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세계』_ 10. '마르크스'
0. 왜 모두 죽고 나면 사라지는 걸까?
자기는 그게 너무 화가 났었다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이 노래. 그게 화 날 일인가? 아니, 죽었는데 안 사라지면 어떡해? 하는 의아함은 이내 해소됩니다. 그가 사라진다고 표현한 건 다름 아닌 '망각'. "살찐 돼지들과 거짓 놀음 밑에 단지 무릎 꿇어야 했던" "오직 힘들게만 살아 온 사람들"이 "피흘리며 떠나"갔음에도 그것들이 너무도 쉽게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게 화가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상상합니다. 잊혀져 간 그들이 언젠가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요. 검은 하늘을 환히 비추며 모두 데려갈 빛을 내리는 그 날, 오랜 미움과 분노들도 우리와 함께 날으리라는 이 계시적 상상은 이내 기원을 넘어 예언처럼 메아리칩니다.
UFO가 타임머신일지도 모른다는 전환적 발상 위에 소외된 약자들의 귀환과 구원의 이미지를 뒤섞는 발칙한 전복顚覆. 좋은 가사를 쓰고 싶어 사회학을 전공했다는 20대의 이적은 이처럼 대담했습니다.
1. 트리어의 문학소년
그리고 여기, 소외된 약자들에 대한 관심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믿었던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동안 프랑스의 땅이었던 프로이센의 중소도시 트리어. 백 년만에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처럼 시민적 자유 의식과 보수적인 행정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긴장 속에서 그는 지지받지 못하는 권력의 억지스러운 횡포를 목도하며 자라납니다. 부조리에 예민한 감각을 키우면서요.
아버지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유대인계였던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루터교로 개종하고 변호사가 된 뒤에도 차별받는 유대인을 위한 청원이나 제안을 멈추지 않았거든요. 다행히 변호사라는 신분과 지역에서 쌓은 인망 덕에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진 않았지만, 기득권에 저항했다는 낙인이 찍혀 적지 않은 고초를 겪어야 했죠. 현실의 벽을 절감한 그는 똑똑한 아들이 부디 안정적인 직업(법률가나 행정가)을 얻어 안정적인 삶을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좌절을 지켜보며 자란 젊은 아들은 이미 철학과 문학에 심취한 전형적인 낭만주의 감성의 청년으로 자라고 있었어요. 괴테의 작품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고 시(그것도 주로 연애시)와 산문을 즐겨 썼으니, 가족이나 친구들마저 그가 시인이 될 거라 생각했다네요. 그럼에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본Bonn 대학의 법학과로 진학했지만 대학생이 된 아들은 외려 종교, 철학, 문학, 그리고 술에 두각을 나타냅니다.
(당대 독일 대학들에서는 음주와 토론을 함께 즐기는 호쾌한 문화가 흔했는데, 신생 대학인 본 대학은 특히 더 자유로웠다고 하네요.)
결국 아버지는 늘 그래왔듯이 자상하게, 그러나 진지하게 제안합니다.
전학 가라.
덕분에 당대 유럽 지성의 중심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하게 된 마르크스는 당대 철학의 기준이었던 헤겔 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됩니다. 물론 강의실보다 술과 토론이 어우러지는 청년 헤겔학파(Young Hegelians 또는 Left Hegelians : 헤겔 좌파)에서요. 그리고 거기서 훗날 헤겔 철학과 함께 맑시즘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는 또 하나의 사상을 접하게 됩니다. 바로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의 저서들이었죠.
헤겔의 제자 중 한 명이었던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의 불멸신앙을 부정한 탓에 학계에서 쫓겨나 저술로만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그의 『기독교의 본질』이나 『미래 철학의 근본 명제』같은 책은 '포스트 헤겔'의 모범으로서 젊은 지식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답니다. "정신이 아니라 물질이, 사유가 아니라 존재가 근원"이라는 관점은 관념론의 사변적 논의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와닿는 철학이었어요.
