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lude : 시민 혁명의 전과 후

『소피의 세계』'계몽주의'와 '칸트'에 덧붙여

by 하소초

세상의 이치에 부합하는 제도

계몽주의 시대, 권위를 내려놔야 했던 건 종교뿐만이 아니었어요. 종교개혁과 뒤이어 이어진 종교전쟁 이후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던 절대왕정의 권위에도 사람들은 의심을 품습니다. 그들의 지배는 세계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고 그렇기에 그들의 특권 또한 부당해 보였죠. 부당한 정도가 아니라 모두가 열심히 노력하여 어렵게 이뤄낸 진보의 과실을 도둑질 해가는 것으로 보였어요.


이는 단순한 불만이 아니었습니다. 물적 토대의 변화와 소소한 생각의 변화가 쌓여 만들어진 시민들의 의식 전환이었죠.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으로 촉발된 변화는 교회 권력의 축소와 제후 권력의 부상에서 멈춘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소피의 세계』는 생각의 여정을 돌아보는 책이니, 시민들의 의식을 전환시켜 준 중요한 풍경들을 함께 되짚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철학은 철학자만의 공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닐 테니까요.


1750년대-런던의-커피하우스-optimized.jpg 1750년대 런던의 커피 하우스_출처 : historyhub.kr


종교개혁 이후 권력을 잡은 제후들은 패권 경쟁에 돌입합니다. 말하자면 곳곳에서 전쟁을 벌인 것이죠. 그러나 지난 주에 살펴봤듯 13세기 이후 전쟁은 이미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되어 있었어요. (지난 주 갑옷 그림 이후 내용 참조) 그러니 전쟁이 장기화될 수록 각국의 재정위기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겠죠? 경쟁에 참여한 나라의 왕들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없으면 빌리기라도 해야 했고요.


하지만 전쟁하는 나라는 언제든 져서 망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왕의 신용은 생각보다 별로였습니다. 어떤 나라가 상장폐지될지 알 수 없으니 아무리 부유한 귀족이나 상인들도 왕이라는 간판만 믿고 섣불리 돈을 빌려주지 않았어요. 결국 애초에 전쟁을 일으킬 재정적 여유가 없거나 국가 신용이 약한 나라들은 자연스레 먹히거나 도태됩니다. 대항해시대를 장악했던 스페인조차 네 번이나 국가부도를 일으키게 되죠.


그리고 17세기에서 18세기, 지금 우리가 함께 보고 있는 바로크에서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시대에 와서는 부도난 스페인을 대신해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 패권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그리고 영국은 이번에도 남다른 길을 가요. 부자들이 언제 망할지 모르는 국가를 못 믿어 돈을 빌리기 어려우니 제도가 보증하는 신용 시스템을 만든 겁니다. 네, 우리가 모두 아는 그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을 설립한 것이죠.


영란은행_글로벌이코노믹.jpg 1694년에 설립되어 지금까지도 (매우) 건재한 영란은행_출처 : 글로벌이코노믹


영란은행은 단순히 영국에만 국한되는 사건이 아니었어요. 영국은행임에도 네덜란드를 뜻하는 한자 '蘭'을 넣어 이 은행이 당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은행의 금융기술을 토대로 만들어졌음을 강조하는 것만 봐도 영란은행이 포괄하는 의미가 간단하지 않음을 알 수 있죠. 그것은 대항해시대 이후 범람했던 무역자본이 만든 금융기술(신용 창출, 환전 등)이 국가의 재정 운영과 결합한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재정위기에서 영국을 구하는 것이 이 은행의 첫번째 설립 목표이긴 했지만 영란은행 설립이 영국왕(윌리엄 3세)의 개인적 기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어요. 왕과 가까이 지내던 상인과 금융가들이 재정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왕을 꼬셔서 이룬 일에 가깝죠. "돈 필요하면 우리가 금 빌려 줄테니, 그걸 갚겠다는 약속으로 채권을 써서 줘. 대신 우리한테 그걸 담보로 은행권(현행 화폐의 기원)을 발행할 권한을 좀 주라"


goldsmithreceipt_Numismatic News.jpg 18세기 중반 영국 상업 사회에서 개인 간 금융 거래를 기록한 수기 영수증_출처 : Numismatic News


말하자면 상인들이 국가를 상대로 대출해줄 테니 이자(연 8~14% 정도 받았대요. ㄷㄷㄷ ㅇㅁㅇ;;)도 주고 자신들의 이익 창출(은행권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을 위한 제도도 만들어 달라는 대담한 제안을 한 것입니다. 이 자신감의 저변엔 대항해시대 이후 더욱 숙성된 상업자본주의와 신용과 화폐(의 전신이었던 것들)를 근간으로 한 금융 질서가 이미 유럽 상인들의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현실이 있었죠.


