일 궁정과 지식인 사회에도 프랑스의 고전주의 문학(라신, 몰리에르 등의 작품들)이 수입됩니다. 그리고 이를 모범으로 삼아 독일 지식인들도 도덕과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적 문학 작품들을 생산하기에 이르죠. 당대 독일의 주류 를 형성하던 이러한 흐름을 독일 계몽주의 문학이라고 합니다.
독일인이었던 괴테 역시 그러한 흐름 속에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헤르더를 만나고 보니 독일 계몽주의 문학은 지나치게 규범적이며 형식 중심적인 것이 그저 프랑스 고전주의에서 벗어날까봐 벌벌 떨고 있는 것만 같았어요. 각성한 괴테는 독창성을 잃은 독일 문학을 계몽주의의 늪에서 스스로 구하기로 합니다. 그리하여 내놓은 작품이 『괴츠 폰 베를리힝겐 』과 그 유명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죠.
독일의 역사와 민중 정서를 소재로 삼은『괴츠 폰 베를리힝겐 』이 프랑스 고전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다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내면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1인칭 시점과, 그 1인칭의 고백을 필터 없이 전달하여 공감과 몰입을 극대화하는 서간체 형식으로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의 문단을 뒤흔든 사건이었습니다. 이 소설로 마침내 괴테는 질풍노도 운동을 최전선에서 이끄는 "문학 천재"로 추앙받게 되죠.
하지만 그 명성이 괴테의 운명을 바꿔놓습니다. 독일의 작은 공국 바이마르의 젊은(당시 18세) 공작이 괴테(당시 26세)를 초청했거든요. 공작과 마음이 통했던 괴테는 점점 그와 친밀해지다가 아예 그 공국의 관료로서 일하게 됩니다. 워낙 유능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그러나 공작과의 깊은 우정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서는 소외된 삶에 회의를 품게 된 괴테는, 행정가로 지낸지 십여 년만에 훌쩍 떠나버립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간것이었어요. 당시 유럽엔 한창 고고학 열풍이 불고 있었는데, 특히 이탈리아의 고대 유물이 화제였거든요. 여행을 통해 로마의 조각과 건축을 체험한 괴테는 젊은 시절, 예술을 형식으로 억압한다며 배척했던 고전주의를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물론, 프랑스 고전주의를 모방하는 독일 계몽주의로 회귀하려는 것은 아니었어요.
그가 고전(고대 예술)의 비례와 형식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은 '자연과 정신의 조화'였어요. 그것은 일시적 질풍노도가 아닌 수천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삶과 예술의 근원이었죠. 마침내 자신의 예술적 자아를 회복한 괴테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고대 예술에서 체험한 '조화의 원리'를 정치, 교육, 예술 전 분야에 걸쳐 적용하는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창시하고 실천합니다. 괴테의 문화정책으로 바이마르는 단숨에 독일 문화의 중심지로 떠오르죠.
괴테의 이러한 행보는 그가 괴테처럼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과도기를 살았던 또 다른 천재 베토벤과 차별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베토벤은 빈의 고전주의 거장들(하이든, 모짜르트)에게 사사 받으며 음악을 시작했고 '조화와 절제'를 강조하는 괴테의 바이마르 고전주의에서도 영향을 받지만 낭만주의가 도래하기도 전에 낭만주의의 길을 앞서 걸었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규범을 넘어서 내면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음악을 개척했죠.
괴테와 달리 평민이었던 신분에서 비롯된 반귀족적이고 자유분방한 삶의 태도 역시 낭만주의와 통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 음악가는 귀족 신분의 직업이 아니기도 했죠. 음악가(화가도 마찬가집니다.)는 바로크 시대까지만 해도 왕궁이나 귀족 소속의 '주문생산자' 정도로 여겨졌고 고전주의 시대에도 음악가에 대한 인식은 '전문기술자' 정도였어요. 단독 콘서트를 통한 공연 수익을 얻는 소수의 음악가들도 있었지만(모짜르트나 베토벤 정도...) 여전히 대부분의 음악가는 자신을 후원하는 귀족의 주문에 따라 작곡을 해야 했죠.
