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되는 꿈

『소피의 세계』_ 11. '다윈', '프로이트'

by 하소초


0. 운명에 맞서거나, 혹은 숨어들거나

소령의 소설 속 인물에 불과하다는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알베르토는 '자유를 향한 의지'를 내려놓지 않습니다. 초월적인 신의 질서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유 의지'를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처럼요.


설령 자유를 향한 그 모든 시도들이 섭리의 한복판, 운명의 한 조각으로 점령 당할지라도

꿈은 멈추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 전, 생명으로 맺히기 전의 물로부터

마침내 꽃으로


꽃에서 씨앗으로, 씨앗에서 풀로, 풀밭에서 강으로, 강에서 빛으로, 빛에서 소금으로, 소금에서 바다로

바다 위의 별들로, 별에서 달로, 달을 스치는 새가 되어 후두둑 빗방울로, 빗방울에서 돌로,

돌에서 흙으로, 돌과 흙이 산으로, 산에서 냇물로, 냇물에서 강물로, 다시 바다,

바다에서 모래로, 모래에서 파도로, 파도에서 하늘로,

그리고


우주와 생명의 머나먼 무의식 너머


다시, 물이 되는 꿈을요.


출처_www.piqsels.com/



1. 자연주의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대는 소위 자연주의의 시대였습니다. 세계의 모든 현상과 원리는 모두 '자연'을 통해 드러나므로,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곧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라 여기던 시대였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탐구를 통해 숨겨진 자연의 이치를 밝히는 것을 중시했고, 신이나 영혼 같은 초자연적인 힘과 관련된 이야기를 '객관적 진실'로 믿지 않는 사람들 또한 늘어갔어요.


물론 여전히 기독교 문화의 질서와 성경의 문자적 진실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신학의 손바닥 안이라는 듯,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자연신학Natural Theology)가 등장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은 점차 고집스러운 것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날이 새롭게 밝혀지는 과학적 진실에 귀기울이는 사람들에겐 물론이고, 그들 스스로에게도요.


유럽을 점차 부유하게 만들어 준 과학적 진보가 계속되고 있었거든요. 신을 끼워넣지 않으면 연결할 수 없었던 인과의 고리들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가며 인류는 속수무책으로 굴종해야 했던 자연적 힘을 이용하고 개발할 수 있었어요. 결국,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것은 현실의 문제.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분석할 때 더 풍족한 빵과 삶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은 자연주의라는 이름 아래 더 깊은 흐름을 만들고 있었을 겁니다.


자연신학자 윌리엄 페일리의 시계공 유추(시계공의 설계 없이 복잡한 시계를 만들 수 없듯 생명 또한 신이 설계했기에 존재하는 것.)를 비판하는 현대 사회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책


어쨌든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더 이상 신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보이지 않는 힘'에서 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즉 자연, 환경, 역사 같은 것들로 옮겨갔죠. 여전히 교회를 나가고 신 앞에 무릎 꿇더라도 그들을 움직이는 내면의 질서는 이미 자연주의에 포섭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물적 토대의 변화가 의식의 변화를 이끈다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이때 등장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죠.

그리고 그런 마르크스와 다윈Charles Darwin이 동시대를 살아갔던 것 또한 우연이 아니었을 겁니다. 다윈 또한 자연의 거대한 역사에 비추어 다양한 생명체의 존재 원리를 설명한 전형적인 자연주의자였으니까요. 마르크스는 다윈의 이론이 자신과 엥겔스가 세운 이론(역사적 유물론 및 계급투쟁)에 자연사적 토대를 제공한다며 극찬했고, '숭배'한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자신의 필생의 역작(자본론)을 그에게 헌정하기도 했습니다.


그에 대해 다윈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2. 수천 년은 너무 짧다

혹시 소피의 세계 첫머리에 등장했던 질문들 아직 기억나시나요? 크게 두 가지였죠? "너는 누구니?" 그리고 "이 세계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다윈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 문제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해답은 창조론이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다윈의 이론에 기반한 해석을 배웁니다. 생물은 일일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며 조금씩 변해 지금의 다양한 모습에 이른 것이라고요.


