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와 발콘이 있는 호텔에서 2

- 형광등 불빛에서 그린 그림

by doctor flotte

아침부터 그림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을 따로 내서 50분 거리를 다녀와야 해서 일정 중에 틈을 찾는라 걱정을 많이 했다. 다행히 오후에 시간을 만들 수 있었다. 차를 몰고 얼른 강릉으로 향했다. 항상 그렇지만 대관령 초입에 있는 저 양떼목장같이 생긴 크고 넓은 들판에는 양들이 없다. 양떼목장이 여기가 아닐 수도 있다. 매번 같은 곳을 지날 때마다 매번 같은 생각을 한다. 고쳐야 하는 안 좋은 습관인지 나는 모르겠다. 무슨 터널인지 이름을 알고 싶은데 매번 놓친다. 대관령을 신나게 넘어가다 보면 갑자기 어떤 터널을 지나게 되고, 터널을 지나 약간 내리막길이 시작될 때쯤 오른쪽 방음벽 사이로 저 멀리 동해 바다가 보인다. 아마도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이 첫 동해모습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순수해진다. 아직 바다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파란 하늘이 땅보다 아래까지 내려와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저것이 분명 동해바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동해로 간다.


강릉 근처 어느 지역의 하나로마트 앞에서 보기 했다. 처음엔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그 청년 화가는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쉬는 시간’이라 그때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청년화가’라는 것은 그냥 내 추측이고, 앞뒤 맥락 없이 3시부터 4시까지 쉬는 시간이라는 말도 처음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운전을 하면서 조금씩 생각이 들었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양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시간이 남았다. 당연히 나는 강문해변으로 향했다. 내 상상 속의 청년화가는 지금 내가 사려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여기를 왔을 것이다. 한 남자가 이 겨울에 서핑을 하기 위해 보드에 납작 엎드려 팔을 열심히 저으며 바다로 향한다. 추위에 한쪽으로 피해 있던 나 같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그 사람을 구경했다. 저렇게 바다로 나가는 것이 걱정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저 사람이 멋진 파도타기를 성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응원했을 것이다. 나는 계속 응원했는데 좋은 파도는 다른 쪽에서만 일어났고 그 멋진 서퍼는 파도를 찾아다니느라 지쳐갔다.


시간이 되어 약속했던 하나로 마트로 갔다. 시골일 줄 알았는데 우리 동네만큼 도시였다.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하나로 마트 입구쪽으로 걸어가 기다렸다. 내가 먼저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냈고 답이 왔다. 지금 나온다는 것이다. 지금 나온다는 말에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는데 얼마 안 있어 찻길 건너편에서 어느 청년이 커다란 캔버스를 들고 서둘러 걸어오고 있었다. 일하다가 나온 모양이었다. 예상대로 20대 후반의 착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나는 그림을 자세히 살펴봤다. 조금 춥기는 했지만 나는 왠지 그림을 천천히 보면서 이 청년과 조금 같이 있고 싶었다. 이제 헤어지면 만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 말을 하고 싶었다. “그림 그리는 화가세요?” 말할 준비가 안 되었던 청년은 소박하게 말해 버렸다. “미대를 나왔는데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어요. 그림은 밤에만 그려요. 이건 제가 강문해변을 찍은 사진이 있는데 그걸 보고 그린 거예요. 밤에요.” 물감이 많이 들어갔다는 말도 했다.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쉬는 시간일 테니 이 사람도 시간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아쉽지만 이 사람과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림이 조금 커서 나는 차를 타기 전 차 앞에서 이 그림을 두 손으로 들고 한참 바라봤다. 하나로 마트 앞 주차장에서 한 아저씨가 커다란 바다그림을 보면서 좋아하고 있었다. 나는 그림을 차 트렁크에 조심히 실었다. 나중에 어둡고 칙칙한 내 사무실에 걸어놓을 생각이다. 지금은 내 앞에 있다. 벽에 붙여놓은 내 작은 책상 전면에 올려 놓았다. 밤에 형광등 불빛에서 그렸다고 하니 이렇게 밤에 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바다를 그리고 싶지만 아르바이트 하느라 시간이 없어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이라도 그리고 싶어 피곤한 몸으로 밤을 지새며 형광등 불빛에서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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