베토벤이 악보에 체계적인 번호를 붙여 출판사가 어떤 작품이 언제, 몇부 출판되었는지 추적할 수 있게 함으로써 저작권을 보호하고 그를 통해 얻은 저작권 소득으로 경제적 자립을 꾀한 것(그는 자유로운 음악 활동을 하기 위해 작품 번호(Op.)를 '체계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음악가이기도 했어요.)은 그런 귀족의 후원에 종속되는 음악활동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예술을 하기 위함이었어요. 개인의 감정과 고뇌를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현실적 조건을 스스로 개척한 것이죠.
베토벤의 삶(후원자에게 종속되지 않는 예술가의 자의식 개척)과 예술(인간의 투쟁과 초월을 고전주의적 형식의 혁신을 통해 표현) 속에서 자신들의 이상을 발견한 낭만주의자들은 강력한 존경과 지지를 보냅니다. 괴테의 바이마르 고전주의 주창 이후, 바이마르에 이웃한 도시 예나(예나 학파)에서 시작된 낭만주의는 괴테의 완벽한 예술을 존경하면서도, 그래도 예술은 미완의 무한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베토벤이 음악으로 그 무한의 벽을 경이롭게 돌파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베토벤의 돌파는 그때까지 문학 중심으로 서열화되어 있던 유럽의 예술관을 전복시킵니다. 앞서 언급한 음악가나 화가의 지위에서 알 수 있듯 그전까지 음악과 회화는 '언어로 표현되지 못한 감정을 보조하는 장식물' 정도로 여겨졌어요. 문학처럼 '사상을 표현하는 능력'이 없다고 본 것이죠. 초기 낭만주의자들(순정 시인 노발리스 등)도 문학을 중심으로 예술의 해방을 모색했어요. 그런데 "음악이 언어보다 더 직접적으로 사상을 전달한다"는 신념을 지닌 베토벤이 나타나 스스로 그 신념을 증명해 버린 것이예요.
낭만주의의 시인과 철학자들(슐레겔 형제, 호프만 등)은 베토벤을 근거 삼아 "음악이야말로 순수 정신의 예술"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문학으로 넘을 수 없었던 괴테의 벽을 음악(베토벤)을 통해 넘었다고나 할까요? 문학에만 갇혀 있던 예술이 음악을 통해 해방되면서 내면, 감정, 무의식, 절대정신 등의 낭만주의적 예술관은 음악은 물론 문학, 철학, 미술 전반에 걸쳐 차별없이 확산되기에 이릅니다. 마침내 예술의 위계가 무너져버린 것이죠. 기술의 한 종류에 불과했던 예술이 우리가 아는 예술의 의미가 된 것은 이때부터입니다.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비로소 예술은 주문 제작된 물건에서 자아 표현의 창작물로, 예술가는 장인, 혹은 기술자에서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는 문화적 주체이자 젊은이들의 우상idol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죠. 천재 예술가에 대한 동경과 우상화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20세기 대중문화산업과 만나 정점을 이룹니다.
물론 20세기의 대중 예술은 작품이 아닌 상품(또는 제품)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예술가들은 꾸준히 등장했고, 힘없는 청년들은 그들의 예술을 끌어 안고 기득권이 소외시키는 현실에 저항하곤 했죠. 그것은 지배적 질서에 구속되지 않는 낭만주의의 강인한 아름다움이 여전히 예술의 깊은 곳에서 숨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낭만주의인지 궁금한 적은 없으셨나요? 지식 혁명이 불러온 인식적 고찰을 바탕으로 합리적 사회개혁을 이루자는 이상이 'Enlightenment : 빛을 비추다'로 표현되었고 그것이 동양에서 '어리석음을 일깨운다'는 의미의 '계몽啓蒙'으로 번역되었다면, 낭만주의의 '낭만浪漫'은 대관절 무슨 뜻인가? 한자를 그대로 직역하면 '물결이 흩어진다.' 즉, 제 멋대로 한다는 뜻인데, 뭘 번역하려 한 거지?
