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보낸 소고기 문자

- 나는 왜 삶에는 친절하지 못한 것일까

by doctor flotte

일정상 밀려 있던 논문 한 편을 끝내고, 바로 다음 논문을 시작했다. 마음껏 책을 읽고 철학에 빠져있는 게 나에겐 재미이고 행복이다. 방학이라는 기간은 그래서 내가 기다리는 시간이고 하루하루 지나가는 게 무척 아쉬울 뿐이다. 매일 산책을 하면서 나는 오늘 더 많은 책을 읽지 못하고 논문을 조금 더 쓰지 못한 것을 반성한다. 내일은 아주 조금이라도 더 읽고 더 쓰게 해달라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기도도 한다. 나의 삶은 철학에 완전히 빠져있고 앞으로 5년에 한 권씩 총 5권의 책을 쓰고 나면 내 생은 끝나가겠지라고 생각하며 정해진 내 삶을 받아들이고 산다.


이런 내가, 내가 하고 있는 철학을 의심할 때가 있다. 내가 모든 걸 바치기로 한 내 논문과 내 원고들이 갑자기 글자가 없는 종이가 되어버리는 순간이 있다. 그런 대단한 순간은 참 어이가 없게도 카톡 문자 한 개로 일어난다.


아내에게 카톡으로 문자가 왔다. 갑자기 인터넷으로 소고기를 주문했고 내일 올 거라는 문자였다. 그러고는 어제 회사에서 저녁으로 소고기를 먹었는데, 이렇게 맛있는 고기를 아이와 나 없이 자기만 먹는 게 미안했다고 했다. 맛있게 먹긴 했는데, 먹으면서도 계속 불편했다고 한다. 그 미안한 마음에 우리 먹으라고 소고기를 주문했다는 것이다. 카톡 문자는 그렇게 끝났다. 고기는 냉동실이 아니라 냉장실에 넣어야 한다고 당부도 했다.


갑자기 공부를 하다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회사에서 회식으로 소고기를 먹을 수도 있는 것이고, 소고기니까 맛있었겠지, 그리고 내가 정말 소고기를 먹고 싶으면 많이는 못 사도 조금 사서 먹을 수도 있는 일이다. 불필요한 생각이고 큰 의미도 없는 말들을 너무 반성하듯 아내가 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나는 집중하면서 겨우겨우 생각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아내 때문에 흐름이 끊긴 것 같아 살짝 기분이 좋지 않기도 했다. 왜 아내는 이런 별거 아닌 문자를 보내서 나를 방해하는 걸까. 그냥 일어나서 식은 커피나 채우러 갔다.


다시 책상에 앉아 책을 보는데 시선이 책까지 가다가 뚝 떨어졌다. 아내가 보낸 소고기 문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별것 아닌 것, 미안한 마음, 주고 싶은 마음, 가족... 책등이 떨어질 때까지 읽고 있는 저 두껍고 어려운 책에는 없는 말들이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디에서 철학을 해야 하는 것일까. 내가 삶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삶을 글자와 책에 바치겠다는 내 말은 대단한 자부심이 아니라, 아직도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철학자가 그저 잘못 들어선 길은 아닐까. 나는 사실 그냥 철학이라는 고집을 부리고 사는 것은 아닐까. 어려운 말들엔 그렇게 친절하면서도 어렵지 않은 말들엔 왜 이렇게 박한 것일까. 공부하고 논문을 쓰는 것도 살아가는 한 모습일 뿐인데, 나는 왜 논문을 쓰며 스스로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이 삶은 아끼면서도 저 삶은 무시하고 있는 것일까. 출발한 곳도 삶이고, 지금 걸어가고 있는 곳도 삶이고, 돌아가거나 끝마치는 곳도 삶일 텐데 나는 왜 삶에 친절하지 못한 것일까.


나는 철학을 좋아하지만 아내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스칠 때가 있다. 다행인 것은 내가 이 사실을 조금씩 깨닫기도 하고 잊기도 하며 열심히 시행착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은 그래도 철학을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고 싶다. 그래도 어리석은 내가 가끔 말이라도 이렇게 하고 있어 다행이다. 나이가 들어 철학을 빙 돌아 삶으로 돌아올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얘기할 것이다. 지금은 그저 머리로만 알고 있는 그 말. ‘깊이는 철학이 아니라, 삶으로부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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