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칸방에 살아도 가족들과 즐겁게 살고 싶습니다."제부는 캠핑러가 되었다
인테리어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트렌드에 예민해서 새로운 제품들에 호의 적이다.
입주 현장에서 나오는 새로운 제품들을 자신의 사업 아이템으로 넣어서 어떻게 쓸 것인지를 늘 고민하기에 그분들에게는 접목할 확실성이 보이면 제안을 하고 명함을 내민다.
그런 분 중 한 분은 꽁지머리 사장님이고 한분은 카리스마 넘치는 사장님이셨다.
꽁지머리 사장님은 도를 닦은 사람처럼 긴 머리를 질끈 묶고 다니셨기에 우리가 성함을 모를 때 쓰던 별명이다. 꽁지머리 사장님은 내가 입주한 아파트에 조그맣게 자리를 펴고 홍보행사를 하고 있는 걸 보시고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입주 아파트에 공동구매라는 아이템을 던져주시면서 지금까지 서로 돕는 관계에 있다.
두 번째 사장님은 작은 입주 품목부터 시작해 시행사에서 주관하는 700세대 아파트에 옵션 행사까지 주관하게 된 사장님이셨다. 작은 장사에서 큰 사업까지 맡아서 하시는 사람답게 올라간 눈꼬리 안으로 쏟아지는 눈빛이 사람을 조심스럽게 만든다. 이 사장님은 작은 거라도 받으면 그 이상의 것을 베푸시는 분이다.
모든 일은 그냥 되는 일은 없다.
남을 늘 의식하며 사는 소심한 성격의 나는 남한테 피해 안 주고 피해 안 보기이다.
나와는 반대로 남편은 오지랖이라 단정 짓기에는 선한 마음이 먼저인 사람이기에 남을 챙기는 일이 업이 아닐까 싶게 사람을 챙기는 데는 진심 적극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가족이나 자신의 일보다 주변사람을 잘 챙기는 성격으로 나에게 적잖은 핀잔도 많이 들었고 이일로 이혼까지 고민한 적도 많았다.
남편은 우리 새 아파트 입주 때 좋은 가격으로 많은 제품을 구매하면서 그 카리스마 사장님께 더 많은 계약을 할 수 있게 도움을 드렸다.
그걸 염두에 두셨던 카리스마 사장님은 이제 막 시작하는 우리 사업에서 혹 할 수 있는 조건을 제안했고 그 게약으로 200세대 이상의 계약을 약속하셨다.
200세대 이상을 제부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에 아르바이트 생과 경리 여직원을 구했다.
입주 시기는 2달 정도면 끝나고 우리 옵션 행사의 이점은 모든 비번을 받을 수 있어서 계약세대는 사전 공사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스케줄만 잘 짜면 모든 일이 수월하게 이루어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재정상 2달 정도 아르바이트 직원을 구하고 정식 직원은 일 진행되는 상황을 봐서 하기로 정했다.
그때만 해도 최저임금은 지금보다 적고 조선업이 호황기였던 때라 최저시급보다 많은 조선소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사람을 구하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여직원은 나와 제부가 면접을 봤고 남직원은 제부와 남편이 면접을 봤다. 직원이라기보다는 아르바이트가 맞을 것이다. 여직원을 구했는데 급여와 우리가 일하는 것들 복잡하지 않아서 간단한 업무만 볼 수 있는 직원으로 구했다.
그런데 간단한 컴퓨터 작업은 할 수 있다고 했지만 간단한 엑셀조차 다루지 못하는 직원이었다.
20살 뭘 해도 좋을 나이 집안 형편은 좀 복잡했지만 남편과 나는 힘든 어린 시절을 겪어봤기에 여동생처럼 생각하고 잘 가리키면 믿음직한 직원으로 끝까지 함께 할 수 있겠다란 생각이 일치했다. 제부 또한 밝고 싹싹한 성격을 무척 맘에 들어했고 무엇보다 모르는 것은 과감히 모른다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배우려 하는 자세를 높이 샀다.
그렇게 여직원 한 명과 아르바이트 남직원 4명을 두고 제부는 정식적인 사장님이 되었다.
입주가 시작하기 전까지 2개월 이상을 사전작업을 준비하고 전기안전에 관한 모든 걸 준비하기 시작했다. 옵션행사 세대의 개인 정보를 받아 들고 어떻게 시공을 해나가야 할지를 계획에 세웠고 몇 명이? 동? 호로 갈지도 정해서 움직이기로 했다.