나이든 괴테가 철없다고 욕하든 말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공감하고 헤르더의 역사관을 계승하며 무한한 정신의 해방을 추구하던 낭만주의자들은 독일이 이루지 못한 정치적 통일 대신 "정신의 통일(Die Einheit des Geistes)"을 추구합니다. 계몽주의에 의해 이성적 주체로 세워지며 감정, 상상과 단절된 인간의 내면을 온전히 통합하고 계몽주의의 기술적 세계관이 망가뜨린 자연과의 관계도 회복하자는 것이었죠. 어찌 보면 이는 혁명처럼(실제 혁명도 일으킴) 유럽을 휩쓸었으나 어느새 꼰대의 질서가 된 계몽주의에 대한 젊은 독일의 19세기식 혁명이었어요.
'혁명'은 마치 낭만주의의 언어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그것은 심사숙고에서 출발해 단호하고 냉혹한 결단(a.k.a 단두대)으로 이어지는 계몽주의의 혁명과는 결이 달랐습니다. 소외된 감성을 회복하려는 온기와 열정으로 무장한 모험에 가까웠죠. 그 모험은 또한 내면을 향한 여정에서 시작된 것이었으므로 고유한 자아를 포착하고 표현하는 다양한 예술에 대한 관심과 문화 현상으로 번졌던 것이에요.
그리고 그 표출되는 형식이 문화 운동이었던 만큼 청년들은 '계몽주의적 문화 운동=고전주의'에 착안하여, 고전주의의 대척점에 서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저항을 명명命名합니다. 낭만주의Romantik(영어 : romanticism)의 "낭만" 즉 "Roman(혹은 romance)"은 중세부터 고대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가 '아닌' 민속어, 혹은 그런 민속어로 쓰인 이야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낭만주의’라는 이름은 우리는 너희들같이 고대의 형식미를 추종하는 문화와 반대 방향으로 간다는 선언이었죠.
철자에서 알 수 있듯 Roman_romane은 원래 로마의 언어, 즉 라틴어(Latina lingua)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확장과 함께 이 로마어(라틴어)가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죠. 그러나 로마인이 아닌 각지의 정복민들은 라틴어에 서툴러 자신들의 일상적 발음이나 어휘가 섞인 어설픈 라틴어, 즉 속 라틴어Vulgar Latin을 구사했어요. (똑바로 말을 못하고 바~바~ 하고 말한다 하여 로마인들은 그들을 바바리안이라고 함.) 그리고 로마가 망한 뒤 이 속 라틴어는 지역별로 변형되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으로 발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세에 들어서도 고전 라틴어Latina lingua는 성직자와 행정의 언어로 사용되며 고귀한 지위를 유지했기에 본래 로마의 언어였던 고전 라틴어는 그냥 라틴어라고 부르고, 그 고귀한 고전 라틴어와 구분하여 속 라틴어에서 유래한 유럽 각지의 언어들을 되려 로망스어(Romance languages)라고 부르게 되었어요. 본래 로마어를 뜻하던 말이 중세에 들어서는 역설적이게도 "로마어가 아닌 언어(그저 로마에서 유래한 언어)"라는 뜻을 지니게 된 것이죠.
이후 라틴어를 몰랐던 중세의 평민과 기사 계급이 이 "로마어가 아닌 언어"인 roman, 즉 자신들의 민속어로 '기사도, 모험, 사랑'을 담아 만든 환상적인 이야기를 "로망 문학"이라 하게 되었고, 이점에 착안하여 15~17세기 영국에서 창작된 사랑과 모험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비현실적 이야기들도 "로맨스"라 부르게 됩니다. 17~18세기엔 이미 유럽에서 romantisch는 "이상적, 환상적, 현실과 거리가 있는"의 뜻으로 통용되고 있었어요. 독일의 청년들은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이성에 저항하고 감성을 지향하는 자신들의 간판으로 "Romantik"을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청년들의 저항 문화였던 만큼 작명에서부터 반골의 몽니(우린 안 고전주의다!)가 강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낭만주의가 주창한 '정신(geist_영어 ghost와 어원을 공유하나 그보다는 soul이나 spirit으로 번역하는 게 어울림. 이성과 규범의 억압에 저항하는 모든 정신적 열망_예술가의 창조 정신, 민족의 정신, 시대정신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을 통해 독일은 민족적 독자성에 눈 뜰 수 있었고, 그 독자성을 근거로 한 유기체적 결합을 추구한 끝에 결국 우리가 아는 '독일'이라는 이름으로 통일 국가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한때의 열병이라 비하되던 청년들의 저항이 끝끝내독일의 미래를 열어 젖힌 것이죠.
