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세계』_ 12. '우리들의 시대'부터 '빅뱅'까지
0. exodus
누구라도 언젠가는 어린 날의 낙원을 벗어나야 하는 것일까요.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늘 곁에 있던 이웃
그리고 엄마, 나의 엄마.
내게는 너무도 익숙하고 친근한 그 모두가
어릴 적부터 내가 뛰놀고 자란
나의 에덴
우리 집 정원 사과나무 밑으로 모였습니다.
아이의 시절을 떠나
이제 막 열다섯의 발걸음을 떼는 내 생일을 축복하기 위해서요.
하지만 오늘따라 그들은 너무 낯설기만 합니다.
사랑과 욕정이 뒤엉키고
편안한 상식을 빼앗긴 분노 속에서
동심은 위태로운 일탈에 취해
마침내 사과나무를 들이받습니다.
가장 이상한 것은,
누구도 이 이상한 현실을 전혀 이상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내 이름은 소피.
덜 익은 사과를 한 입 깨어물 틈도 없이
나는 다시 태어납니다.
토끼 굴 속에 뛰어드는 앨리스처럼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낯설고 불확실하다는 깨달음과
더 없이 흐릿하며, 동시에 명백한 나의 현존을 실감하면서요.
1. 부조리한 현실과 벌레같은 존엄
『소피의 세계』에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명성에 비해 매우 적은 비중으로만 다뤄집니다. (엄청 중요하다고 얘기하는 것 같은데 매우 조금만 언급하고 말죠.) 아마도 책이 출간된 시기가 '니체는 나치에 봉사한 철학자'라는 대중적 오해가 아직 남아 있던 90년대 초라 그런 것 같아요. 그러나 그는 키에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토대를 제공하고(키에르케고르가 개인의 내면적 결단_신앙과 결부된 실존을 강조했다면 니체는 인간 스스로 창조하는 가치를 통한 실존을 추구합니다.) 이전까지의 모든 철학을 해체함으로써 현대 철학의 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사람이랍니다.
격변의 시기(니체 또한 마르크스, 다윈과 함께 19세기를 살았던 인물), 세상은 새로운 질서를 얻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오래된 가치들은 수시로 붕괴되고 있었죠. 문헌학(Philologie)을 전공한 니체에게 그 붕괴는 매우 구체적으로 목격되었을 거예요. 그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를 진단하고 분석한 것이 바로 그의 '해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신은 죽었다."라는 유명한 선언으로 대변되는 그의 해체는 기존에 우리가 진리라고 여기던 종교, 도덕 등 모든 형이상학적 이상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과 함께요.
종교적 세계관과 신앙심을 과학과 이성이 대체하는 세상 속에서, 희생과 복종을 강요하는 기독교적 도덕(니체는 이를 '노예 도덕'이라 부르며 강하게 비판합니다.)은 인간의 본성과 생명력을 억압할 뿐이다. 산업화로 세상은 점점 풍요로워지는데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던 가치관들이 이처럼 제 역할을 못하니 사회는 정신적 빈곤 속에서 점차 공허해진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그저 다 소용 없다며 그저 되는 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기존의 가치를 해체하고 새로운 삶과 의미를 찾아낼 것인가.
니체는 후자를 제안합니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길을 제시한 것이죠. 그 덕에 훗날의 사람들은 그때까지 당연히 옳다고 믿던 것들을 더욱 철두철미하게 돌아보고(해체)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실존주의)하며, 그에 합당한 대안들을 발굴(창조)하는 길을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알베르토가 나열한 신토마스주의, 논리적 경험론, 네오마르크스주의, 신진화론, 더 깊어진 유물론(원자물리학, 생화학), 생태철학, 아주 오래된 미래에서 찾는 대안적 운동, 정보혁명과 세계화가 모두 그렇게 개척된 다양한 길들이라 볼 수 있죠.
그러나 니체의 이러한 철학은 너무 급진적이거나 혹은 너무 어려워서 주목받지 못합니다. 점차 사라져가는 시력 탓에 가능한 간결한 문장으로 쓰다 보니 잠언시(『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특히 그랬어요.) 같은 형식의 글을 쓰게 된 후론 더욱 그랬죠. 하지만 니체는 어떻게든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해설에 해설을 거듭하는 책을 펴냅니다. 덕분에 조금씩 몇몇 비평가들이 니체의 철학을 알아보게 되었고, 아방가르드 운동(기존의 규범을 깨뜨리고 새로운 표현을 실험하는 전위적 운동. 지난 주에 언급한 초현실주의도 아방가르드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어요.)의 확산과 함께 마침내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죠.