낭만주의의 인류애적 감성 위에 헤겔의 역사철학과 변증법, 그리고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이 결합된 독특한 철학의 구상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자식만큼은 사회적으로 확고한 지위를 얻어 살길 바랐던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과 사랑이, 세계적인 시를 쓰고 싶었던 트리어의 문학 소년을 세계를 변혁하는 글을 쓰는 사상가의 길로 인도하고 있었던것입니다. 자식 새끼한테 암만 기대를 걸어봐야...
2. 너 내 동료가 돼라.
학교를 졸업한 마르크스는 언론인이 되어 밥벌이를 합니다. <라인신문>에 주로 정치칼럼이나 사회경제 비판을 담은 기사를 썼죠. (그리고 그 덕에 그의 평생 친구 엥겔스(Friedrich Engels or a.k.a. 지갑)와 만나게 됩니다. 마르크스의 논설을 읽고 '경제 문제를 이렇게 깊이 다루는 철학자는 처음 봤다.'며 감탄한 엥겔스가 라인신문에 투고한 자신의 글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확인할 겸 편집인이었던 마르크스를 직접 찾아갔거든요.)
그러나 수구 꼴통 왕과 귀족들이 지배하던 프로이센은 얼마 안 가 <라인신문>을 폐간시켜 버립니다. 그 바람에 언론인으로서 활로가 막힌 마르크스는 사상적 자유가 허락된 파리paris로 향하죠. 그리고 그곳에서 활동 중이던 사회주의자들을 접하게 됩니다. 당시 파리는 유럽 급진 사상가들의 집결지 같은 곳이었거든요.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과 바쿠닌(Mikhail Bakunin)도 여기서 처음 만납니다.
우리나라에선 마르크스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창시자(혹은 괴수)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공동 소유', '평등한 분배' 등을 골자로 하는 사회주의적 아이디어는 유럽에선 이미 16세기부터 등장했어요.(보통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그 시작으로 봅니다.) 다만 산업화 시대의 불평등이 극에 달한 19세기 초엔 '공상적'이라 할 만큼 그 사상의 양상이 좀 심하게 급진적이었죠. 중요한 사례만 짚어 보자면,
먼저 "(노동 아닌 수단으로 얻은건물주는 도둑놈) 소유는 도둑질이다"라는 문구로 유명한 프루동은 '공익'을 말하면서 부자의 재산만 지키는 국가 권력 자체를 문제 삼았어요. 그래서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연대 조직인 '협동 조합'에 기반한 지방 자치, 그리고 그것의 연대인 '연방 체제'를 국가의 대안으로 제안했죠. 공정한 계약과 상호신뢰만 있다면 중앙집권적인 국가나 자본가는 차라리 없는 것이 사회에 이롭다는 주장이었어요.
러시아에서 온 바쿠닌은 한 발 더 나갑니다. 그는 모든 형태의 권력과 권위를 거부하는 무정부주의를 주장했어요. (아나키즘이라고도 하죠. 우리나라에도 신채호라는 걸출한 아나키스트가 있었습니다.) 국가권력을 폭력적 혁명으로 파괴해야 민중은 집단적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죠. 그것도 가능한 즉각적으로요. 바쿠닌의 이런 급진적 성향은 훗날 마르크스와 대립하는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이외 미국으로 이주해 실제 공산 공동체 실험을 시도했던 에티엔 카베(Etienne Cabet)의 추종자들, 국가 사회주의(state socialism)를 주창한 루이 블랑(Louis Blanc)과의 만남도 마르크스에겐 중요한 자극이 됩니다. 하지만 파리 시절, 그리고 이후로도 마르크스에게 가장 중요한 인연은 역시 엥겔스였습니다. 라인신문 시절 막연한 호감으로 잠시 마주쳤을 뿐인 두 사람은 파리에서 재회해 하루 종일 토론을 하게 되죠.