인류학자나 생물학자는 되게 싫어한다는 그림. 사실 비슷한 시기에 여러 유인원이 생존경쟁을 했고 사피엔스가 최종승리한 거라고 한다._123rf.com


이제는 너무 대중적인 상식이 되어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이론이지만, 여기엔 단순히 '과학적 증명에 근거한 발상의 전환' 이상의 의의가 있습니다. 진화론으로 인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의 규모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확장되었거든요. 알베르토가 말하듯이 그때까지 유럽인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옛날은 "6천 년 전" 정도였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태초가 그쯤이니까요.


그러나 "우연히 환경에 더 유리한 변이가 돌연 나타나, 그 유리함을 바탕으로 우월한 종족 보존을 하고, 그렇게 여러 세대에 걸쳐 쌓인 변이가 지금의 종의 차이를 만들었다."는 발상이 성립하려면 최소 3억 년은 필요했어요. (지금 우리는 시간의 확장을 거듭하여 몇 억 광년을 계산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다윈으로 인해 우리의 생각이 도달할 수 있는 시간의 영역이 엄청나게 확장된 것이죠.


광산 개발은 지각 깊은 곳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을 보여 주었다. 사진은 미국 뉴멕시코주의 노천 구리광산(19세기 광산 사진은 못 구했어요;;)_내셔널지오그래픽


이 또한 어찌 보면 산업 혁명의 산물이었어요. 공업이 발달하며 공업에 필요한 광물 채취를 위한 광산업이 발달하였는데, 파헤쳐진 땅에서 발견된 의외의 흔적들(조개 화석, 공룡 화석 등)이 이전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땅과 바다의 역사를 드러내면서 지질학도 함께 발달하게 되었거든요. 그것은 여러 식민지에서 발견된 새로운 생명체나 광물들에 대한 학문_박물학과 함께 과학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아이디어들을 제공했죠.


신학교에서 만난 박물학자 헨슬로John Stevens Henslow의 추천(다윈의 아버지는 가업을 잇기엔 도무지 소질이 없어 보이는 다윈_수술 두 번 참관하고 기겁해서 다신 안 들어감_에게 신학교를 추천. 하지만 다윈은 신학 공부보다 박물학자 헨슬로와의 대화로 더 많은 시간을 보냄)의 추천으로 비글호에 오른 다윈이 당대의 지질학자 라이엘Sir Charles Lyell의 『지질학의 원리』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도 같은 배경에서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다윈의 박물학 스승이었던 헨슬로(좌)와 지질학 영웅이었던 라이엘(우)_https://sciencebooks.tistory.com/, 위키백과


지질학과 박물학을 토대로 진화론의 기본 아이디어도 이미 유통되고 있었어요. 다윈의 할아버지(이래즈머스 다윈Erasmus Darwin)부터가 이미 『주노미아Zoonomia』라는 책을 통해 라마르크(Jean-Baptiste Pierre Antoine de Monet, chevalier de Lamarck...와 이름에 쉼표가 있어..)와 유사한 진화 개념을 설명하기도 했을 정도였죠. 멜서스의 『인구론』도 생존 경쟁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었고요.


다윈의 진화론은 그러한 이론들을 자신이 직접 수집한 근거와 연겷시켜 정교하게 수정하고 종합하여 완성한 것이었어요. 그의 치밀한 논증으로 '용불용설(많이 쓰면 많이 발달한다)'을 기반으로 한 기존 진화론의 '획득형질의 유전(발달 된 형질이 유전된다.)'이 수정되었고 덕분에 진화는 신은 물론 생명체의 의지조차 초월하는 단순하고도 집요한 자연적 변화임이 밝혀졌습니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설명한 그림. 획득형질의 유전을 빼고 생각하면 묘하게 설득력 있다. (테니스 선수의 전완근 정도 수준에선 납득이 됨)_금성출판사


비글호나 갈라파고스 제도와 관련된 일화나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저서의 제목도 익숙합니다. 네, 바로 (진화론 아니고요)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이죠. 원제는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입니다. 다윈의 참으로 꼼꼼하고도 소심하며 덕후같은 성격이 드러나는 제목이라 아니 할 수 없겠는데요,


물론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을 요약하고 있는 제목이기도 합니다. 번역하자면, 『자연적인 선택, 또는 생존경쟁에 있어 유리한 종족보존에 의한 종의 기원 』정도가 되겠네요. 다윈은 스스로도 좀 심하다 싶었는지(사실은 책의 내용이 충분히 알려져서 짧은 제목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에 줄였다고 합니다.) 6판 이후부터는 by 뒷부분을 떼고 인쇄했다고 해요.