그리고 로크(그만 좀 나와)가 있었습니다. 그의 실용주의 철학이 촉진시킨 것은 과학혁명 뿐만이 아니었어요. 국가는 개인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맺은 계약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는 로크의 사회계약론은 시장경제와 금융 질서에 윤리적 근거를 만들어 주었어요. 또한 사유 재산을 자연적 권리로 본 자연법 사상은 상업 경제 속에서 삶을 꾸려가는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노동과 사유재산을 정당하고 필연적인 권리로 여기게 해주었죠. 그것은 영국뿐만이 아닌 전 유럽의 상식이 되어가고 있었죠.


베르사유 궁전 내부_스투비.jpg 프랑스 여행 필수 코스 베르사유 궁전의 황금빛 내부_출처 : 스투비


그런데 프랑스의 절대 권력자들은 눈치도 없이 국가를 왕의 사유물이라 주장하고, 과도하게 세금을 걷고, 노동력을 수탈하고, 심지어 그렇게 뺏어간 재산마저 사치로 낭비하고 있었어요. 감히 시민들의 신성한 사유재산을 마음대로 유용流用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익 추구 활동의 근간인 국가 경제마저 나 몰라라 해버린 것입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경제 말아먹는 권력자는 끌어내려지기 마련.


프랑스 시민 혁명(1789)은 그렇게 발발합니다. 자신이 곧 국가라던 태양왕(루이 14세)의 전쟁과 사치에서 시작되어 결국 절정에 달한 재정난을 불평등한 조세로 시민에게 전가시키려던 시도가 결국 반격 당한 것이죠. 시민들은 더 이상 사유재산을 빼앗길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사유재산 수호가 이 혁명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혁명이 아니라 왕정과 시민의 이권 다툼 정도로 기록 됐겠죠.


시민들은 시대착오적 권위에서 벗어난 새로운 체제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로크(그..그만..)에서 출발한 자유(liberty)의 이념이 볼테르루소를 거쳐 이미 계몽주의 시대의 윤리적 기준이 되어 있었거든요. 그 기준에 따르면 '군림'하는 구체제와 왕정은 비윤리적이었어요. 개인의 권리인민의 평등을 존중하는 새로운 제도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혁명은 왕정을 무너뜨리죠. 그리고 프랑스에도 공화정이 들어섭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jpg 근대 민주주의의 기반이 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_출처 : 나무위키


물론 영국이 그러했듯 프랑스의 첫 공화정도 급진적 행보를 보이다가 몇 번의 쿠데타를 거쳐 결국 왕정으로 복고되긴 하지만 이 혁명 이후 인권, 평등, 인민 주권, 언론의 자유, 사유재산 보장, 삼권분립, 자유주의적 시장 질서가 문명국가의 조건이자 상식이 됩니다. 그리고 그 상식은 근대 민주주의와 시민권 확립의 바탕이 되어주었죠. 사실상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적 상식이 다 여기서 출발했다고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페미니즘feminism

그러나 그 상식의 문턱을 넘지 못한 이도 있었죠. 소피가 백과사전에서 간신히 찾아낸 그 이름, 바로 올랭프 드 구주(Olympe de Gouges, 1748~1793)입니다. 혁명이라는 급격한 의식 전환기에서 당당히 여성의 참정권과 평등을 주장하다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녀의 죄명은 "여성의 미덕을 망각했다."는 것이었어요. 이 황당한 죄목은 사실 여성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이자 엄포였어요.


"순종하고 침묵하면 예뻐해 주겠지만, 예쁨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순간 죽인다"(여자가 될래, 마녀가 될래)라는 뜻이었으니까요. '모든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서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계몽주의의 이상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어요. 루소같은 지식인마저 "여성은 남성에게 매력적이어야 하며, 교육은 그 목적에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고, 볼테르 역시 개인의 능력은 성별과 무관하다면서도 여성의 제도적 평등까지는 지지하지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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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시대 평등한 여성 인권을 위해 싸웠던 올랭 드 구주(좌)와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우). 각각 프랑스와 영국을 대표하는 최초의 여권 운동가로 꼽힌다.


