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와 발콘이 있는 호텔에서

- 어느 유명하지 않은 작가가 그린 유화 한 점을 사고 싶었다

by doctor flotte

일이 있어 평창에 왔다. 그리고 호텔방을 잡았다. 원래 다른 사람들과 같은 숙소를 써야 하는데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방을 쓰는 게 너무 불편할 것 같았다. 며칠 전부터 자꾸 신경이 쓰여 안 되겠다 싶어 호텔을 잡기로 했다. 갑자기 많은 돈이 나갔지만 괜찮다. 아무튼 나는 만족한다. 돈이 많은 건 아니지만 나는 돈보다 내 시간이 더 좋다. 조용한 호텔방에 앉아 있으면 나는 기분이 좋다. 아무것도 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TV는 안 본다. 그리고 이 조용하고 따분한 시간을 즐긴다. 관찰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내가 여기서 자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은 딱 하나, 욕조에 따뜻한 물을 채우고 그 안에 들어가 30분 정도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건 이따가 10시쯤 할 생각이니 나는 아직 2~3시간이나 더 이렇게 있어야 한다. 충분히 만족한다. 호텔의 특징은 정말 조용하다는 것이다. 발콘쪽 커다란 통유리 창을 ‘꽉’하고 닫으면 이 공간은 수영장 물속에 깊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조용하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조용하다. 호텔방 벽에 시계가 없는 건 어느 아주 섬세한 전문가의 결정이 틀림없다. 앞으로도 모든 호텔의 벽에는 시계가 없어야 한다.


무얼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그렇게 있다가 작은 발콘으로 나가기로 한다. 1월 겨울의 발콘에 있기 위해서는 준비를 잘 해야 한다. 따뜻한 차를 마시고 내복까지 입는다. 그리고 두꺼운 패딩을 입고 밖으로 나간다. 내가 북극성으로 알고 있는 별 하나가 밝게 빛난다. 내가 북두칠성으로 알고 있는 별 세 개가 옆에 있다. 원래 추운 겨울을 좋아해서 실컷 발콘에 있어본다. 게다가 나는 뜨거운 욕조에 들어갈 계획이다.


다시 방에 들어와 발콘쪽 창을 닫고 아까랑 똑같은 이 조용한 호텔방에 앉았다. 나는 단순히 아까 그 공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시계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또 발콘에 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지금 이 조용한 호텔방의 시간으로 몇 번이고 돌아갈 수 있다. 나는 시간을 버렸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핸드폰을 열고 중고앱을 열었다. 어느 유명하지 않은 작가가 그린 유화 한 점을 사고 싶었다. 혹시나 그런게 있을까 싶어 찾아봤다. 신기하게도 마음에 드는 그런 그림을 하나 찾았다. 제목은 ‘강문’, 동해 강문해변 바다를 그린 유화였다. 파는 사람이 직접 그렸다고 했다. “한 방향으로 1만 번을 그어 한 장면의 강문해변이 완성되었다”고 적어 놓았다. 동해 바다의 색감을 좋아해서 그렸다고 했다. 수줍은 아마추어 화가는 그림 하단에 자기 이름의 이니셜도 적지 않았다. 그림이 아직 있냐고 물었는데 바로 답이 왔다. 한땀 한땀 직접 그렸다고 했다. 그림을 파는 사람은 강릉에 산다고 했다. 여기서 차로 50분이면 갈 수 있으니 내일 가겠다고 했다. 사실 내일 시간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시간이 꼬이면 나는 내일 이 그림을 살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내일 시간이 안 되면 정확히 날을 알 수 없지만 보관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다. 이미 그림값은 보냈다. 일주일 후 아마도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나는 몇 시간을 달려 이 그림 하나를 받으러 와야 한다. 내일 모든 일이 잘 풀려 약속대로 그림을 샀으면 좋겠다. 아마추어라고 하기엔 바다를 정확히 바다처럼 잘 그렸다. 바다는 사진이 아니라 이렇게 유화로 그리는 것이다. 그림값은 지불했으니 이젠 내 그림이다. 중고앱에 그 사람이 올린 바다그림이다. 여기 호텔방처럼 조용하고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조용한 바다그림. 뒤편에 서명을 해달라고 했으니 내일은 이름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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