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저 똑같은 산과 나무들은

- 삶이라는 것도 전진과 발전이 아니라, 반복 속에서

by doctor flotte

마지막으로 차 앞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차에 탄다. 내 출근길은 2시간이다. 아파트 단지를 나오자마자 차가 막힌다. 꼬리물기를 하다가 횡단보도에 멈춰 있는 차들. 사람들은 운전자를 째려보며 건너간다. 핸드폰을 보며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시커멓게 선팅을 한 차 안에서 양심 같은 건 필요 없다. 그러든지 말든지 운전자는 내 길만 가면 된다. 나도 꼬리가 되어 겨우 교차로를 건너간다. 그리고 나는 오늘 처음으로 오른쪽 창문으로 기분 좋은 풍경을 찾는다.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하천이지만 아침 햇살에 물결이 반짝거린다. 짧게나마 기분이 좋아진다.


또다시 차가 막힌다. 이 시간이면 항상 똑같이 막히는 구간. 이제는 차 옆에 있는 풍경들은 볼 것도 없다. 건물, 건물, 건물, 볼 필요도 가치도 없는 매일 똑같은 건물들. 나도 라디오를 켠다. 104.5. 아무 효과 없는 걸 알면서 매일 같이 영어회화 방송을 듣는다. 이제 이만큼 천천히 가다 보면 저기에서는 항상 길이 뚫린다.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타이밍에 똑같이 차선을 바꿔 속력을 낸다. 이제 나는 창문을 모두 연다. 아직 차가운 아침 바람이지만 왠지 바람이 좋다. 속력이 빨라지면서 나는 창문을 닫는다. 나랑 상관없이 영어방송이 흘러나온다. 어제처럼 그 전날처럼 그리고 내일처럼 똑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영화 ‘트루먼 쇼’를 한 번 본 사람은 잊을 수가 없다. 똑같은 일상이 자꾸 그 영화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2시간이 걸리는 운전을 내가 매일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조금만 참으면 녹색의 푸른 나무와 산을 보면서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 속으로 진입한다. 이제는 차도 안 막힌다. 어느새 그 지긋지긋했던 시멘트 건물과 다 똑같이 생긴 통유리 빌딩들은 보이지 않는다. 나무와 산들에 빠져 운전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속력을 내게 된다. 과속을 알리는 티맵 경고소리 정도는 봐줄 수 있다.


물론 똑같은 풍경이다. 어제와 같은 나무들과 산들. 그 전날과 그리고 내일과도 같은 똑같은 풍경이다. 하지만 저 똑같은 산과 나무들은 아까 보았던 똑같은 자동차들과 똑같은 건물들과 빌딩들과 같지 않다. 질적으로 다른 똑같은 것이다. 나무와 산들은 왜 똑같은 풍경이면서 다른 똑같은 것들과 다른 것일까?


매일 똑같아 보이는 산과 나무들은 물론 계절에 따라 변한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면 저 산들은 가지만 남은 나무들 때문에 마치 화재를 겪은 산처럼 벌거숭이 산이 될 것이다. 나는 작년 겨울에도 저 산이 그렇게 된 것을 봤다. 그렇게 한참 추운 겨울을 버티면 날씨가 따뜻해지고 죽은 듯 보였던 나무들에 작고 예쁜 새싹이 돋아날 것이다. 막 태어난 깨끗한 연두색 잎은 보는 것조차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다. 그 작고 눈부신 연두색이 저 큰 산들을 온통 뒤덮을 것이다. 작년에 보았던 그전에도 보았던 봄날 산 풍경을 나는 몇 개월 뒷면 또 볼 것이다. 그리고 쳐다보며 행복해 할 것이다. 똑같은 모습이 반복되는 자연은 왜 매번 아름다운 것일까?


시간을 길게 두고 생각해 보면 자연은 똑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올 뿐이다. 봄은 일 년 뒤 다시 봄으로 돌아온다. 산과 나무는 네 개의 계절을 반복할 뿐이다. 자연은 피고 지지만 다시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마치 자연은 단 한 가지 사실, 즉 자신은 영원히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다. 또 흥미로운 것은 다 알고 있고 이미 수없이 보았던 봄을 나는 또 기다리고 찾아가고 기뻐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 인간의 본성이 자연을 닮아 사실은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는 데에 그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 삶이라는 것도 전진과 발전이 아니라, 반복 속에서 다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를 닮은 산과 나무는 조용히 그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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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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