하지만 그때엔 이미 니체의 눈병과 광증(뇌연화증으로 인한 조현병 등이 있었던 것 같아요.)이 너무 심해져 있던 시기였어요. 니체는 자신의 유명세와 상업적 성공을 누려보지도 못한 채 의사의 오진과 정신병원의 이상한 치료에 시달리다가 인지능력과 언어능력을 거의 완전히 상실한 채로 가족이 있는 옛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의 인기에서 오는 모든 이익은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가로채죠. 우리가 니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모든 오해를 만들어 낸 여동생은 덕분에 평생을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습니다.
반유대주의자였던 엘리자베스는 오빠가 쓰러져 있는 집의 1층에 니체 아카이브(Nietzsche-Archiv_니체가 남긴 문서를 보관)를 설립하고 니체를 동경하는 사람들을 초대해 사교파티를 열어 돈을 법니다. 2층에 앓아누워 있는 그들의 우상을 슬쩍슬쩍 관람시켜 주기도 하면서요. 뿐만 아니라 아직 미완성인 니체의 원고를 제 입맛에 맞게 반유대주의와 민족주의를 뒷받침인 철학인 것처럼 편집하여 『권력에의 의지』를 출간합니다. 니체의 의도와 거의 정반대로 편집된 이 책으로 그녀는 세 번이나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르기까지 하죠.
2. 자유의 책임
필생의 역작을 쏟아내고도 가족에 의해 가장 모욕적인 여생을 보내야 했던 침대 위의 니체(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 유일한 위안ㅠㅠ)를 생각하면,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카프카(Franz Kafka)의 단편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인데요, 그 역시 어느날 갑자기 벌레가 되어 가족들에게 은폐되어 쓸쓸히 죽어가게 되거든요. 그는 니체처럼 역사에 남을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뭐랄까, 그는 그냥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었어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보험회사 외판원)을 억지로 하며 살던 사람이었죠.
특히 아버지의 빚이 그러한 소외된 노동을 이어가는 가장 큰 이유였는데, 아버지는 벌레가 된(하여 돈을 벌 수 없게 된) 잠자를 보고 공포와 분노에 사로잡혀 사과들을 집어 던집니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잠자의 등에 깊게 박혀 상처를 남기죠. 이 상처가 점차 곪고 악화되는 동안 처음엔 잠자를 동정하던 가족들의 마음도 차차 짜증과 분노, 무관심으로 바뀌어 갑니다. 결국 가족들의 마음을 알게 된 잠자가 삶의 의미를 잃고 죽음을 받아들이자 가족들은 오히려 큰 짐을 던 듯 안도하고 자기들 나름의 미래를 계획한다는 것이 이 소설의 결말이에요.
이 소설이 발표된 건 1915년, 실존주의라는 말도 아직 없을 때였지만 30여년 뒤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에 의해 「변신」은 대표적인 실존주의 문학 작품으로 분류됩니다. 2차 세계 대전의 황망함이 극에 치닫던 1940년대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어느 곳에서나 실존을 회의하던 시기였는데 (우리나라의 50년대 전후 문학에서도 실존주의적 경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죠.) 잠자의 이야기야 말로 우리의 회의적 현실을 일찌기 가장 명징한 상징으로 폭로한 작품이라 본 것이죠. (카프카 또한 1차 세계대전 속에 있었어요.)
좀더 나은 생활을 위해 마음 속에 품은 희망을 저 멀리 미뤄 둔 채 갖은 성실과 충성을 바쳐 굴욕적인 회사 생활에 일상을 헌납하고, 간혹 주어지는 휴일로 피로를 회복한 뒤 좀 더 충실하게 나를 헌납하는 삶. 그렇게 벌어온 돈을 저축하여 만일을 대비합니다.(잠자의 직업이 보험회사 직원이라는 것은 또 얼마나 절묘한가요.) 그러나 그 만일을 대비하는 대가로 잠자의 인생이 어떻게 일그러졌는지 보십시오. 그 부조리는 가족은 물론 잠자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벌레가 되어서도, 자신을 기어코 벌레로 전락시킨 가족의 검소함에 오히려 안도하죠. 벌레가 되어버린 자신을 끝끝내 벌레로 규정하고야 마는 가족을 걱정하면서 말입니다.