난다긴다 하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파리에 있었지만, 엥겔스에겐 그들에게 없는 독보적인 매력이 있었거든요. 그것은 바로 과학적 태도였습니다. 아버지의 방직 산업을 잇기 위해 영국 지사에서 관리자로 일하던 엥겔스는 산업 현장을 직접 관찰한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경제를 분석하고 비판했어요. 그는 이상에서 출발하는 급진적인 사상가들과 달리 현실 분석을 바탕으로 철학적 비판을 하는 실증적 이론가였던 것이죠.
그것은 마르크스가 추구해 오던 학문적 태도와 정확히 통하는 것이었습니다.
3. 혁명의 역설
수학혁명을 지나 과학혁명과 금융혁명, 시민혁명을 이루고 나아가 산업혁명에까지 이른 19세기 유럽은 이전까진 경험해보지 못한 삶의 양상들에 스텝이 꼬이고 있었습니다. 경쟁을 장려하는 자유시장과 점차 발전하는 공장의 대량생산으로 인해 각국은 전에 없는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었지만 제국주의적 경쟁이 난무하는 국제환경은 그것을 늘 부족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거든요.
그러한 상황은 애덤스미스가 일찌기 『국부론』에서 경계한 세 가지 위험을 모두 허용하는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정경유착', '자유방임', 그리고 '대량 생산과 분업이 야기하는 인간성 저하'. 애덤 스미스는 분업을 통한 노동 생산성 증대와 자유로운 시장의 효율적 자원 배분을 긍정했지만 그 이면에 도사린 저 세 가지 부작용을 경계해야 하고 필요할 경우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도 주장했죠.
그런데 타국과의 경쟁에 목마른 국가가 시민 혁명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한 부자들과 결탁(정경유착)하여 성장을 명분으로 시장을 방임(자유방임)하니 대량 생산과 분업이 야기하는 인간성 저하가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폐를 통해야만 자원을 획득할 수 있는 세상 속에서 노동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자본과 시장을 선점한 부자들의 닦달을 감내해야만 했거든요. 가난은 게으름의 결과라는 모욕을 당하면서요.
그 모든 것을 엥겔스는 아주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역시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보수적인 기독교 윤리로 무장한 아버지는 고전문학과 민족주의(네, 맞습니다. 낭만주의의 콘텐츠들이죠.)에 빠져드는 아들이 당시 대학가의 청년들처럼 급진적 사상에 빠질까 염려됐습니다. 자식들이 대학 가서 데모할까 걱정하던 독재 정권 시기 우리나라의 부모들처럼요.
그래서 엥겔스의 대학 진학을 막습니다. 가업을 잇기 위해 일찍부터 실무를 익히는 게 좋겠다는 명분으로요. 엥겔스의 아버지는 독일의 섬유 사업가였는데 마침 섬유산업은 산업혁명의 최전방에 선 업종이기도 했어요. 인구 증가와 식민지 개척으로 의류 수요가 폭발하고 있었고 다른 산업에 비해 필요한 초기 자본도 적은데다 기술적 난이도가 낮아 기계화에 용이했거든요. (삼성도 초기엔 섬유산업으로 일어섰죠.)
그러나 똑똑한 아들이라면 아버지의 생각대로 자라주지 않는 법(?). 고등학교를 중퇴(당)하고 아버지 회사에서 견습 생활을 하면서도 엥겔스는 문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스무 살이 된 후에는 일반 병사와 달리 자유시간이 많은 자원 입대자가 되어(베를린 포병대에 근무) 대학 청강(네, 셀링의 그 강의도 이때 듣습니다.)을 다니거나 청년 헤겔학파와 어울리며 철학 공부를 합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쌓은 소양이 있었기에 엥겔스는 세계 최초로 완전한 산업화를 이룬 도시, 맨체스터의 살풍경 앞에서 말 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낍니다. 이전에도 노동자를 착취하는 현실을 많이 봐왔지만 그곳에서 만난 장면들은 이전의 모든 기억을 압도할 만큼 처참했거든요. 부르주아 지역과 철저히 분리된 참혹한 주거 환경, 서너살부터 시작되는 노동 착취, 12시간 넘게 이어지는 살인적 노동 시간, 결국 범죄로 내몰리는 사람들... 엥겔스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저 감정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맞닥뜨린 부조리의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그는 아버지 회사의 공장 관리자로 일하는 틈틈이 직접 노동자들과 접촉하며(어릴 때부터 아버지 회사에 고용된 노동자의 자녀들과 어울려 놀았던 엥겔스는 스스럼없이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어요.) 그들의 참혹한 삶을 자세히 살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본이 만들어 낸 새로운 신분제, '계급'을 읽어내죠. 그것은 계약이란 족쇄로 '합의'되는 기묘한 기만이었습니다.
