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끝자락
테이블에 빼곡히 덮여있던 그릇들이 비워지고 난 뒤, 우리는 자연스럽게 야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깊어가는 비엔티안의 밤, 그 한가운데에서 시장은 찬란한 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노점들은 저마다의 불빛을 밝히며 우리를 맞았다.
그 사이를 바람처럼 스쳐가는 사람들, 어깨를 부딪치며 오가는 발걸음들이 밤공기 속에서 하나의 흐름이 되어 흘렀다.
동남아의 흔한 야시장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발걸음을 옮길수록 어디선가 익숙한 온기가 전해졌다.
반짝이는 기념품이나 화려한 옷들보다는 삶에 꼭 필요한 물건들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헝겊으로 만든 커튼과 손때 묻은 나무 수저, 낡은 라디오와 작은 전등까지.
마치 오래된 재래시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시장 안에는 여행객들만큼이나 현지인들도 많았다.
야시장 한편에서는 몇 년이나 되었을지 모를 미싱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천을 꿰매고 있었고 맞은편에서는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할머니가 천천히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드르륵 소리와 부채가 흔들리는 소리가 섞여 밤의 숨결이 되었다.
“여기 혹시 동대문 시장인가?”
내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보다는 현지인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는 공간이었다.
바쁜 걸음으로 지나치는 사람들 손에는 생필품이 한가득 들려 있었고 노점 주인들은 물건을 팔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행지의 한복판에서 마주한 이 평범한 풍경이 묘하게 마음을 울렸다.
여행자인 우리는 이곳을 스쳐 지나가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내일도, 그다음 날도 같은 자리에서 삶을 이어갈 것이다.
우리는 시장의 흐름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야시장의 길은 끝없이 이어졌고 갈림길이 나오면 더 끌리는 길을 따라 발길을 옮겼다.
반짝이는 액세서리부터 티셔츠, 속옷과 신발, 장난감까지.
가판대마다 각자의 색을 지닌 물건들이 조용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지갑 속에 남아 있는 돈을 모아 반팔 티셔츠를 몇 장 더 골랐다.
알 수 없는 언어가 새겨진 투박한 디자인, 어딘지 촌스러운 색감, 손으로 눌러 접힌 자국들까지.
이 티셔츠들이 지금은 평범한 옷일 뿐이지만, 시간이 지난 후엔 여행의 한 조각이 될 것이다.
언젠가 옷장에서 이 옷을 꺼내 입을 때, 나는 이 밤을 다시 떠올리게 되겠지.
여행의 흔적을 품은 물건들은 시간이 지나도 그 순간을 기억하게 해 줄 테니까.
야시장을 빠져나올 무렵, 마지막으로 생과일주스를 한 잔씩 사기로 했다.
동남아 여행의 필수코스이자 예의였다.
가지런히 세워진 믹서기 옆에는 거대한 코코넛부터 짙은 붉은빛의 용과와 샛노란 망고까지, 온갖 열대과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각자의 취향껏 고른 음료를 받아 들고 한입 머금은 민정이가 말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제일 그리울 맛이야.”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료를 한 입 들이키자 부드러운 아보카도의 풍미가 입안 가득 퍼졌다.
무겁고 진한 음료는 혀끝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한국에서도 아보카도 주스나 망고주스는 마실 수 있을 테지만 이곳에서처럼 싱그럽고 짙은 맛은 아닐 것이다.
여행지에서의 맛은 언제나 현실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된다.
그것이 단순히 신선함 때문인지, 혹은 이곳의 공기와 분위기가 더해져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국적인 풍미 속에서 문득, 이곳에서 보낸 날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처음 도착했던 날의 설렘, 골목길을 누비며 마주했던 낯선 풍경들, 새벽빛을 받으며 했던 산책, 내리던 빗속을 뛰어다녔던 일들까지.
모든 순간이 또렷했지만 동시에 흘러가는 물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골목길이 점점 어두워졌다.
중심가의 빛에서 멀어지고 조용한 거리 위에 가로등 불빛이 간간히 길을 비추고 있었다.
민아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걷던 때에, 잔뜩 겁을 먹은 민정이와 세희가 빠른 걸음으로 우리 앞으로 걸어왔다.
“뒤에서 자꾸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아…”
세희가 말했다.
떨리는 목소리, 긴장한 얼굴. 나는 티 나지 않게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 흐릿한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우리와 같은 속도로 걸어오는 누군가.
낮게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왔고 우리와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다.
민아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스쳤다.
다행인 것은 조금만 더 가면 우리의 숙소가 나온다는 것.
다 함께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 걸었다.
저 멀리서 우리 숙소의 불빛이 보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걸어가던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참, 같은 한국인들끼리 왜 그래요~”
낯익은 언어에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작은 체구에 모자를 푹 눌러쓴 아저씨가 웃으며 우릴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니 같은 숙소에 묵고 있는 것 같았다.
“아, 계속 따라오셔서 저희 너무 놀랐어요…”
긴장이 풀리자 미안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그제야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여행자로 보였지만 그의 얼굴과 주름에서 세월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모자. 가만히 보니, 모자의 앞면에는 선명한 한국어가 쓰여 있었다.
‘독도는 우리 땅.’
그는 한참 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어제, 라오스에 도착했다고 했다.
그의 모자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우리에게 말했다.
“오늘이 8월 15일이라서 쓴 거예요.”
아, 오늘이 광복절이었구나.
여행에 빠져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광복절을 맞아 이 모자를 썼다고 했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오래된 여행자, 그리고 여전히 길 위에 있는 사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랑하는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은 빛이 난다.
그의 옷차림은 소박했지만 빛나고 있었다.
그의 다홍색 옷보다 더 선명하게.
더 짙고 더 반짝이는 청춘의 빛깔이었다.
비엔티안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이 여행의 마지막 일정까지 끝이 났다.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배웅하는 듯한 바람, 여전히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가로등, 거리에서 들려오는 낮고 평온한 풀벌레 소리까지.
이 밤의 모든 것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캐리어를 열었다.
각자 사 온 짐을 꾸겨 넣고 짐을 정리했다.
이제 이 캐리어를 다시 열게 될 때엔 한국에 도착한 후 일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여행이란 결국 끝이 있어야 온전해지는 법이니까.
우리의 여행은 그렇게, 서서히 끝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