4. 정신의 여정과 목적_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헤겔은 진지충이었습니다. 극단적인 모범생이자 우등생, 애늙은이, 책벌레였죠. 부모의 영향이 컸어요. 엄마도 아빠도 시대전환기의 격변에서 교육을 통해 신분 상승을 한 집안 출신이었거든요. 똑똑한 만큼 집안의 기대와 함께 온갖 사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헤겔은 특히 '수학'과 '물리학'을 좋아했대요. 경험적 이성 너머의 세계를 숙고할 정도로 조숙했지만(워낙 수준이 높아 또래와 어울리기보다 선생님들과 대화하며 산책하길 즐겼다고 하네요..-_-;;), 경험적 이성을 훈련시키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랍니다.
왠지 정이 떨어질 만큼 해괴한 사람이라(이름도 원래 해괼 아닐까?) 더 알아보기가 싫어졌지만 성격은 순하고 조용했다기에 좀더 살펴보니, 대학 가서 드디어 날라리(헤겔 기준) 친구들과 친해지더군요. 신학과 철학을 함께 공부하던 셀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과 훨덜린(Johann Christian Friedrich Hölderlin)이 바로 그들입니다. 두 사람은 당시 여전히 유행하던 질풍노도 운동에도 동참하는 학생들이기도 했어요.
헤겔은 질풍노도 운동을 청춘의 방종 정도로 생각했지만 셀링과 훨덜린은 좋아했습니다. 얼른 보기엔 안 그래도 막상 토론에 들어가면 진지한 애들이었거든요. 헤겔은 자신에게는 없는 셀링과 훨덜린의 자유분방함에 점차 녹아듭니다. 프랑스 혁명 소식을 들었을 땐 정신의 자유가 마침내 실현됐다며 셋이 밤새도록 춤을 추었다고 하네요. (물론 재미있는 일화가 대개 그러하듯 특별한 근거는 없어요. 그래도 헤겔을 귀여워할 수 있음.)
셀링, 훨덜린과의 교류, 그리고 프랑스 혁명은 백과사전적 지식인 헤겔의 방대한 철학적 사유에 중요한 자극을 줍니다. 헤겔은 셀링과 훨덜린의 감성과 열정, 그리고 자신의 오랜 철학적 주제인 보편 이성의 질서를 결합하여, '정신geist의 내적 필연성', 즉 '정신의 자기전개 과정 전체'를 이해하고자 했어요. 그리고 혁명에서 받은 감명을 바탕으로 그 정신이 어떻게 현실로 실현되는지를 설명하고자 했죠.
"자유란 무엇인가, 개인의 이성에 내재한 보편적 원리는 사회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는가." 확고한 철학적 목표를 수립한 헤겔은 비로소 낭만주의 시대의 학생답게 학교가 제시하는 커리큘럼은 거의 무시하고 관심 가는 대로 다양한 학문들을 탐닉하는 나름의 모험(학문 탐닉이 모험…)을 시작합니다. 졸업 후 가정 교사를 전전하는 생활에 치이면서도 세상에 새로운 철학을 설파하는 자유기고가를 꿈꾸며 철학 연구를 지속해요.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어요. 결국 글로 먹고 사는 대중 철학자가 될 수 없다면, 계속 연구하고 학생들에게라도 그 결과를 발표할 수 있는 교수라도 하자 생각한 헤겔은 뒤늦게 보편적 낭만주의의 중심이었던 예나 대학에 강사로 취직합니다.(예나 대학에서 친구 셀링은 이미 교수를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강사생활을 하며 훗날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정신현상학』을 완성할 때쯤, 예나를 정복하고 입성한 나폴레옹을 목도합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이렇게 적어서요.
"나는 오늘 세계정신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 장면을 보았다.(Ich sah den Weltgeist zu Pferde.)"