엥겔스는 인류가 당면한 자기 파괴적 위기를 고발하기 위한 새로운 저술을 구상하기 시작합니다. 2년 뒤, 스물 네 살의 나이로 출간하는 『영국 노동자 계급 상태』가 바로 그것인데요, 이 책은 공장제 자본주의의 착취 구조를 '경험적으로 입증'한 최초의 저작이었어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의기투합도 이 책을 기점으로 본격화 됩니다. 파리에서 하루 종일 했다는 토론도 바로 이 책의 구상을 나누고 공감하는 과정이었죠.
4. 가장 20세기적인 상식의 탄생
종일 이어진 격렬한 토론 끝에 사상적 동질성을 확인한 두 사람은 당장 그해(1844년) 말부터 첫 공동 저작에 착수합니다. 급진적인 태도로 종교와 정치를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관념론의 사변적 이상에 머물러 있는 지식인들(말하자면, 젊은 시절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몸 담았던 청년 헤겔학파의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함이었죠. 그렇게 해서 펴낸 책이
『신성가족, 혹은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 책을 통해 두 사람은 역사적 유물론(사적 유물론이라고도 해요.)의 토대를 닦죠. 역사적 유물론은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비판적 계승이라고 볼 수 있는 이론인데요, 간단히 요약하자면(잘 몰라서 자세히는 설명 못함) 이렇습니다. "역사가 정반합(낭만에 대하여 참고)의 과정을 거쳐 전진하는 건 맞는데, 그 과정에는 물적 토대의 변화가 매우 깊게 관여한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르크스가 사회 구조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 필요가 있어요. 그는 모든 사회구조가 건물처럼 하부구조(물질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와 상부구조(사고방식_정신, 제도, 법률, 윤리, 도덕, 철학 등)로 나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두 구조가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 받는다고 봤죠. 나쁜 교육이 잘못된 행태를 낳는다거나 스마트폰의 등장이 현대인의 생활을 바꿨다는 설명, 모두 익숙하시죠?
(익숙하실 겁니다. 마르크스는 다음 주에 만날 다윈, 프로이트와 함께 20세기적 상식을 마련한 3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철학자거든요. 수상한 이유로 그의 책들이 금서禁書로 지정될 때도 있었지만, 이름만 금지됐을 뿐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우리에게 가장 대중적으로 수용된 철학 중 하나랍니다. 교회를 안 다녀도 생활 속에 스며들어 있는 기독교 문화처럼, 제사를 안 지내도 습관 속에 남아 있는 유교 문화처럼 말이죠.)
그런데 마르크스는 그 중에서도 역사발전을 추진하는 건 '정신적 영역'인 상부구조가 아니라 '물적 토대'인 하부구조의 변화라고 보았어요. (환상속의 그대의 '그리스의 지리적 환경이 민주제를 탄생시켰다'는 설명도 같은 관점을 바탕으로 해요.) 즉 하부구조인 물질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 변해야 비로소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이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거치는 갈등의 단계를 설정합니다.