그러나 입주라는 것은 보통 여름과 겨울에 입주가 시작이 된다. 그전까지 led 조명에 대한 인지도가 적었던 터라 일이 늘 있는 건 아니어서 4명의 급여와 식대 모든 걸 우리의 사비로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남편은 퇴근 후 아르바이트 직원들에게 인터넷 사이트를 이용해서 쇼핑몰을 만들라는 과제를 주고 제부는 가끔 들어오는 시공으로 현장을 다니며 직원들을 가리켰다.
입주가 시작되기도 전이면 전적인 모든 비용을 처리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식대부터 월급 그리고 월세까지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런데 현장일이 시작도 전에 사장님을 포함한 직원들이 한 끼에 돈가스로 11000원 하는 점심을 먹기도 했다.
일이 많을 때는 힘들게 현장서 일하는 직원을 위해 한 끼 식사 값으로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부분이었다.
하지만 일이 없는 사무실에서 직원이 4명의 점심값으로는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3명의 남 직원이 있다 보니 통제도 힘들었는지 퇴근 후 컴퓨터 기록을 보고 경악했다.
일하는 시간에 수시로 야동을 보는 직원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 남편은 간단한 지시는 제부를 통해서 얘기했고 제부와 부딪치는 문제들을 간과할 수 없어 주변의 조언에 따라서 한 달을 지켜보는 걸 택했다.
일이 바쁜 때가 아니었으므로 관리가 안 되는 직원들과 그들의 취향에 맞는 점심을 먹으러 다니는 제부 사장님을 나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구를 탓할까?'
그 얘기를 전해 듣고 나는 하소연처럼 동생에게 이야기했지만 식대에 관한 얘기는 무시하고
"20살인데 그거 좀 보면 안 돼"라고 얘기했다.
같이 취향을 나누는 곳이 아니고 일을 해야 하는 공간에서 야동은 보는 직원이 있고 그걸 본 것조차 모르는 사장님은 지금도 난 어떤 게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
아 이건 아니구나였다.
어쩜 나는 꼰대가 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월세부터 직원들 밥값, 젊은 아이들이라 만만치 않은 간식비, 그리고 작은 물품까지 모든 걸 책임져야 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남편을 대신해서 화가 많이 났다.
일에 효율을 높이기 위해 뽑은 직원이 관리는커녕 제부는 직원보다 늦게 출근하는 날도 많아졌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매출이 없던 우리는 남편의 월급부터 보너스까지 사업에 모두 투자해야 했고 대출까지 내서 모든 걸 감당해야 했다.
단면만 볼 수는 없다.
약간의 통제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겉으로 보기에도 이해 한 되는 제부의 행보로 보이는 모습이 맞을까란 생각은 수없이 많이 했다.
그러면서 내부 사정을 모르는 직원들은 잔소리와 통제하는 남편보다는 자신들의 의견을 늘 들어주고 함께 현장에서 일을 같이 하는 사장님을 믿게 되었다.
결국 아들뻘 되는 직원과 큰 다툼까지 생기면서 욕을 하며 나가는 직원까지 생겼다.
우리는 제부를 포함해 사기가 떨어질까 봐 빚을 내는 것도 남편의 모든 월급과 보너스가 들어갔다는 얘기는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게 했기 때문에 저런 여유 있는 상황이 벌어진 걸까?
사건 사고와 함께
그렇게 준비한 시공은 시작되었고 입주가 시작되기 전까지 무사히 시공을 마쳤다.
모든 공사를 마무리 후 우리가 계산한 손익분기점과 현실은 차이가 있었다 전체 벌어들인 금액에서 인건비 수수료 부분을 떼고 나니 우리에게 남은 금액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2달 급여를 주고 남은 물건값을 주고 나니 없는 것이다.
아르바이트였기 때문에
한 명은 군대로 두 명은 학교로 모두 가고 여직원 한 명만 남았다.
2명의 또래가 모두 가고 나니 본인이 일하기 버거웠는지
끝까지 함께 할 거라는 여직원은 어느 날 말 한마디 없이 타지에서 온 인테리어 사장님을 따라 연고도 없는 도시로 가 버렸다.
이렇게 또다시 제부와 남편이 남았고 시끌벅적하던 사무실은 또다시 적막해졌다.
3개월 간간이 들어오는 일들을 제부가 처리하고 시공도 했다.
그리고 겨울, 해마다 돌아오는 입주 현장이다.