헤겔에게 나폴레옹은 그가 철학 속에서나 사유하던 '동적 이성', 즉 '역사 속에서 정신으로 성숙한 이성이 현실로 드러나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죠. 나폴레옹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확신하게 된 헤겔은 마침내 "정신은 자기의식으로 완성된다"는 요지를 담은 『정신현상학』을 완성해 세상에 발표합니다. 칸트의 관념론, 헤르더의 역사관, 낭만주의의 정신geist과 유기체적 세계관이 결합된 이 통합적 사상은 '의식의 변증법적 발전'을 논증했죠.
헤겔은 이성 외부에 진리란 있을 수 없다는 (칸트가 정립한) 관념론을 바탕으로 낭만주의의 주관성(진리는 주관적이다)을 인정했어요. 하지만 낭만주의가 탐닉하는 자연적 신비나 환상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동물이나 식물의 정신을 상상하는 것조차 어차피 인간의 정신이므로, 철학의 관심은 인간의 삶, 생각, 문화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어차피 그것들을 통해 인간의 정신이 드러날 테니까요.
헤르더 이후 풍부해진 다양한 문화와 역사적 지식은 헤겔의 그런 아이디어에 풍부한 토양을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통해 세계정신의 진행을 관찰한 헤겔은 시간을 초월한 만고불변의 진리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죠. 역사를 연구해 보니, 인간 인식의 기초 즉 '옳고 그름의 기준'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마치 샘으로 솟은 물이 다양한 길들을 거칠 때마다 새로운 성분을 얻거나 잃고 새로운 물살로 굽이치는 것처럼요. 인류의 인식도 그 흐름의 어디쯤에 있다는 것이죠.
재밌는 것은 이 비유적 생각이 역사는 발전하고, 인류의 인식 또한 진보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헤겔은 강이 바다를 향하듯 역사에는 뚜렷한 ‘목표’(공동체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보편적 질서와 자의식의 통합을 실현한 정신geist이 결국 스스로를 절대적 차원에서 완전히 인식하는 절대정신의 경지에 이르는 것)가 있다고 생각했고, 인류 또한 역사를 거쳐 더 나은 합리성과 자유를 획득하며 진보하는 중이라 생각했어요.
흐름과 흐름 속 각 상황의 맥락을 중시하는 헤겔의 철학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낭만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즉, 모든 개인의 진실은 개인이 속한 맥락과 함께 드러나는 것인데, 가족이나 공동체의 역사와 같은 객관적인 맥락을 무시하고 자신의 주관적인 해석만 강조하는 사람들은 '비역사적인 사람들'이고 고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죠.
근데 이게 참, 틀린 말은 아닌데, 좀 위험한 말이었어요. 왜냐하면 실제로 헤겔은 개인보다 모든 개인들의 맥락으로서의 세계정신, 그리고 그것의 실현이라고 생각한 '국가'를 더 중요시 했고 이는 이후 전체주의로 왜곡될 소지가 있었거든요. 실제로 헤겔의 갑작스런 죽음(콜레라 유행 때 사망) 이후 헤겔학파는 분열되는데, 그 중 헤겔을 기독교적 질서의 철학자로 해석한 보수적 세력(우헤겔파)에 의해 그러한 위험은 현실화 됩니다.
헤겔은 국가를 최상위 가치로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정신이 예술, 종교, 철학 등의 절대 경지로 가기 위해 거치는 과정이라고 보았음에도 권력자들은 절대경지의 과정이 아닌 절대정신의 실현으로서 자신들의 독재와 국가주의를 정당화 해버린 것이죠. 뿐만 아니라 앞서 말한 진보주의적 생각은 역사가 선택한 것이 옳다, 즉 옳은 것은 살아 남는다란 생각으로 연결되어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의 타당함을 밑받침하게 되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헤겔 추종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헤겔의 변증법을 비판적, 혁명적 사상으로 해석하는 후학들(좌헤겔파)도 있었습니다. 프로이센 정부는 그러한 해석이 퍼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헤겔의 옛 친구 셀링을 내세워 "헤겔 철학 비판 강의"를 개설하죠. 하지만 소식을 듣고 모여든 젊은 지성들은 이내 셸링의 시대착오적인 강의(헤겔 철학을 낭만주의적 신비주의의 차원에서 비판)에 분노하고 중도에 흩어져 버립니다.
