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중요하고 복잡하고 무섭기 때문입니다

- 물론 학생에게 이런 솔직한 내 생각을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다

by doctor flotte

3년 전 내 수업을 들었던 한 학생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 하느라 바쁠 텐데 예전 내 수업을 생각하며 연락해 온 것이다. 내가 더 반가웠던 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수업과 관련된 질문을 해 왔다는 점이다. 몇 년이 지나도 수업이 생각나 여전히 철학적인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게 고마웠다. 선생님으로 살며 이따금 느끼는 진짜 행복이 아닌가 싶다.


학생은 평소 가지고 있던 고민이라며 나름대로 상황을 만들어 질문을 했다. 요지는 강압에 의해 누군가를 죽이는 경우 이것도 ‘악’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더욱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죽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학생의 예시는 극단적이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해가 되었다. 학생과 관련이 없는 단순한 질문이기를 바라며 천천히 답장을 써 내려갔다.


철학에는 답이 없다. 철학은 인간의 삶을 다루는 것인데, 삶에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답이 없어도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며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지만 삶의 문제는 애초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후회하고 좌절하고 고통 속에서 괴로워한다. 그리고 또 잊고 당분간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면 또 살만하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길을 이렇게 저렇게 기억할 뿐이다. 이것은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다. 삶이다.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다. 강압에 의해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 내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전쟁상황에서 명령을 받은 군인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럼 나는 어떻게 했을까?


나는 용기가 없는 겁쟁이다. 우선은 불쌍한 사람들을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것이 무척 괴로워 온갖 핑계로 그 일에서 손을 떼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해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보안을 이유로 내가 죽을 수도 있다면, 아마도 나는 몰래 이 모든 일을 기록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 끔찍한 일을 누가 명령했고, 누가 어떻게 실행에 옮겼고, 정확히 어떤 잔인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기록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록들의 사본을 만들어 따로 보관해 어떻게든 나중에 알려지게 했을 것이다. 물론 그 경우 내가 저지른 일들도 남겠지만, 그건 면죄부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 끔찍한 일을 저지른 나를 용서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아마도 이 잔인한 학살의 실행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을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명령이 취소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면 나는 어린이와 여성들을 이 무차별적인 처형의 순서에서 최대한 나중으로 미루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더라도 나는 아마 결과적으로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동참했을 것이다. 내가 한 일은 그저 비극을 방해하려다 그친 소용없는 일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평생을 괴로워했을 것이고, 참회하는 삶의 방법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다행히 아직 살아가고 있다면 말이다.


학생에게 이런 솔직한 내 생각을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다. 내 모습이 비겁하게 보여질까 부끄럽기도 했고 나의 대답에서 실마리를 찾으려는 학생에게 오히려 혼란을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반쯤은 내 나약함을 감추고 반쯤은 진심을 담아 이렇게 답장을 마무리했다.


“문법과 말에서 중요한 것은 말입니다. 철학적인 개념과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실제 삶입니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에 우리의 삶을 끼워 맞출 수는 없습니다. 삶이 선과 악이라는 철학적 개념보다 더 중요하고 복잡하고 무섭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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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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