하부구조를 변화시키는 첫번째 갈등은 바로 '자연적 생산조건과의 갈등'입니다.(1단계) 인류는 치수나 농법의 개발 혹은 유목을 통해 그 갈등을 극복해 왔죠. 그 결과 생성된 잉여가치(비용을 초과한 생산 가치)의 축적은 화폐를 통한 자본의 집약을 거쳐 산업화를 이뤄냈고요. 하지만 이번엔 '노동력, 기술력의 제약'이 가로막습니다.(2단계) 인류는 기술 개발(증기기관, 방적기)을 통해 그 갈등 또한 극복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자본주의는 이제 '소유관계와 노동 분배의 문제'에 부딪힙니다. 한 마디로 누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어떻게 자원을 분배할 것인가. 마르크스는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인류가 맞닥뜨리게 될 세 번째 갈등 단계라고 보았죠. 그리고 자신이 살던 19세기는 이미 그런 갈등의 단계에 접어든 시대라고 생각했습니다. 엥겔스가 보고 기록했듯, 자본주의의 증식 방식이 이미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요.
5. 물적 토대의 변화와 '소외'의 필연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자기파괴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생산활동을 통해 발생한 잉여가치가 잉여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고 사실상 자본가에게 독점되고 있었거든요. 자본가는 더 큰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서 독차지 하)기 위해 생산수단에 다시 투자합니다. 엥겔스의 아버지처럼 섬유산업 붐이 일어나자 영국에도 지사를 내는 식으로요.
그 결과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기도 하겠지만, 자본가 또한 더 많은 생산수단에 대한 독점권을 획득하게 되죠. 결국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생산수단이 차차 더 적은 사람(a.k.a. 자본가)에게 집중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생산수단을 소유한 이는 경쟁력 있는 가격을 만들기 위해 생산비용을 절감하려 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비용 절감 기술은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으니, 대개 노동자의 임금을 깎아요. 그래도 일 할 사람은 넘쳐나니까요.
그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소비할 이들의 임금이 너무 적어 구매력이 감소하는 속도가 상품의 가격이 떨어지는 속도를 앞지르게 됩니다. 그럼 가격을 더 낮춰야 하니 공장 자동화의 비중을 높입니다. 그럼 아예 구매력을 상실한 실직자들이 양산되겠죠. 자유롭게 방임된 시장은 결국 실패하는 겁니다. 다행히 당시 유럽은 식민지 약탈로 이 문제를 돌파합니다. 약탈을 통해 유럽 내부의 문제를 외부로 전가한 것이죠.
그럼 유럽 자본주의를 사는 사람들은 식민지 개척 덕분에 다행히 모두 살림살이가 나아졌느냐. 그렇지 않았어요. 위기를 극복한 건 자본가들뿐이었죠. 산업화와 도시화로 농촌 경제가 낙후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해 일자리를 찾았지만 열네 시간을 일 해도 끼니를 챙기기 힘들 정도로 임금이 낮았어요.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자리를 찾기 더 힘들었던 여인들은 매춘으로, 부모 없는 아이들은 소매치기로 내몰렸죠.
그러나 경제적 불평등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노동의 '소외'였어요. 노동이 인간 주체성의 주요 근거로 논의되기 시작한 건 로크(이 양반 또 나오네) 이후인데요, 로크 때만 하더라도 '소유를 정당화하는 근거(자연은 공동의 것. but 신체와 노동은 개인의 것. 그러니 노동이 깃든 결과물도 개인의 것)' 정도로 보았던 노동은 헤겔에 이르러 '자기 의식을 형성하고 인식하는 과정'으로 해석됩니다.
헤겔 철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마르크스는 노동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의 정체성은 어떤 노동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잖아요? 농사를 짓는 사람은 농부의, 예술을 하는 사람은 예술가의 인격을 갖게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대량생산구조의 분업화된 노동은 자신의 욕망이 아닌 자본가의 욕망을 대리하는 노동이다보니 노동자는 자신의 일과, 그리고 자신에게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어요.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결국 노동으로 완성되어야 할 인간성은 점점 희박해집니다. 몸을 팔고 정신을 팔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가는 거예요. 그러나 자본가들은 그런 소외된 노동을 이용해 기술을 발전시키고 소비자가 더 부유해졌다고 믿게 할 상품을 생산해내죠. 그러한 생산을 마르크스는 착취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착취는 결국 자본주의 스스로를 먹어 치워 버릴 것이라고 전망했죠. (착취하는 자본가라고 인간성을 지킬 수 있을까요.)
