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_명예 라오인 할아버지

마지막 저녁식사

by 한경환

고즈넉했던 오후가 서서히 저물어갔다.

팍슨 라오스를 나서자, 저만치 걸쳐 있던 태양이 조금씩 기울며 하늘을 붉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은 마치 서서히 익어가는 과일처럼 깊은 색을 더해갔다.

처음엔 옅은 복숭아빛이던 하늘이 점점 붉고 짙어지더니 이윽고 금빛과 자줏빛이 섞인 부드러운 단면을 드러냈다.

익어가는 청춘 같다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 덜 여문 시간들이 하루하루 빛깔을 더하며 천천히 무르익고, 결국 자신만의 색으로 빛나는 것처럼.


바람이 천천히 불어와 달아오른 피부를 식혔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고, 먼발치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노을을 바라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택시로 향했다.


차창 너머로 비엔티안의 풍경이 흘러갔다.

낮동안의 정적이 걷히고 도시가 조금씩 활기를 찾고 있었다.

길가의 노점들은 등을 밝히고 있었고, 연기 속에서 익어가는 고기 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졌다.

퇴근길에 오른 사람들의 표정은 하루를 끝내는 평온함으로 가득했고 오토바이들은 좁은 골목을 따라 재빠르게 지나갔다.

가게마다 새어 나오는 음악이 거리 곳곳에 울려 퍼졌다.

저마다의 일상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들의 일상 속에서 우리가 읽어가는 이야기가 마지막 챕터를 향해 넘겨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익숙한 거리에 도착했다.

첫날 머무르던 호텔 옆, 처음 마사지를 받았던 곳이었다.

다시 올 수 있을까 싶었는데, 결국 마지막 날에 이곳에 돌아올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은은한 아로마 향이 코끝을 스쳤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다를 바 없는 공기, 같은 음악, 변함없는 조명의 따스함.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 평범한 모든 것들이 더욱 선명하게 와닿았다.

평범했던 풍경이 아쉬움 속에서 더욱 또렷해지는 것처럼.


우리는 첫날과 같은 코스를 골랐다.

부드러운 손길로 발을 씻은 뒤 2층으로 올라갔다.

거대한 프리사이즈 바지를 받아 들고는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갈아입었다.

이윽고 마사지가 시작되었다.

마사지사의 손길이 가볍게 어깨를 스쳤다.

마치 나비가 내려앉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얇게 드리워진 커튼 너머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윽!”

“으…아…”


누군가의 피로가 조용히 풀려가는 소리.

여행으로 단단해진 근육이 서서히 이완되며 긴장을 내려놓는 순간.

조용히 흐르는 음악 위로 느긋한 허브향이 올라왔다.

바깥은 여전히 분주하게 흘러가고 있을 테지만 이곳의 시간은 오로지 우리만을 위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마사지를 마치고 나서 우리는 한결 가벼워진 몸을 이끌고 저녁을 먹으러 이동했다.

마지막 목적지인 야시장 입구 근처에서 ‘Delicious Street Food’라는 간판을 발견했다.

직관적인 이름처럼 가게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 역시 군더더기 없이 강렬했다.

기름과 향신료가 어우러진 고소한 냄새, 뜨거운 팬 위에서 지글거리며 익어가는 고기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져 나왔다.

우리는 홀린 듯 가게 앞의 빈자리에 앉았다.

여행객보다는 현지인을 위한 식당이었던 듯, 메뉴판에 익숙한 글자가 단 한자도 없었다.

그림을 보고 골라야 하나 싶어 한참을 바라보던 차에 옆자리에 혼자 앉아 있던 외국인 할아버지가 눈에 띄었다.


“Excuse me, that looks delicious. What is it?”


자신 앞의 접시에 집중하던 그가 고개를 들며 웃었다.


“Oh, this? One of the best dishes here. You should try it.”


그는 메뉴판의 다섯 번째 메뉴를 가리켰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메뉴에 대해 회의를 시작했다.

라오스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아무렇게나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가 바로 음식을 주문하지 않은 것이 신경 쓰였는지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I lived in laos for 7 years. You can trust me.”


이곳에서 7년을 살았다니!

우리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그의 추천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는 메뉴판에 있는 6가지 음식 중 4가지를 손가락으로 집어주었고 우리는 고민 없이 그의 추천대로 주문을 했다.

잠시 후 우리의 테이블엔 추천받은 볶음밥 두 종류와 볶음면, 그리고 이름 모를 전 하나가 채워졌다.

가장 궁금했던 전을 향해 젓가락을 뻗었다.

바삭하게 구워진 전의 겉면이 부서지며 속에서 부드러운 풍미가 퍼졌다.

쫄깃한 면발에서는 감칠맛 나는 매콤한 소스가 스며들어 있었고 볶음밥에서는 강한 불 향이 배어 나왔다.

짭짤한 소스와 고소한 기름, 한 입 한 입이 입안에서 춤을 추며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마지막 저녁을 장식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음식들이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영국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은퇴 후 자신이 여행한 나라 중 가장 좋았던 곳에서 살아보기로 했고, 그곳이 바로 라오스였다고 했다.

여행자였던 그가 이제 이곳의 사람이 된 것이다.

언젠가는 나도 가장 좋았던 여행지에서 머물게 될까.

처음 도착한 이들에게 멋진 메뉴를 추천해 주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그는 그가 추천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우리를 보며 조용히 일어났다.


“I’m full. And now, I need ice cream.”


그렇게 말하며 슈퍼마켓으로 가는 그의 뒷모습에 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끝까지 유쾌한 사람.

이곳에서 우리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은 모두 우리에게 미소를 남기고 떠났다.

그러니 그는 벌써 이곳에 속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음식과 이야기로 가득 찬 저녁이 지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너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서서히 모습을 감추는 라오스의 마지막 태양빛, 서늘하게 내려앉는 비엔티안의 밤.

오가는 사람들, 번지는 웃음소리, 구수한 음식냄새까지.

익숙해졌지만 이제는 떠나야 할 이 모든 풍경이, 마치 손을 흔들며 우리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 같았다.

익어가는 하늘빛처럼 우리의 여행도 무르익었다.


마침내 새로이 찾은 정춘의 한 페이지가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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