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ro

『소피의 세계』를 덮으며

by 하소초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게시물이라는 생각에 자꾸 돌아보다 보니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돌아보니 진저리가 쳐지는 3개월이었어요...


이런 말밖에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


그래서 원래 계획했던 이야기들은 다 접어두고

(본래 ‘저는 철학이랑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에요. 책은 좋아하지만 잘 읽지는 않죠.‘ ’ 어릴 적 좋아하던 가수들이 저에겐 첫 철학자였어요.‘ ‘권위 없는 시대에 어울리는 상식의 부재…’등등 구구절절 거창한 욕심을 잔뜩 낸 개요가 있었답니다… 하지만…)

아예 딴 얘기를 해볼까 해요. 이를테면,


첫사랑 이야기? 안 물어본 거 알아요...








그 사람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어요. (안 물어봐도 막 밀어붙임)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이었죠.


저 역시 간식도 얻어먹고 인형극도 보기 위해 열심히 교회를 다닌 시절이 있었습니다만, 연애를 하던 당시는 한창 시니컬한 이십 대 초반이었던지라 꼬박꼬박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어찌 낼 지 고민하는 연인이 어리석어 보였답니다. 간절한 요청으로 찾아간 부흥회에서는 현기증이 느껴지기까지 했죠.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우연찮게 신청하게 된 수업(만일을 위해 교직 이수라도 해두라는 부모님의 풀 죽은 목소리에 못이겨…_결국 교직 이수는 못했어요…)에서 나름의 돌파구를 찾게 되었답니다. <교육철학사>라는 제목의 수업이었는데, 서양 교육사 부분에서 교회와 기독교 얘기가 엄청 나오는 거예요. 두 눈이 번쩍 뜨였죠. 오오, 기독교 완전 매력적인 거였네? 하는 생각도 들고, 그 사람도 이런 거 알고 있나? 이런 거 알고 교회 그렇게 열심히 다니나? 하는 교만한 마음도 함께 생겼어요.


그런 교만한 마음을 한켠에 두고 다음번엔 서양사 수업을 신청해 듣고, 동양철학 수업도 듣고, 한국 교회의 정착을 다룬 논문도 찾아보고, 정신을 차려 보니 교양을 들으러 다니는지 도서관에 놀러 다니는지 모를 학교 생활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주워들은 내용을 떠들어 대면 그 사람은 그저 슬픈 표정을 짓곤 했답니다.


맞아요. 제 얘기의 핵심은 언제나 '한국의 주류 교회는 기독교를 왜곡하고 있다.'에 초점이 맞춰져 있곤 했거든요. 그 사람을 위한다면서 결국 그 사람을 공격하고 있었던 거예요. 너는 그런 교회를 다니고 있어. 안 그런 교회도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나에게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 사람에게 소중한 전통과 문화를 함부로 비하하고, 솔직히, 함부로 대했습니다.


오래전에 헤어졌지만, 그때의 내 태도에 대해 늘 부끄러운 마음을 지니고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좀 더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며 아무리 미화해 보아도, 돌아보니 결국 연인을 이겨먹고 싶은 유치한 마음에 불과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지금도 그렇지만) 뭘 그렇게 제대로 알았던 것도 아니었어요.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죠.


그럼에도 염치없게, 이렇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 사람에게 미안해할 자격도 이제는 없고, 감사하는 마음도 모두 부질없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그 미욱한 열정으로 시작한 독서들이 이후에도 제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니까요.


우리 사회에 깃든 왜곡된 근대를 반성하는 책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그 왜곡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선 근대화 혹은 세계화의 다른 이름인 서구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래서 (세계사라는 제목으로 제공되는 게 고까워) 등한시했던 서양사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어린 시절 엄두도 못 내던 『소피의 세계』를 어느 날 덥석 집어 들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그 영향의 연장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서툰 지식을 휘둘러 상처 줬던 미안함을 어떻게든 정당화해보고 싶어서, 좀 지나서는 또다시 그렇게 상처 주며 의기양양한 어리석음을 되풀이할까 두려워서, 더 지나서는 둘이나 셋을 알아도 놓치기 쉬운 하나를 또 지나칠까 두려워서… 자꾸 날 비춰 볼 거울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렇다고 오랜만에 꺼내든 『소피의 세계』를 그때처럼 밀도 있게 읽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단지 오랫동안 놓고 있었던 읽기와 쓰기를 한 번에 연습해 볼 요량으로 “독후감”이라는 요령을 택한 것뿐이었죠. 처음 읽을 때 발제처럼 요약해 둔 문서도 남아 있어 그걸 대강 수정하며 감을 잡아 보자 하는 쉬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사실 그게 주된 마음이었음...)


