펫로스 가벼운 그 이름(2)
반려동물 사망신고서를 작성했다. 한 달 내에 신고를 해야 한다고 해서 마음도 정신도 추스를 새도 없이 사망일, 사망 사유와 장례 여부에 대한 빈칸을 채워 넣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미 떠난 아이. 그 떠남에 대한 기록을 남겨서 무얼 하나. 잠시 머뭇거리던 손을 들어 신고 버튼을 클릭한 동시에 이름도 등록번호도 사라졌다.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남아 있다 한들 어차피 무의미한 글자겠지.
그럼에도 순간 마주한 공백이 실로 허망했다. 더 이상 검색되지 않는 번호.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재확인시켜 주고 싶기라도 한 걸까. 애초에 지우기 위해 신고를 하라고 한 걸까. 조금은 야속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름만 기억에 콕 박혀 버렸다. 그 페이지에 무슨 말을 썼는지 어떤 항목이 있었는지는 명확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 아이의 이름이 그저 사라진 것처럼 사망 신고를 하던 그날의 기억도 오로지 빈 페이지만이 각인되어 있다.
이제는 이름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그랬듯 상처받은 누군가가 있었겠지. 그중에 누군가는 목소리를 높였을 테지. 그래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소용일까. 이름만 남아 있는 게 무슨 소용일까. 이름을 가진 아이는 없는데. 기록이 대체 무슨 소용일까. 무엇을 붙잡을 수 있을까.
이름 옆에 사망이라는 글자가 적힌 걸 보는 것보다 클릭 한 번에 사라진 이름이 어쩌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기록이 남아 있는 쪽이 덜 아플까. 어느 쪽도 나을 것 같지 않다. 결국에는 없는 존재에 대한 기록이니까. 그 허망함이 그 아이가 숨을 거두고 재가 되어 떠났을 때의 허망함에 비할 바 없으니. 부질없고 부질없어서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다.
할머니의 삼일장이었다.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주민센터에 사망 신고를 하러 가는 엄마를 따라나섰던 일이 떠올랐다. 살가운 자식은 아니지만 왠지 엄마를 혼자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는 많지 않았다. 걸어가는 길목에서도 민원 접수를 하는 도중에도 돌아오는 길에도 엄마는 그리 슬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게 조금 의아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신고는 해야 하니까, 슬픔과 현실의 간극에 아파할 새가 없었던 것일 텐데. 내가 옆에 있어서 눈물을 숨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사망 신고를 하면서도 현실인지 아닌지 실감이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 손으로 가족의 사망에 그것이 사실임을 낙인찍는 건 다 큰 어른이라고 해서 가슴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엄마라고 아프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 가족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가슴을 후벼 파는 상처가 어찌 다를까. 그날 엄마의 흐르지 않은 눈물이 조금은, 감히 이해가 되는 날이다. 하지만 그날 내가 엄마 곁에 있기를 잘한 일인지는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