『종의 기원』초판본 속표지. 중얼중얼 부연 설명을 잇고 또 이어가는 듯한 긴 제목이 인상적이다.._위키백과


여기서 6판? 하고 갸우뚱 하신 분이라면, 『종의 기원』 출판 이후 다윈이 맞닥뜨렸던 비난과 조롱에 대한 이야기도 기억하시는 분일 겁니다. 너는 할아버지쪽이 원숭이 집안이냐 아님 할머니 쪽이냐는 조롱을 당할 정도로 몰렸다는데 6판까지 찍었다는 게 의외이긴 하죠? 비슷한 이유로 갈릴레이가 겪어야했던 유명한 굴욕을 생각하면 더더욱요. 하지만 갈릴레이가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와 19세기는 상황이 많이 달랐습니다.


일단 앞서 밝혔듯 자연주의 시대이기도 했고, 성직자 등의 오래된 기득권층이 아닌 새로운 권력이 주도하던 시대이기도 했거든요.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으로 꾸준히 영향력을 키워온 자본가들이 바로 그들이었죠. 그들에게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은 시장의 경쟁에서 승리한 자신들의 위상을 정당화해주는 이론이었어요. '그래! 실력 있는 내가 잘 사는 건 자연의 이치에 합당한 일이야!', '나 완전 자연주의적이었어!'


수염 셰이딩이 인상적인 허버트 스펜서(갸름하여라)_나무위키


이런 엉뚱한 공감 속에 다윈의 책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어느 곳에서나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다윈의 이론을 기반으로 한 사회학 이론으로 새로이 인기를 얻는 사람이 나올 지경이었죠. 바로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의 사회물리학( 과학혁명과 당시 성행하던 생물학의 영향을 받아 사회조직을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이해하려는 학문)에 다윈의 이론을 접목하여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을 주창한 허버트 스펜서입니다.


우리가 다윈의 진화론 하면 떠올리는 약육강식, 적자생존과 같은 용어는 사실 다 이 사람이 만든 것인데요, 그 중 '적자생존'같은 용어는 다윈도 받아들입니다. (종의 기원 5판부터 이 용어를 채택해요.) 자연 선택의 개념을 더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했대요. 하지만 그런 관용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다윈은 스펜서의 이론을 여러 모로 경계했습니다.


사회진화론은 사회적 약자를 방치하고 그들에 대한 착취를 방임하는 자유 시장을 옹호하는 데 이용되고 있었거든요. 그것은 자본가들의 아전인수 격 해석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스펜서와 자본가, 혹은 정치가 사이에 어떤 유착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그저 스펜서 스스로가 급진적인 개인주의자이자 자유방임 옹호자였기에 개인주의자와 자유방임주의자의 입맛에 딱 맞는 이론이 나왔던 것입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경쟁지상주의에 경도되었던 (왼쪽부터) 후쿠자와 유키치, 량치차오, 박은식_중앙일보, 주간조선, 한국학중앙연구원


하지만 아쉽게도 다윈의 이론은 바로 그러한 개인주의와 자유방임에 대한 열광으로 더 크게 소비됩니다. 심지어 정치가들에겐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받아들여졌죠. 아쉽게도 동아시아의 끝자락, 제국주의의 막차를 탄 일본은 물론이고 그런 일본의 전횡 앞에 놓인 사람들에게조차 『종의 기원』은 수라와 같은 세계 질서를 납득하기 위한 도구로 소모되었습니다.


강한 일본이 약한 조선을 먹는 건 당연해. 그리고 이 세계의 진보를 위해서라도 조선은 일본인이 돼야 한다. 비단 일제의 논리가 아닙니다. 스펜서의 이론은 일제에 침탈 당했던 중국은 물론 조선의 근대지식인에게도 전이돼 나중에 친일로 변절하는 근거로 작용하죠. 비극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아요. 약육강식과 사회진화의 논리는 19세기 말 일본의 교육풍토도 바꾸는데요, 아시다시피 이게 그대로 조선에 도입되잖아요.


그리고 그 논리는 현재 한국인들의 뇌리에 어쩔 수 없는 진실로 박혀 있습니다. 사회의 논리가 그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죠. 저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청산해야 할 가장 뼈아픈 일제의 잔재라고 생각해요. 서구 열강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 마지막 제국주의 국가에게 끝끝내 먹히지 않기 위해서, 허겁지겁 내면화한 다툴 경(競)과, 다툴 쟁(爭)의 끝없는 굴레가요.