그런데 웬걸. 일은 점점 꼬여만 갔습니다. 원흉은 AI였어요. 3화쯤 돼서, 재미 삼아 쓰고 싶은 내 해석이 적절한지 무심코 작업표시줄에 있는 copilot한테 물어봤는데 대답이 너무 찰진 거예요. 그래서 그럼 이건? 요건? 이렇게 이해해도 되는 거야? 하는 등의 질문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기 시작했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gemini와 chat gpt, 심지어 perplexity까지 띄워 놓고 교차 질문을 하고 있더군요.


신세계였어요.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다 무료버전이었는데도 나누는 이야기가 풍부했고, 교차 질문을 통해 넷 중 무언가가 틀렸다는 게 드러날 때나 예상했던 연관성이 역시나 맞아떨어졌을 때의 쾌감이 상당했죠. 오랜만에 스터디하는 기분이 나더라고요. 그것도 명민하고 공손한 (그러나 틈만 나면 넌지시 결제를 제안하는) 선생님들과 함께.


하지만 동시에 '지식습득이 너무도 간단하구나.' 하는 황망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피의 세계』의 비밀스런 플롯과 결말, 심지어 그것들이 갖는 의미까지 차례로 검색해 보았는데 아무렇지 않게 다 알려주는 걸 보고 우두망찰 충격도 받았죠. 이게 뭐야, 나 지금까지 뭐 하고 있었던 거지? 아니 그런 것보다도 이런 식이라면 이제 누가 책을 읽나?


그런 마음이 드니까 오기가 생기더군요. 좋아, 그렇다면 철저히 이용해 주지. 그런 마음으로 더 적극적으로 질문을 만들었어요. 답변을 종합하고 내 이해가 맞는지 확인하고, 그걸 바탕으로 만든 내 문장이 타당한지 확인했죠. 적어도 검색으로 요약되지 않는, 일반화되지 않는 독서 기록을 남겨보자는 생각으로요. 그러다 보니, 어쩌면 이것이 이 시대에 어울리는 독서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차피 모든 독서는 결국 창작이니까요. 우리는 무엇을 읽든 그것을 내 언어로 재구성하며 비로소 내 것으로 만들잖아요. 그 과정을 더 정교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대규모 언어 모델(LLM)은 분명히 더 양질의 독서를 가능하게 해 주는 면이 있었어요. 오히려 주체적인 독서를 유발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죠.


같은 책을 읽으며 AI에게 던진 질문 목록들을 공유하고 독서를 확장해 가는, 그런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는 무한 긍정 회로를 돌려 보기도 했답니다. 가장 능동적인 독자는 쓰는 사람이니, 그 최전방의 매체로 브런치가 기여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나 좀 의미 있는 곳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시작한 듯? 하면서요. (네...병입니다...그러려니 해주세요...)


그 생각을 너무 늦게 해서, 이번 독서에서는 미처 질문 목록을 정리해 보지 못해 아쉬워요. (ㅠㅠ 그나마 남아 있는 건 완전 중구난방 개판...) 하지만 다음 독서부터는 꼭 시도해 보려고요. 읽어 주시는 분이 있다면 말입니다.






난데없이 고된 작업이 된 이번 독서도 사실 그 덕에 이어올 수 있었으니까요.


부족하고 수다스런 글을 (아마도) 끝까지 읽어주시고 몇 번이나 라이킷까지 남겨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응원받는 기분을 느껴본 게 정말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남들은 얼마 안 되는 라이킷에 오바한다고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매번 정말 크나큰 상이었답니다.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을 담아

다음 독서는 한창 잘나가는 K-Culture 열풍에 나도 한번 편승해 보자는 의미에서

'한국 소설 다시 읽기'를 한 번 해 볼 예정이에요.


홧김에 산 전집이 십수 년째 이렇게 읽히지 못하고 있거든요..…


구체적인 주제가 정해지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더워지기 시작할 때쯤엔 다시 만날 수 있겠죠? (다시 만나 주세요. 제발 ㅠㅠ)


그럼, 그때까지 모두들 몸 건강히, 잘 지내기로 해요.

고마웠어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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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화요일에 연재 예정이라는 안내가 맘에 걸려서 덧붙여요. ;;

연재 종료 버튼이 안 눌러져서 연재중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첫 번째 한 권 읽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다음 독서는 새 브런치북으로 시작할 거예요.)
이 브런치북에서 다음 화 연재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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