마르크스는 그러한 착취로 벌어지는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건 노동자 계급의 저항과 혁명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한 사회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결정하는 것은 지배계급인데,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인 자본가들은 결코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합의를 보려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그는 외칩니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_『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
5. 비판적 계승의 단절_누가 맑스의 후예인가?
2013년, 유네스코는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제1권의 원본 자료들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Register"로 선정합니다. 아빠 말 안 듣고 혹독한 삶의 역설(엥겔스는 자본의 모순과 싸우기 위해 자본가로서의 삶을 견뎠고, 마르크스는 그렇게 엥겔스가 마련해 준 돈으로 잔인한 가난 속에서도 간신히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어요.)을 견디며 스스로 정한 사명에 평생을 바친 두 남자의 몸부림이 세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작 중 하나로 인정받은 것이죠.
물론 유네스코가 아니더라도 이미 두 사람의 업적은 충분히 인정 받고 있었고 그 영향 또한 엄청났습니다. 마르크스는 생전에 이미 유럽 전체에 자신의 사상을 퍼뜨렸고, 사후 50여년이 지난 뒤엔 전세계의 1/6이 공산주의 국가가 됐었죠. 공산주의 국가가 되지 않은 나라조차 빈부격차의 사회적 책임을 인정하고 국가의 시장 개입과 분배에 대한 의무를 인정하게 됩니다. 서유럽이나 북유럽의 앞선 복지조차 공산주의를 피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어요. 마르크스가 없었다면 사회복지라는 개념 자체가 불가했을 겁니다.
그가 인문학 전체를 재규정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르크스 이후 사람들이 지식인의 사회적 의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거든요. 사변적인 철학은 헤겔에서 끝나요. 헤겔 비판에서 출발하는 '실존 철학'과 '행동 철학'이 현대철학의 주요 흐름인데 전자가 지난 주에 만났던 키에르케고르에서 시작됐다면 후자의 시작점은 마르크스였죠.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단지 세계를 해석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말 속에서 맑시즘 이후 인문학의 변화된 방향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문화예술영역에서도 그의 영향을 받아 모더니즘mordernism이라는 사조가 태동해요. 어쨌든 '모던' 이후의 세계는 마르크스의 영향을 피해간 곳이 거의 없다 하겠는데요, '세계의 절반은 그를 찬양했고, 절반은 그를 못 죽여 안달이었다'는 말도 있었던 만큼 모두가 그를 좋아했던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나치즘의 독일에서 마르크스 주의를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굉장히 하찮게 여겼고, 북한에서도 『자본론』은 금서라고 하네요. 나치즘의 독일과 북한의 공통점은 뭘까요? 그건 각자 생각할 몫으로 남겨두기로 하겠습니다만, 다만, 다만...
다만 마르크스 주의에 대한 보편적 인식과 괴리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 모든 것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일견 슬퍼지기도 하고요. 해방 이후의 굴곡과 분단이 만들어 낸 긴장이 아직도 팽팽하게 우리 사회를 왜곡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우리는 언제쯤 우리를 이루고 있는 것들에 대해 온전히 건강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식민지 경험 이후 제멋대로 단절되어버린 수많은 “비판적 계승”들을 언제쯤 이어붙일 수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북한이나 중국, 베트남, 쿠바같은 공산주의 국가들만이 마르크스의 후예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민주주의와 레닌민주주의 두 줄기로 나뉘는데, 우리 현대사의 비극과 관련된 공산국가들(소련, 중국 등)은 모두 레닌민주주의를 계승한 나라들이었어요. 특히 북한의 경우 '주체사상'을 공식 이념으로 삼으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헌법에서 제거하기까지 했으니 엄밀히 말하면 지구상의 어떤 나라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멀어진 나라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사회민주주의를 계승한 나라가 앞서 언급한 서유럽의 선진국과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입니다. 심지어 고전적 자유주의를 고수하는 미국조차 <Rent>, <Spring Awakening>같은 뮤지컬이나 <Joker>같은 영화를 통해 사회민주주의적 정서를 드러내고 있어요. 우리의 모든 상식은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마르크스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죠. 마르크스주의의 반대편엔 언제나 독재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이 정치나 행정권력에 의한 것이든, 자본에 의한 것이든 말입니다.