종로학원의 입시설명회에 모여든 학부모들. 공동체의 미풍과 양속을 재생산하여 건강한 사회적 협력을 유도하는 교육을 회복하고 싶다면 어른들의 사회가 먼저 변해야 할 것_이데일리


자신의 과학이 그저 과학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던 다윈은 자신의 이론이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것이 누구보다 괴로웠을 겁니다. 그는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지만 나서길 싫어하고 갈등을 피하는 소심한 사람이었거든요. 토론에 참여하거나 연설을 하는 대신 대리인을 세워 의견을 전달하거나 편지를 쓰는 사람이었단 말이에요.

미루고 미루다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아마추어 박물학자이자 다윈과 거래하던 전문 표본 채집가였던 그는 어느날 생물 진화에 대해 다윈의 이론과 거의 동일한 아이디어를 담은 논문을 보내요.)의 편지 이후에야 주변인들(라이엘과 후커)의 도움으로 『종의 기원』을 발표하게 된 것도 자신의 책이 불러 일으킬 사회적(종교적, 정치적) 파장이 걱정돼서 가능하면 부드럽게 다듬고 또 다듬느라 그런 것이었다고 해요.


- 그런 성격을 생각하면 마르크스의 헌정을 거부한 것도 쉽게 이해가 갑니다. 주...주목받기 싫어!


월리스는 이미 지질학계에서 (비글호에서 보낸 다윈의 연구 기록을 족족 발표해버린 헨슬로 때문에 강제로) 저명했던 다윈에게 진화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검증받고 싶어한다._나무위


그러나 사회적 의식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평생 노예제에 반대했고, 제국주의자들의 인종차별적인 생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이었던 그는 자신의 책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일일이 (물론 편지로) 과학적 해명을 하는 과정에서 사회진화론과 자신의 이론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히 그으려 노력합니다. 자신이 차용한 '적자생존'의 의미를 더 저엉확히,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으로요. -_-;;


(다윈이 말한 진화는 사실 미개한 것에서 우월한 것으로 진보한다는 뜻이 아니었어요. 모든 생명체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가장 적절한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뜻이었죠. 다윈은 인간이 물고기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스펜서는 인간이 더 우월하니까 물고기를 낚는다고 생각했겠지만요.)


그럼에도 자신에게서 비롯된 사회적 현상에 대한 부채감이 사라지지 않았던 걸까요. 그는 말년에 발표한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를 통해 인간의 진화에서 협력, 동정심, 도덕적 본능이 얼마나 중요했는지에 대한 의견을 피력합니다. 사회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무자비한 경쟁과는 달리, 약자를 돕는 것이야말로 인간 사회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요.


사실 『종의 기원』을 통해 다윈이 전달하고 싶었던 진짜 메시지는 “작은 생명체라도 큰 연관성 속에서 살펴볼 때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였습니다. 조용하고 유약한 성격의 그였지만, 그는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에 반대하며 주류 기독교 사회를 비판하다가 파문 까지 당한 할아버지를 계승하고 싶었던 건 지도 모르겠네요. "긴 시간 동안 지속된 조그만 변화의 축적"이 결국엔 세상을 바꾸리라는 믿음으로 말이죠.


여차하면 망토 안으로 푹 숨을 것 같은 다윈_ScienceBooks



3. 의식이 전부가 아니다.

드디어 20세기 인물의 등장입니다. 물론 프로이트도 다윈과 마르크스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유년기와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을 발간하던 1899년(20세기를 여는 사상 혁명이 되기를 바라며 1900년 발간으로 인쇄해요.)은 또 다른 세상이었죠. 특히 뭐가 달랐냐면, 영아사망률이 많이 달랐어요. 첫째가 죽을 것을 대비해 둘째, 셋째를 낳는 관습이 점점 사라지고 핵가족화가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핵가족화의 진행은 비단 영아사망률의 감소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농경사회와 달리 도시노동자에게는 자식이 노동력이라기보다 부양해야 할 짐이었기 때문에 많이 낳을 수도 없었던 겁니다. 워낙 월급이 쥐꼬리였으니까요. 피임이 보편화된 시대가 아니었으니 그럼에도 아이들은 태어나곤 했는데 가정의 일원으로 성장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버려지기 일쑤였어요. (올리버 트위스트 기억나시죠?)