사르트르는 현대인의 벌레같은 존엄을 구하는 길은, 어쩌면 벌레가 되어버린 현실을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그 부조리의 자명함을 인정하고, 억울함 속에 은폐된 자유의 숙명을 끝끝내 책임짐으로써 우리의 현존을 창조하는 것이 바로 실존이라고요. 벌레가 되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고 절망할게 아니라, 몸을 뒤집고 숨은 날개를 펼쳐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가족을 떠났다면, 잠자도 자신의 본질이 보험회사 외판원이 아니었음을 깨닫지 않았을까요? 자신이 실은 하늘을 날 수 있는 존재였음에 기뻐하면서요.
하지만 잠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라는 선택의 굴레, 혹은 멍에를 회피하고 끝끝내 인격을 상실합니다. 상황과 몸의 핑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로요. 반면 사르트르와 50여 년간 계약 결혼 관계를 유지했던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자신의 현존을 끝없이 선택하는 삶을 살아냅니다. 그는 소위 '여성'이었지만, 그리고 여전히 여성에게 억압적인 현실 속에 태어났지만 그 현실이 규정하는 여성성에 자신의 본질이 갇혀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어요. 그녀는 남성에게 순종하고 봉사하는 삶을 일일이 거부합니다.
그리고 있지도 않은 본질을 근거로 객체가 되어버린 여성, 즉 사회적 억압을 핑계로 선택의 책임을 포기하고, 결국 인격을 상실한 여성들이 오히려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에 참여한다(많은 경우 가부장제의 가장 강력한 수호자가 '시어머니'인 것처럼요.)는 날카로운 지적(『제2의 성』)을 통해 현대 페미니즘의 기초를 마련하죠. 그런데 본질적으로 '권력과 억압'을 다루는 페미니즘의 특성(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이 자꾸 곡해되는 이유가 아닐까요.) 때문일까요. 이 지적은 꼭 여성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 성찰을 제공합니다.
있지도 않은 본질을 근거로 객체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애국과 신앙을 참위(僭位)하며 국가와 종교의 실존마저 뒤흔드는 작금의 상황에 그 성찰은 더욱 절실합니다. 권력의 강압을 핑계로 자신이 짊어진 선택의 책임을 포기하고 민주제를 억압하는 구조에 참여했던 이들 또한 인격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상실을 은폐한들 상실된 인격이 독립될 수 있는 것일까요? 은폐하려 하면 할수록 더 뚜렷이 드러나는 상실이 허무할 뿐인데, 그들은 언제쯤 벌레처럼 버둥거리는 자신들의 우스꽝스러운 실존을 자각할 수 있을까요?
3. 우리 또한 별들의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는 싯귀를 곱씹습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항상 어떤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의식이 지닌 숙명(지향성intentionalite)이며, 우리는 그 숙명을 근거로 세계와 관계 맺고 우리의 본질을 만들어는 것이라면, 그들과 더불어 눈 그친 길을 함께 걸으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능동적인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몇 번을 밀어올려도 또 다시 굴러 떨어지는 돌처럼 자유는 또 다시 선택을 강요합니다. 형벌같은 실존을 다시 밀어 올릴래? 아님 그냥 현존을 포기해 버릴래? 이 밑도 끝도 없는 부조리 속에서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돌을 밀어올리는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자칫 확신어린 분노로 섣불리 우월해지지 않도록, 그리하여 슬픔의 가장 또렷한 본질인 '평등'을 잊지 않도록, 골똘히 균형을 잡으면서요.
지난 12주 간의 독서가 그러한 균형 잡기와 바닥까지 굴러 떨어진 돌의 뒤편에 다시 설 용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길 바랄 뿐입니다. 비록 폭발과 응축을 반복하는 우주의 긴 호흡에서 끝없이 멀어지다 다시 돌진하듯 만나길 반복하는 먼지에 불과할지라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지향을 기억한다면 그 와중의 어느 곳에서라도 어쩌면 우리는 별이 되어 빛을 낼 수도 있겠죠.
언젠가, 밤하늘 가득한 별들의 과거 속에서 미래를 헤아리는 누군가에게
예언으로 반짝일 지도 모를, 빛을요.