계몽의 문턱을 넘지 못한 여성 인권에 대한 논의는 현재까지도 진행 중입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영국과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사용되며 널리 퍼진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지금은 '여권 운동'을 의미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죠. 하지만 이 말은 종종 "여성들의 권리 옹호"로 축소되어 이해되거나 심하게는 "남성들의 억압에 대한 여성들의 저항"이란 뜻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러나 본격적인 여권 운동의 배경이 계몽주의, 그리고 시민혁명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러한 오해가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 드러납니다. 올랭 드 구주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그러므로 모든 개인의 권리는 존중 받아야 한다." 혁명의 정신에 가장 강렬히 동조했던 사람이에요. 그렇기에 이런 말을 덧붙일 수밖에 없었던 거죠. "맞아, 맞아! 그런데 거기에 여성이 빠졌어." 그게 다예요.


그녀에겐 혁명의 논리가 너무 자명하고 옳았기에 여성을 빠트린 걸 간과할 수 없었던 겁니다. 명백히 인간인 여성을 말하는 가축 정도로 여기는 문화를 그냥 두고 그 훌륭한 혁명의 정신이 실현될 수는 없었으니까요. 마찬가지입니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시작된 운동이긴 하지만 사실 여성들을 특별히 생각해 달라고 시작한 운동이 아니예요. 오히려 그 반대죠. 페미니즘의 핵심은 "모두의 평등"입니다.


구즈 처형_여성신문.jpg 단두대에 오르는 올랭 드 구주_출처 : 여성신문


그렇기에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 옹호'가 아닌 '모든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는 태도'로 이해하는 게 맞습니다. 사실 어떤 대상을 차별하는 문화는, 비단 그 대상만을 차별하지 않거든요.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을 구분하는 문화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똑같이 억압합니다. 키가 작거나 체력이 약하거나 경제력이 없어서 압박감을 느낀다면 그 사람은 남녀 차별의 억압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왜 여성은 꼭 순종적이어야 해?"라고 말하는 사람이나 "왜 남자가 더 큰 경제적 책임을 져야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똑같이 페미니스트인 것이죠. 비슷한 논쟁에서 여성만 페미니스트로 치부하는 일이나 왜곡된 분노를 '미러링'이라며 합리화하는 행위 등을 페미니즘 운동으로 낙인 찍는 몇몇 몰지각한 현상을 보면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현상을 바탕으로 페미니즘을 "페미"라는 혐오의 언어로 비하하는 것도요.


사실 여성 인권 문제는 여타 다른 사회적 약자의 인권 문제와 근본 적으로 다른 지점이 있어요. 여성은 '소수'가 아니라는 것이죠. 인류의 반은 여성이잖아요? 이걸 소수자나 약자라고 볼 수 있는 건지 헷갈리는 것이죠. 남녀 평등이라고 하지만 신체적 차이에서 오는 구분도 무시하자는 건지 헷갈리고요. 그럴 때 여성 운동의 출발점인 계몽주의와 시민 혁명의 정신을 기억해 보는 겁니다.


이것은 특정 집단의 소외를 해소하자는 운동이 아니라,

모든 부당한 억압과 차별에 저항하자는 운동이라는 것을요.


사실 그렇기에 페미니즘이 어렵기도 합니다. 특히 남녀는 평등하다는 교육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명백히 남녀를 차별하고 억압하는 문화를 경험하면서 자랐다면, "나 평등 알아, 이거 왜 이래-" 하면서도 무의식 깊이 베어 있는 차별의 습관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마찬가지죠. 둘 다 나름의 방식으로 차별을 체득하며 살아왔을 테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의식 속 정언적 명령에 모순되지 않는 행위와 실천을 꾸준히 모색해야 하겠죠.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 바람직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성은 "차별 없는 평등"을 끝없이 희망하는 속성을 지녔으니까요. 우리의 실천 이성을 믿어 보는 겁니다.


부디 페미니즘이 "페미"의 늪에서 하루 빨리 구원받을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여담이지만 프랑스의 개신교 집단이었던 위그노들이 완전히 박해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도 시민혁명 이후부터입니다. 청교도와 위그노는 종교개혁 시기 칼뱅의 가르침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선 공통되지만, 영국이 한 발 먼저 넘어지는 바람에(프랑스한테 털리는 바람에) 언제나 대륙보다 한 발 앞선 근대적 개혁(청교도 혁명-명예혁명-권리장전)을 이끌 수 있었던 청교도들과 달리, 위그노들은 오랫동안 가톨릭과 가까웠던 권력의 그늘에서 탄압 받았었거든요.

그러니 어찌보면 개신교 세력을 일으킨 종교개혁은 기나긴 여정을 거쳐 시민혁명에 와서야 비로소 완결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근대적 제도와 이념의 기틀 마련'이라는 최종 결과물을 남기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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