꽁지머리 사장님의 덕분으로 사무실 쓰는 약간의 비용만 들이고 입주 현장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 우리가 낸 비용은 2달 같이 사무실에 있으면서 50만 원도 채 안 되는 비용이 들었고 밥값만 보태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LED 조명은 가격도 비쌌고 생소한 제품이었다. 지금은 에너지 절약으로 나라에서 권장도 하고 굳이 설명이 필요 없지만 그때는 전기세 계산부터 조명으로 사용하면 얼마나 절약되는지 까지 설명을 하고도 사람들은 갸우뚱했다.
'등이 새건대.. 이걸 꼭 해야 되나'란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그렇게 입주현장부터 구경하는 집까지 공사는 계속되었고 주변의 도움으로 20세대 정도 계약도 이루어졌다.
옵션 행사와는 다르게 계약하고 입주 후 진행하는 공사는 복잡했다.
다른 입주 품목들과 맞물려 겹치는 공사도 해야 했고 인테리어 공사가 함께 하는 날은 우리 조명은 기존 날짜보다 뒤로 미뤄줘야 했다.
맘에 맞는 직원을 구하기 힘들어 혼자서 일하는 제부를 위에서 남편이 퇴근 후 공사 현장으로 갔다.
어느 날 동생과 나는 두 집이 저녁 식사 약속을 해놓은 상태라 아이들을 데리고 입주아파트 현장에 갔다.
새로운 놀이터에 빠져서 천진난만하게 놀던 조카와 두 아이 사이로 하얀 먼지를 뒤집어쓴 두 남자가 양동이를 들고 분주하게 공사현장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현장을 보지 못한 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북받쳐서 최대치로 움추러든 마음을 부여잡고 서둘러 아이들을 데리고 현장을 나왔다.
넘치는 돈이 들어오는 장사도 아닌데 우리가 왜 이렇게 일하고 있고 저 아이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애증, 방향 잃은 동정심, 쓸쓸한 이해심이 맞물려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나를 온전히 집어넣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현장에서 퇴장 후 아이들과 우리의 출연이 방해가 되었던 건지 경험 많은 현장에서는 흔하지만 우리에겐 처음 있는 최대의 실수를 하게 되었다.
그날 두 남자는 서둘러 열심히 공사를 하고 사진까지 찍어 손님께 보내려고 전화를 했다.
"1203호 손님 맞으시죠?"
"네 어디세요?"
"? 아파트 1203호 손님 아니신가요?"
"아 저는 1204호인데요"
두 남자는 순간 울고 싶었다고 전했다.
모든 공사가 원점으로 돌아가는 건 둘째고 계약에 없던 1203호 손님의 원성을 들으면서도 사과와 함께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는 상황까지 덤으로 얻은 것이다. 감정은 개나 줘야 했다. 해결이 중요했으니까.
보통은 입주 센터에서 3일 전 청소, 줄눈, 탄성 작업을 하기 위해 열어주고 문을 닫는데 빠른 공사를 위해 관리자들의 눈을 피해 누군가 문을 열어 둔 것이었다.
하필 그 시각 두 남자는 문을 열어 두겠다는 고객분의 말만 듣고 동, 호수 확인 없이 잠겨있지 않은 옆집 조명 공사를 진행했던 것이다.
1203호 손님을 수소문해야 했다.
시공현장에 모든 시공 업체를 뒤져서 그 집 공사가 들어가는지 확인하고 손님의 전화번호를 따야 했다. 뛰어다니며 마무리하고 나온 시간이 밤 11시였다. 하늘을 보니 겨울 밤하늘이 유난히 예쁘더란 두 남자의 말이다.
현장에 갔다 곧 마치고 갈 테니 집에서 기다리라는 얘길 듣고 있던 동생과 나는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때 동생 임신 거의 막달이었다. 7살 어린 조카와 임신한 동생이 아빠 없이 거의 일 년을 지냈다.
나와 6살, 10살 우리 아이들은 퇴근 후 사무실로 현장으로 향하는 아빠를 거의 대면할 수도 없었다.
언젠가
늘 찾아오는 가장 없는 주말
아이들 데리고 갈 곳이 없어 집 앞 바닷가에서 다섯이 놀다가 동생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일요일만 쉬게 해 주면 안 돼?"
나는 결정권이 없었기에
"우리도 같은 입장인데... 내가 직접 일을 하는 상황이 아니라
형부랑 상의해 볼게"라고 답했다. 두 달도 안 되는 정해진 입주기간 속 분주한 현장에서 일요일 휴가는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가족을 앞세운 사업을 시작하고 남편과 늘 다툼의 연속에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나는 뻔한 답이 올 것을 알고 몇 번을 망설 아다 말하지 않았다.