런던의 밤문화, 특히 다양한 극장과 매춘 관련 정보를 제공했던 소책자 <스웰스 나이트 가이드>_ 대니얼의 에너지 충전소(네이버 블로그)


일이 그렇게 돌아가면 사회지도층이란 사람들이 뭔가 대책을 좀 세워야 하는데, 노동자들의 게으름과 도덕성만 탓합니다. 특히 도덕을 근거로 매춘을 비난하는데요, 사실 매춘은 각박한 도시에서 최악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약자들, 즉 여성들이 도달한 막장이자 미래가 막막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출구였는데도 불구하고 성욕에 환장한 이들이 번창하는 국가에 끼치는 민폐 정도로만 취급했던 겁니다.


노동자들이 공장의 부품처럼 표준화된 규칙으로 움직여줬으면 했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매춘으로 일탈하며 사회적으로 안정되지 못하는 게 불안했어요. 그들은 노동자들이 적은 임금에 만족하면서도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 지속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해주길 바랐으니까요.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바로 '4인 가족'의 규범입니다. '4인 가족'이야말로 과도한 임금 지출을 유발하지 않으면서도 대를 이어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규모라고 본 것이죠.


4인 가족의 이상은 산업화 시대 가부장적 질서를 상징한다._핀란디아 가구


그리고 그 규범엔 지난 세기의 계몽주의와 한줌 남은 기독교의 도덕주의가 강하게 작용되었죠. 그런데 가족을 신성시 하고 도덕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이런 문화는 성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터부와 절제로 점철된 성규범이 강요된 것이죠. 성은 물론 신성하고 도덕적으로 다뤄져야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도덕주의가 힘없는 이들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당연히 반발이 있었겠죠.


그 대표적인 반발 중 하나가 어쩌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입니다. 그의 이론에 성과 관련된 해석이 유독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죠. 그는 어린 시절 받은 성적 억압에 대한 상처가 무의식의 세계에 남아 우리의 온갖 우연한 행동과 실수에 영향을 미친다고 봤는데요, 이 무의식의 세계를 설정함으로써 프로이트는 인간을 이성적 주체로 여기던 지난 세기까지의 생각에 직격타를 날립니다. (인간은 그렇게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란다)


우리는 모두 날 때부터 타고난 본능적 욕구(원자아_이드id)가 성장하면서 학습한 사회적 규율과 이상적 자아(초자아_슈퍼에고Super ego)에 의해 억압되는 경험을 통해 자아(에고Ego)가 형성되는데, 그 과정에서 좀 폭력적으로 밀려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본능적 욕구를 의식적으로 억압하려다 보니 생기는 문제가 노이로제나 히스테리 같은 정신병이라는 게 프로이트의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그의 치료법은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환자의 이드를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스스로 납득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뭐가 문제였는지 정확히 알면 아무 세포나 공격하는 항암제처럼 스스로에게 가하던 과도한 억압에서 벗어나 문제가 되는 이드만 선택적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었죠.


극단적 현실주의의 세계에서 비현실의 영역을 탐구한『꿈의 해석』초판본 속표지_위키백과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개척은 이성과 심사숙고의 가치만큼이나 자유롭고 자발적인 무의식적 활동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건 예술적으로 좀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는데요, 혹시 천재를 옹호하던 낭만주의의 예술관이 떠오르셨다면 제대로 연결하신 겁니다. 사실 무의식은 낭만주의의 지적 전통이 프로이트 식으로 정립된 결과라고도 볼 수 있거든요. (물론 의사였던 프로이트는 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낭만주의와 거리를 두기는 하지만요.)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혹은 의식의 검열을 거부하는 초현실주의Surrealism 예술도 그로부터 나왔죠. 노동자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밀레나 소외된 계층의 현실에 주목한 고흐에게서 마르크스가 주도하던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찾을 수 있다면, 달리마그리트에게서는 무의식을 탐구하는 프로이트의 짙은 영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문학의 '자동기술법' 같은 작법(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한 앙드레 브루통이 처음 제안했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나 좀 멀게는 1960년대 록씬에 등장한 싸이키델릭Psychedelic도 의식 너머의 세계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무관하지 않죠.


