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 헌책방의 마당에서는
파란색 플라스틱 바인더를 가지고 있다. 아내가 이 바인더를 보고 크게 웃은 적이 있다. 나도 같이 웃기는 했는데 나한테는 중요하고 진지한 일이다보니 그냥 웃기만 하는 아내 모습이 조금 밉기도 했다. 아내가 계속 웃으면서 그것 좀 보자고 했는데 그냥 싫다고 했다. 그냥 비밀이라고 했다. 내 마음이 웃음거리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철학자라는 사람들은 보통 속이 좁다. 그 바인더에는 ‘인생계획’이라고 크게 제목이 붙어 있다.
이 바인더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이런저런 비밀스런 일들이 채워지고 있다. 나중에 시간과 여유가 생기면 꼭 해 보고 싶은 일들을 나름 진지하게 그리고 신나고 재미있게 적어두고 있다. 어린 시절 어른들을 피해 나만의 공간에 보물을 모아두었던 것처럼 말이다. 살다가 갑자기 이 바인더를 채울 좋은 생각이 나면 잊기 전에 이 바인더에 하나씩 적어둔다. 노트북으로 글을 써서 프린트해 종이를 끼워두기도 하고, 그 종이에 손으로 메모를 더하기도 한다.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이 있으면 마찬가지로 프린트해서 보관하기도 한다. 기준은 하나,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적는 것이다. 실현가능성은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시절 그랬던 것처럼.
최근에 적어둔 것은 철학전문 헌책방에 대한 아이디어들이다. 이런 생각들을 적는 일이 신나고 재미있다. 아마도 내가 은퇴할 때쯤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빌딩과 아파트가 없는 곳, 약간 언덕이 있는 곳에 거의 버려진 작고 마당이 있는 집이었으면 좋겠다. 뜻이 있는 분들과 힘을 합쳐 그 집을 사고 싶다. 아무래도 거리가 있어 차를 타고 와야 하니 도로에서는 너무 멀지 않았으면 한다. 사람들이 원래 살던 도시와 아파트에서 1시간은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한다. 아무 때나 와서 사진 찍고 가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느 정도는 시간을 내서 마음먹고 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떨어진 시간과 거리만큼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다른 생각과 다른 하루를 보냈으면 한다. 새 책은 팔지 않는다. 주변에 은퇴하는 교수님들을 졸라서 그런 책들을 가져오면 된다. 은퇴하는 교수들의 제일 큰 고민은 연구실에 있는 많은 책들을 처리하는 일이다. 그분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는데, 아내분이 절대 그 많은 책들은 집에 가져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내가 차로 몇 번 왔다갔다 하면서 그런 책들을 받아오면 된다. 이렇게 책을 기증하신 분들은 내 헌책방에서 동반 1인까지 평생 커피를 공짜로 마실 수 있다. 커피는 먼저 돈을 내고 드리포트로 각자 내려서 마셔야 한다. 모카포트도 있다. 사용 후에는 직접 씻어서 올려 놓아야 한다. 마당에는 1인용 의자를 많이 둘 생각인데, 사람들이 원하는 곳에 의자를 놓고 책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비를 피해야 하니 지붕의 처마를 길게 개조할 것이다. 밥은 싸와도 된다. 커피를 시켰다면 낮잠도 괜찮다. 블루투스 해드폰도 필요한 사람은 쓸 수 있도록 몇개 둘 것이다. 서해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꼭 창가와 마당에서 저녁노을을 맞이할 수 있는 방향이어야 한다. 노을은 사람을 철학자로 만든다.
한 달에 한 번 그 작은 철학 헌책방의 마당에서는 철학책 벼룩시장이 열린다. 이날은 예외적으로 옛날물건을 팔 수도 있다.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나도 바퀴달린 책장을 끌고 나와 평소보다 더 저렴하게 함께 책을 팔 것이다.
그 헌책방에는 나만의 공간이 붙어 있다. 그 공간은 다른 곳과 분리된 나만의 공간이다. 천장이 조금 높았으면 좋겠고, 노을이 들어올 만한 곳에 격자형 창문이 있었으면 좋겠다. 책은 모두 밖에 둘 생각이니 여기 나만의 공간에는 빈 책상과 의자, 1인용 소파, 옷걸이, 커피도구, 좋은 스피커만 있으면 된다. 벽면과 문은 모두 흰색으로 하고 싶다. 그러면 내 남은 여생을 기꺼이 이 공간에서 보낼 것이다.
이런 걸 써 두고 있다. 내 파란색 ‘인생계획’ 바인더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