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야 할 또 한 가지 이유
한밤중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팠다. 가족들이 일어날까 봐 조용히 화장실로 갔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배가 이렇게 아픈 건 아마도 처음인 것 같다. 심한 통증이 계속되었다. 배 속에 있는 장이 갑자기 이상하게 뒤틀리는 통증이었다. 온몸에 식은 땀이 났다. 더워서 나는 땀이 아니라 심한 통증으로 몸이 알아서 반응하는 이상한 땀이었다. 문제는 통증이나 땀이 아니었다. 머리가 차가워지면서 의식이 조금씩 흐려졌다.
화장실에서 내가 한 일은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자꾸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는 것 뿐이었다. 화장실 바닥에서 간신히 손을 뻗어 세면대에 물을 틀어놓고 흐르는 물을 자꾸 얼굴에 묻혔다. 그리고 내 의지를 다 해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정말 이러다가 의식을 잃을 것 같아 소리를 질러 아내를 깨울까 했다. 몇 번을 그렇게 할까 생각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내가 갑자기 일어나 이런 내 모습을 보면 나보다 더 놀랄 것 같았다. 겁이 많고 잘 놀라는 아내가 당황할 모습을 보니 나보다 더 걱정이 되었다. 아마도 아내는 내 앞에서 주저앉아 울기만 할 것이다. 아이도 시끄러워서 일어나 내 모습을 보며 감당하지 못할 충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자기가 급박한 상황에서 나는 왜 이런 걱정을 한 것일까.
그런데 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냥 포기하듯 눈을 감으면 생각보다 편안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많이 아프기는 했지만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것이 무서울 정도로 편안했다. 이렇게 기절하듯 죽으면 언젠가 겪게 될 고통스러운 죽음의 순간 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는다는 것이 이렇게 편안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내게 흔하지 않은 기회가 온 것 같았다. 꺼질 것 같은 작은 의식 속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편안한 죽음에 대한 기대가 힘없이 흔들거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노력을 통해 정신을 부여잡는 일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노력이야 하겠지만 통증이 심해져 전기가 나가듯 툭 하고 의식을 잃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다고 생각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10분 정도 그런 통증과 이상한 생각, 이상한 편안함이 지속된 것 같다.
그러다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조금씩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다시 체온을 찾아가고 있었고 땀이 나는 것이 이제는 따뜻하게 느껴졌다. 배가 아프던 통증도 견딜 만큼 줄어들었다. 이제는 바르게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조용히 긴 숨을 내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내 몸이 생각보다 잘 만들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유로 갑자기 배가 아팠겠지만, 고맙게도 내 몸은 처음부터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보다 편안하게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유혹에 젖어있을 때, 생각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이 몸뚱이는 살아남으려고 나름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철학자의 정신보다 이 몸이 더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새삼 내 몸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이 나를 살려준 것이다. 그 다음으로 들었던 생각은 어떤 경우에도 내가 살아남아야 할 마지막 한 가지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 몸이 아직 살고자 한다면 내 몸을 위해서라도 나는 더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내 안에는 살고자 하는 몸의 본능이 있다. 이건 내가 의식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혹시라도 살고 싶은 생각이 없고 죽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도 나는 살아야 할 마지막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유 없이 대가 없이 수 없이 그동안 나를 살려 주었을 착한 내 몸을 위해서도 한 번은 더 살 필요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