초현실주의 하면 떠오르는 마그리트의 <겨울비>(좌)와 달리의 <기억의 지속>(우)


그러나 프로이트의 업적 중 무엇보다 빛나는 지점은 억압된 욕망을 설정함으로써 인종을 넘어서는 인류의 ‘보편성’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내면에 대한 보편적 원리, 즉 '마음'에 대한 이론은 당시 다윈의 진화론을 왜곡하며 등장했던 우생학적 사상에 간접적으로 타격을 줬거든요. 과학을 나쁘게 이용하는 움직임에 대한 과학적 반격이라고나 할까요?


프로이트는 철학사적으로도 마르크스나 키에르케고르 못지 않은 전환을 가져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 행동의 대부분이 통제 불가능한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칸트에서 헤겔로 이어지며 형성된 이성적 '주체'를 해체했다는 평가를 받거든요. 말실수나 꿈으로 드러나는 언어적 상징을 파고드는 그의 방법론은 언어학적 구조주의와 만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발판이 되는 라캉(그 또한 정신분석학자)의 후기구조주의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의식적 이성'을 근거로 야만으로 치닫고 있던 근대의 정점에서 탈근대_포스트모더니즘의 출구를 발견한 선구자였던 것이죠.


지그문트 프로이트 (언제 봐도 이 사진 너무 멋져요)


4. subtext 소개 및 다음 주 진도

영원히 발전할 것만 같던 자본주의는 1929년 대공황으로 마침내 크게 넘어집니다. 과도한 투기와 신용 팽창, 불공평한 소득 분배, 과잉생산, 보호무역주의의 확산으로 축적된 긴장이 한꺼번에 폭발했죠. 은행이 파산하고 무역이 절반으로 감소했으며 실업률이 치솟고 곳곳에서 빈곤이 심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난세가 영웅을 만드는 법. 다 망했다는 좌절의 늪에서 모두가 허우적 거릴 때 구원자처럼 등장한 이가 있었으니 훗날 '거시경제학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케인즈John Maynard Keynes가 바로 그였습니다. 그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을 통해 대공황의 원인을 분석하고,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과 재정 정책으로 소비를 창출하여 불황에서 빠져나오는 해법을 제시했죠.


1931년, 미국 시카고의 무료 급식소 앞으로 길게 늘어선 줄_위키디피아


그리고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던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가 그 해법을 받아들여 뉴딜 정책을 펼칩니다. 애초부터 애덤 스미스가 주장했지만 무시하고,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까지 해도 모른 척 해오던 정부 개입의 필요성이 드디어 받아들여진 것이죠. 수정 자본주의의 시작이랄까요. 이후 케인즈의 이론은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 정책 방향과 사회 안전망 구축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케인즈의 혁신성은 간단했습니다. 복잡한 수학 공식만으로는, 즉 이성적인 사고방식만으로는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를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어요. 앗 그럼 무엇으로 이해하나? 인간의 비합리적인 심리, 즉 욕망과 공포를 통해 이해해야 한다는 게 케인즈의 생각이었습니다. 누구한테 힌트를 얻었겠습니까? 물론 프로이트죠. 오늘 소개할 보조자료는 바로 그 이야기를 주절주절 풀어낸 책입니다.


출처 : 창비


물론 케인즈 이후에도 케인즈에 맞서는 시장주의자들의 이론이 등장하고, 또 그에 맞서는 케인즈 계승자들의 이론이 등장하고, 지금도 엎치락 뒤치락 하고 있습니다만, 과도한 투기와 신용 팽창, 불공평한 소득 분배, 과잉생산, 보호무역주의의 확산이라는 대공황적 현상이 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당대에 케인즈를 반추하는 독서를 하는 건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인 것 같아요. 사실 이 책은 케인즈의 이론을 소개한다기보다 현대 경제학자(지은이 베르나르 마리스)가 케인즈에 기대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책이니 그리 낡은 관점의 책도 아니기도 하고요. 다소 빡빡한 감이 없지 않은 책이지만 분명 재미 있으실 거예요.


다음 주는, 드디어, 마지막 회차네요.

함께 읽는 책, 『소피의 세계』는 이제 끝까지 다 읽어 오기로 해요.


덕분에 여기까지 왔네요. ㅠㅠ

그럼 다음 주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만나요.


오늘도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해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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