그들 중엔 맑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집필하게 되는 엥겔스, 다윈에게 영감을 준 '자연미학'을 창시하게 될 훔볼트 등 훗날 현대철학을 열어젖힌 기라성같은 인재들도 많았죠. 권력에 종속되어 빛바랜 명성을 이어가려던 셀링의 강의는 오히려 사상계의 세대 교체를 촉발한 전환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세대 교체의 최전방에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 키에르케고르가 있었습니다.
5. 뭣이 중한디?_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키에르케고르는 헤겔 철학의 추상성에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변증법적 체계가 현실의 구체적인 인간 존재를 포착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개념 놀이에만 머물렀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기에 당대 독일 사상의 중심이었던 베를린 대학(헤겔도 죽기 전까지 이 대학에서 강의했어요)에서 셀링을 초빙해 헤겔 철학을 강의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셀링이 실재성actually의 문제를 다룰 것이란 기대를 안고 찾아가죠.
헤겔은 세계이성의 자기 인식 과정을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체계로 설명했습니다. 특정 맥락 안에서 정설로 자리잡은 주장(정正, Thesis)이 시간이 흘러 바뀐 맥락에 따라 등장하는 반대 의견(반反, Antithesis)에 부딪힌 뒤, 결국 그 모순의 긴장을 해소하며 더 높은 차원의 정설(합合, Synthesis)에 이른다는 이론이죠. 2000년대 중반, 당시 SM엔터테인먼트의 간판 아이돌이었던 동반신기가 놀랍게도 이 헤겔 철학의 정수를 타이틀로 한 앨범을 발매한 적이 있습니다. (성장하는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해 만든 아이돌한테 왜 대놓고 중국 사상가들을 조롱한 헤겔을 노래하게 했는지는 아직도 의문...)
하지만 강의가 진행될수록 셀링 역시 또 다른 추상적 사변에 빠져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헤겔이 말하는 이성보다 더 깊은 비이성적인 힘이 있다는 둥, 신적 의지가 실현될 수 있도록 인식을 열어둬야 된다는 둥 어찌보면 헤겔보다 더 한심한 관념들에 사로잡혀 있었죠. 영감을 얻고 싶었던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이야말로 내가 비판해야 할 대상이다."라는 결론을 얻고 스스로 새로운 철학의 기초를 세우기로 합니다. 단독자the single individual의 구체적인 삶, 선택, 신념과 같은 주관적 진리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죠.
인간은 역사와 같은 보편적인 맥락 속에 있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유일무이한 개체로서 고유한 열정과 신념을 안고 사는 지극히 주관적인 존재이기도 한데, 헤겔의 관념론은 너무 추상적 정의에만 몰두해서(예나 시절 편지로 헤겔과 교류했던 괴테조차 훌륭한 철학이라며 헤겔을 칭찬하면서도 좀 쉽게 표현하면 좋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죠.) 개개인의 주관적 진리에 대한 논의를 패싱함으로써 오히려 '주체'를 실종시킨다는 게 키에르케고르의 문제의식이었습니다.
헤겔 아저씨. "진리는 실체Substanz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Subjekt로서도 파악되고 표현되어야 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체스의 말판 움직이듯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을 내놓으면 어떡해. 우리는 모두 체스판 위의 말이 되어 절박하게 살아가는 존재들이라고! 우리는 보편적 질서로 일반화 될 수 없는 단독자로서 '나에게 의미 있는' 각자의 삶을 사는 존재야. 왜 그 사실부터 존중하지 않지? 그러니 권력자들이 당신 철학의 틀만 따서 국가주의처럼 개인을 전체의 일부로서만 파악하는 온갖 흉악한 현실들을 설계하고 있잖아!
