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y's Fruit Heaven
제법 뜨거운 낮이었다.
가게를 나서자마자 숨을 들이마시기도 전에 따가운 햇볕이 얼굴을 감싸 안았다.
공기는 뜨겁게 달궈져 있었고 내리쬐는 햇볕이 살을 따갑게 태웠다.
거리에는 그늘을 찾는 사람들이 더러 보였고, 한쪽에서는 작은 오토바이들이 천천히 지나가며 열기를 가르고 있었다.
눈부신 도로 위로는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우리는 미리 찾아두었던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더위를 피할 시원한 공간이 간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얼룩진 나의 흰 티셔츠를 닦을 곳도 필요했다.
식사 중 튄 빨간 국물 자국이 마치 작은 낙인처럼 눈에 밟혔다.
아주 작은 점 몇 개였지만 종일 신경 쓰일 것이 뻔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괜찮은 카페를 발견했다.
한국인들에게도 꽤 평이 좋은 카페였고 사진 속 내부도 깔끔해 보였다.
분명 그럴듯한 모양새의 화장실도 갖추고 있으리라.
잠시 후, 우리가 도착한 곳은 ‘노이스 프루트 헤븐’이라는 카페였다.
아직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상큼한 과일 향이 공기를 가득 채웠다.
‘푸르트 헤븐’이라는 이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매장 앞에는 싱싱한 열대 과일들이 탐스럽게 쌓여 있었고 그 모습은 과일 가게를 방불케 했다.
붉게 속을 드러낸 용과, 노란 파파야와 망고, 큼직한 아보카도가 반짝이는 햇살을 받아 더욱 선명한 색을 띠고 있었다.
주문대 너머로는 직원들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과일을 손질하고 있었다.
칼끝이 과일 표면을 매끄럽게 가르며 지나갔고 그 속살이 단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곱게 갈린 주스 위에는 과일 조각들이 한 움큼씩 올라갔다.
컵 하나에 담긴 알록달록한 색의 신선함을 눈으로 먼저 맛보게 해 주었다.
우리는 각자 좋아하는 과일을 골라 주문을 마친 뒤, 매장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단순히 음료만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었다.
한쪽에는 작은 소품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알록달록한 천으로 만든 가방들, 손바느질로 완성된 필통, 매끄럽게 깎인 나무 열쇠고리들.
이국적인 패턴이 더해진 물건들이 여행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희는 그 앞에 오랜 시간 머물며 한참이나 물건들을 살폈다.
잠시 후, 주문한 음료들이 나왔다.
대나무 껍질로 만든 컵홀더가 함께 씌워져 있었다.
같은 재질의 손잡이까지 함께 있어 들고 다니기에도 간편해 보였다.
소재 특유의 거친 질감이 손 끝에 느껴졌다. 컵 안에는 선명하고 맑은 색의 과일 주스가 가득 차 있었고 그 위로는 신선한 망고와 키위, 바나나 조각이 소복하게 얹어져 있었다.
한 모금 버금자 달콤함이 혀끝을 감쌌다.
과일 본연의 깊은 맛이 살아 있었고 단맛 또한 과하지 않았다.
신선한 열대의 맛이 입안에서 천천히 퍼졌다.
우리는 밖이 보이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음료를 마셨다.
문밖으로는 여전히 강렬한 햇볕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민정이는 사진을 정리하고 민아는 음료에 집중하고 있었다.
세희는 여전히 소품을 구경하는 중이었고.
뜨거운 오후의 공기 속에서 우리는 여유롭게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노곤해지는 것도 잠시, 세희와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있는 화장실은 예상대로 깔끔했다.
동남아의 로컬 가게에서는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청결함이었다.
나는 얼룩진 티셔츠를 벗어 세희에게 건넸다.
세희는 밖에 있는 수전에서 비누를 묻혀 조심스레 얼룩을 문질렀다.
얼룩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지 한참 동안 물소리만 들려왔다.
“잘 안 지워져도 괜찮아..”
덤덤하게 말을 건넸지만 세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대충 끝낼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
그러곤 더욱 꼼꼼하게 얼룩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결국 10분쯤 지나, 뿌듯한 표정으로 세희가 젖은 옷을 내밀었다.
흰 티셔츠 위의 붉은 점들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작은 감탄을 내뱉으며 축축한 옷을 받아 들었다.
이미 여러 번의 물놀이를 통해 젖은 옷을 입는 것도 익숙해진 참이었다.
어차피 이토록 뜨거운 날씨라면 옷은 금세 마를 터였다.
카페를 나오자 여전히 공기는 뜨거웠다.
하지만 조금 전 보다 해의 기세가 한풀 꺾인 듯했다.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의 목적지는 ‘씨 사켓 사원’이었다.
거리를 따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낮은 건물들, 가게 앞에 나란히 놓인 테이블과 의자들, 간간히 지나는 오토바이와 자동차들.
이국적인 풍경들이 이젠 조금씩 익숙하게 보인다는 것을 느꼈다.
떠날 때가 가까워졌다는 뜻이겠지.
사원으로 가는 길, 대부분의 건물들은 관리가 잘 되어 보이지 않았다.
건물 틈 사이로 자라난 풀들이 건물들과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잿빛 풍경 속에서 한 노인이 기타를 치고 있었다.
허름한 차림으로, 가게 앞의 작은 의자에 앉아 기타를 튕기고 있었다.
손끝에서 울리는 멜로디가 조용한 거리 위로 흘러나왔다.
노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기타 줄을 튕기는 손 끝은 익숙한 길을 찾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선율만으로도 충분했다.
노래는 길거리에 두툼하게 깔린 햇볕 위를 가볍게 떠다니는 듯했고, 불어오는 바람은 그 노래를 멀리까지 실어 날랐다.
아 평범한 거리가 작은 무대가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무대 위를 걷는 행인이자 노인의 노래를 듣는 관객이었다.
노래에 맞춰 흔들리는 나뭇잎, 서늘한 그늘 아래 앉아 쉬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저 멀리 햇살이 만들어낸 선명한 그림자들.
노인의 노래와 미소, 춤추듯 움직이는 손가락이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졌다.
하나의 이야기.
그들의 삶이라는 이야기 속에 이방인인 우리들까지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어쩐지 풍경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잿빛으로 보이던 풍경들이 오히려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는 점차 멀어지는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걸었다.
언젠가 이곳을 다시 떠올린다면 뜨거운 바람과 함께 노인의 노래가 함께 들려올 것이다.
우리의 걸음은 이 풍경을 떠나고 있었지만 그 멜로디는 우리의 여행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