5. subtext 소개 및 다음 주 진도
오늘 소개해 드릴 보조 자료는 '팀 던럽'이라는 호주 아저씨가 쓴 『노동 없는 미래』입니다.
사실, '물적 토대의 변화가 역사를 견인한다'고 생각했던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노동자의 의식을 단결시켜 시대 전환을 이루려고 했던 건, 물적 토대의 변화를 기다리기엔 당대의 참혹함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요. 물론 "노동자의 의식 변화=하부 구조의 변화"라는 논리가 있었지만, 그것조차 물적 토대를 변화시킬 주체를 바꾸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가. 일시적 독재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공산국가 초입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리라 예상한(실재 레닌 공산주의를 계승한 국가들에선 모두 독재자가 등장했죠. 소오름) 그 독재가 ‘일시적’일 거란 순진한 기대를 했을까- 하는 허접한 생각이 들기도 했던 것이죠. (마르크스 주의의 한계에 대한 훌륭한 이론들은 이미 풍부하니 각자 찾아 보아요~)
그런데 4차 산업 혁명이 이미 시작되었고 AI혁명이 가져올 특이점이 머지 않았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쯤 다시 마르크스가 떠오르지 뭐예요. 어쩌면 노동자 해방은 공산당 혁명이 아니라, 진정한 물적 토대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이 인간이 끝내 틀리지 않았던 거네? 심지어 80년대만 해도 열역학 제2법칙 운운하며 가능한 소비를 줄이고 개발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인류 멸망을 지연시키는 것이라던 제레미 리프킨조차 『한계비용 제로사회』라는 책을 통해 기술의 미래를 긍정하기 시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한계비용 제로사회』를 소개하려 했으나, 재밌긴 해도 벽돌책 특유의 피로가 농밀했던 기억이 떠올라 번역은 좀 어색한 곳이 있어도 훨씬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골라 보았어요. 거부할 수 없는 하부구조(물적 토대)의 변화를 어떻게 우리에게 이로운 상부구조의 변화로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책이니 틀림없이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다음 주엔 20세기적 상식을 만든 3인방의 나머지 주인공 '다윈'과 '프로이트'까지 읽어 오도록 하겠습니다. 철학자를 소개하는 건 다음 주가 아마 마지막이 될 것 같네요. 벌써부터 감개무량입니다.
아, 그리고
https://youtu.be/E3aFDygvodg?si=EOgceFa0RB0KmcrJ
지난 주에 노래를 소개해 봤더니, 의외로 좋더라고요? (혼자 좋음)
공부하던 시절 세미나실에서 이 노랠 틀어놓고 있었더니, 마침 자본론 스터디를 하고 있던 후배가 스윽 와서 "자본론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노랜데?"라고 잘난척 하던 게 기억나 공유해 봅니다.
루시드 폴의 <사람이었네>입니다.
절반도 안 되는 글에도 하트로 응원해주신 분들 진심으로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응모 이후의 글은 수정되는 줄 알자마자 부놜 업데이트의 꼼수를 시전하고도 약속했던 목요일이 거의 끝나가는 밤 10시쯤 겨우 추가 분량을 올렸는데 며칠 지나 와봤더니 몇 분 오셨다가 실망 하셨는지 그냥 가셨더라고요. ㅠㅠ 정말 죄송해요.
(근데 또 늦을 지도 몰라요 ㅠㅠ 하지만 최선을 다 하겠습니나. )
그럼, 다음 주에 또 만나요.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