물론 이미 죽은 헤겔에게 저런 말을 전할 수는 없었지만, "객관적 진리 따위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자기 자신에 관한 진리에 비하면 그것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로 요약되는 그의 생각은, 보편적 질서 속에서 갈수록 공허해지는 당대의 대중과 문명을 향해 경종을 울립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거나 그른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옳거나 그른 것에 대한 스스로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라는 거죠. 그것은 이성적 교리 탐구 속에서 점차 경건함을 잃어가는 당대의 신학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기도 했어요.
사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그의 철학 또한 모두 치열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거든요.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이해하거나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예수의 역설(신이 인간이 되어 나타났다고? 반대가 아니라?)혹은 부조리Absurd를 통해, 신앙이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개인의 '무한한 관심'과 '열정'으로 뛰어드는 주관성의 영역임을 깨달았어요. 객관적 증거가 불확실하더라도 그 불확실성을 열정적으로 붙들 수 있는 태도야 말로 인간을 윤리적 단계 너머의 진정한 삶(종교적 단계)에 이르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죠.
보편적 이성이 만들어낸 획일화를 예리하게 비판하고 주체성을 강조하는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은 개인의 욕망을 존중하는 듯하면서도 수집하고 기획하는 정보산업 기술의 억압을 성찰하기에도 좋은 것 같아요.
6. subtext 소개 및 변명
오늘은 내용이 길었던 만큼 두 개의 보조 자료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첫 번째는 린 헌트의 『인권의 발명』입니다. "유독 18세기부터 여성 권리에 대한 부단한 투쟁이 벌어진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붙들고 그 원인을 당시 유행하던 "서간체 소설로 인한 공감의 확산"에서 찾아내는 이 책은 가장 낮은 곳의 문화 현상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지를 재미있게 보여줍니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가 만들어 낸 문화적 스펙트럼을 확인하기에도 좋고, 무엇보다 인권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표지가 바뀌어 새로 나왔네요. 옛날 표지가 책의 내용을 더 잘 표현한 것 같았는데...
영화 <Stranger Than Fiction>은 알베르토를 회의하게 하는 "낭만적 아이러니"를 너무도 잘 활용한 작품이예요. 남주와 여주의 대조적인 매력이 만들어내는 긴장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키에르케고르가 무한한 부정성의 병이라며 비판적 입장을 취했던 낭만적 아이러니를, '죽음도 불사할 수 있는 주체적 신념'이라는 키에르케고르적 주제를 형상화하는 데 이용했다는 점에서 재미있게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런 생각 따위는 안 하고 보는 게 훨씬 재밌습니다. 그냥 봐도 재밌는 영화예요.)
그리고, 변명의 시간입니다.
벌써 오늘도 얼마 안 남았는데, 두 가지 이유로 한 주를 지나치게 되었어요.
첫 번째는, 착각입니다. 지난 회차가 금요일까지 늦어졌기 때문에 바로 며칠 만에 또 한 회를 쓰는 건 무리라 다음 주는 한 주 쉬고 그 다음 주에 올리겠다고 말씀 드리려 했는데, 다음 주 화요일에 올리겠다고 마무리를 지어버렸어요.
그래서 수정하려고 다시 들어왔더니, 수정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연찮게 게시물을 열 개 채우게 된 제가 무심코 이 브런치북을 브런치 공모전에 응모해 버렸기 때문이죠. (참으로 간편하더라고요.) 매번 전에 올린 게시물을 수정하면서 흐름을 이어 다음 게시물을 작성하던 저는 멘붕이 와버렸답니다. 그럼 이제 한 번 올리면 수정 못하네?
그래서, '어차피 28일은 글렀으니 다음 주 화요일에 올리자'로 돌리게 되었답니다. 그런데도 수정이 불가하다는 생각에 자꾸 미루다보니 이제야 올리게 되었네요...면목이 없습니다. 다행히, 화요일을 기억해 굳이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매회 읽어주셨던 분들께 정말 죄송해요.
다음 주엔 '마르크스' 한 단락만 더 읽고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낭만주의 특집으로, 노래로 마무리 해볼까- 하고 한 곡 들고 왔어요.
현실보다 꿈과 이상 속의 합일을 추구했던 초기 낭만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서울전자음악단의 "꿈에 들어와"입니다.
https://youtu.be/hi2Fr4nicCE?si=6yiq_aO9uFiGQzkC
오늘도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