4. 마지막 subtext_우리가 만든 세상을 보라
어쩌다보니 시리즈의 매회마다 90년대 가요(5화 제외)에서 제목을 끌어오기도 한 만큼 마지막은 꼭 90년대 가요 앨범을 subtext로 소개하고 싶었는데요, 여러 모로 고민한 끝에 결국 선택한 음반은, 바로바로...혼자 신났네...
1995년에 발매된 넥스트의 3집『The Return of N.EX.T Part 2: World』입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이 앨범을 택했는데요,
첫 번째는 이 앨범을 진두지휘한 신해철이 철학도(물론 졸업은 못했지만)였다는 점이에요. 방송에서 보여준 저항적 이미지들 때문에 날티 나는 깐돌이 정도로 기억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는 사실 신부를 꿈꿨던 독실한 신앙인이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 분석철학의 창시자)에 심취한 철학도였습니다. 후에 러셀의 제자였던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을 딴 밴드를 결성한 것도 이러한 내력과 무관하진 않겠죠. 그리고 그러한 내력 때문인지, 그가 쓴 가사는 아주 초기작부터 철학적 혹은 중2병적인 요소가 많아요.
두 번째는 '풍부함' 입니다. 일단 곡 수가 굉장히 많은데요, 그런데 그 각 곡의 장르가 거의 다 다릅니다. 혹자는 이 앨범의 잡탕스러움을 비꼬거나 비판하기도 하는데, "N.EX.T"라는 팀명 자체가 "New Experiment Team(새로운 실험을 하는 팀)"의 약자예요. 데뷔 앨범부터 테크노와 록을 결합한 생소한 사운드를 추구하며 그 성격을 분명히 한 바가 있죠. 이 앨범 또한 헤비메탈을 중심으로 뉴에이지, 어쿠스틱, 발라드, 아카펠라, 테크노, 일렉트로닉, 하드록, 국악 등 온갖 장르가 망라되어 있어요. 그 다양한 곡들이 당시 한국에서 듣기 힘든 퀄리티의 녹음과 믹싱으로 완성되어 지금 들어도 후지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쥐뿔도 모르는 음악적 풍부함 때문에 이 앨범을 택했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앨범엔 해방 후 처음으로 풍요의 시대(90년대)를 맞이한, 20세기 말의 대한민국을 향해 던지는 질문들이 가득하거든요. 근대화, 서구중심주의, 자본주의, 전쟁, 낙태, 동성동본 결혼, 종교를 비롯해 오늘의 주제였던 실존(모성과 유년의 추억이 기계적 세계관과 자본의 억압에 의해 단절되는 비극을 한국적 소재들로 풀어내는 스토리텔링이 일품입니다.)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유효한 한국적 화두들이 그야말로 풍부하게 포진되어 있어요.
앨범의 서곡인 <유년의 끝>은 억압적 세계의 일원이 된 어른이 돌아갈 수 없는 순수한 시절과의 단절을 담담히 고백하는 곡입니다. 7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의 풍경 속에 어린 날의 순수를 녹여낸 글이 아름답죠. 유년의 끝을 떠나 힐데를 만나러 간 소피를 응원하고 동감하는 마음을 담아, 그 가사를 공유하는 것으로 오늘은 마무리 하겠습니다.
흙먼지 자욱한 찻길을 건너
숨가쁘게 언덕길을 올라가면
단추공장이 보이는 아카시아 나무 그늘 아래에
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멍가게 옆 복개천 공사장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전부였던 시절
뿌연 매연 사이로 보이는 세상을
우리는 가슴 두근거리며 동경했었다.
이제 타협과 길들여짐에 대한 약속을 통행세로 내고
나는 세계의 문을 지나왔다.
그리고 너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문의 저편.
내 유년의 끝 저편에 남아 있다.
- <세계의 문> part1. 유년의 끝 전문

다음 주 outro에서 마지막 인사 나눠요.
늘 고맙습니다.
※ 3단락은 어제까지만 해도 outro를 의식해서 생략했다고 안내한 내용인데, 다시 보니 제목과 내용의 괴리가 너무 커서 조금 수정하여 다시 올립니다. (늘 그렇듯이 다른 부분들도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수정하고 있어요. ㅠㅠ "낭만에 대하여" 이후부턴 다 되더라고요.) 먼저 읽어 보신 분들 죄송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