그 약속은 제부의 퇴사 때까지 제대로 지킬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날도 11시를 넘기고 자고 가라는 나의 말에 늦은 밤 동생은 남편을 기다리다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한편 두 남자는 모든 업체를 뒤져서 손님의 번호를 따 왔고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우리는 그것을 계약한 적이 없으니 원래 대로 원상복구를 요청했다
지금처럼 Led조명이 당연한 시대가 아니므로 두 사람은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이용해서 손님을 설득했고
손님은 20만 원만 주기로 결정하고 모든 사태를 마무리했다.
그때 공동구매 가격이 80만 원이었다.
그일 후 이런 비슷한 일은 자주 있었다. 번잡한 입주 아파트 현장은 이사 날짜도 정해진 상태고 많은 공사가 한꺼번에 진행되다 보니 일에 집중도도 떨어지고 배선작업도 문제가 생길 수 있는 환경은 늘 존재했다.
며칠 후 제부가 전화가 왔다.
몇 년 전부터 아파트들이 월패드 하나로 모든 시스템이 통제가 되고 있었다. 집에 월패드가 나가서 모든 조명부터 시스템이 멈췄다 했다. 퇴근 후 달려간 남편은 문이 열려있는 집을 바꿔 일단 처리하고 안 되는 월패드를 다른 집에 설치 후 월패드 업체에 전화해서 교체를 요청했다. 그렇게 들어간 비용이 20만 원 정도였다.
남편이 어렸을 적 시 아버님께서는 자동차 정비소를 하셨다 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자동차는 지금처럼 어느 집이나 가지고 있는 교통수단이 아니었다.
이제 막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보급되던 시기였다. 당장 늘어나는 차를 보고 무모한 확신 하나로 너무나 일찍 정비소를 차리신 아버님께서는 뜻을 펼치기도 전에 가게 문을 닫아야 했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led제품 공동구매를 진행하면서 새로운 제품에 대한 설명을 진이 빠지게 하고도 갸우뚱하는 고객을 잡지 못하고 보내면서 힘들 때마다 남편이 입버릇처럼 하던 본인의 어린 시절이다.
사업이라는 희망고문을 놓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그때 아버지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는 말도 함께 했다.
3년 후 우리가 가지고 있는 led란 아이템은 가치 상승이 되면서 경쟁자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경쟁자가 생기면서 저가의 질 낮은 제품과 좋은 제품에 대한 인지도가 확연히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품질만은 최고를 고수하기 위해 노력했던 날의 보상이 되기라도 한 듯 제품으로 승부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그리고 우리가 고객을 설득하지 않아도 고개를 끄덕이고 제품에 대한 확실성을 가지고 찾아오시는 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업 시작 후 2년이 지나면서 막내 삼촌이 제부를 도우면서 같이 일을 하러 오셨다. 제부는 우리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신의 자리를 잃은 듯 한 달 정도를 방황하다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단칸방에 살아도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살고 싶어요"라며
자신의 퇴사 이유를 밝혔다.
그렇게 제부는 야심 차게 시작했던 사업아이템을 제대로 팔아보지도 못하고 다시 원래의 회사로 돌아갔다.
그 후 컴퓨터 안에 그가 남긴 자료들을 찾아서 홍보를 진행하는 것은 나의 몫이 되었다. 2년이란 시간 동안 제부가 남긴 기록들을 보면서 또다시 울컥했다.
그리고 든 생각은
'어쩌면 우리는 사람의 그릇의 크기만 보고 그 그릇에 무엇을 담을지는 몰랐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빠른 효과를 위해 실용성을 중시했던 남편과 더디더라도 자신만의 틀을 구축하고 싶어 했던 제부 사장님
너무나 결이 다른 두 사람
2년의 고비를 넘기고 5년의 시간을 기반 삼아 10년을 다른 점을 인정하면서 함께 채워갔으면 지금 우리는 어땠을까?
두 집의 고비를 보고 멈춘 건 우리 두 자매였다. 정답이라 생각은 안 했지만 적어도 우리가 겪은 아픔을 우리 아이들에게 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빠가 없는 우리 집이 큰아빠와 작은 아빠의 사업 실패로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세 자매의 삶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자리 잡고 있었기에 우리가 멈춰야 했다.
지금 제부는?
자신의 용돈을 모아 캠핑 장비를 샀고 7살 조카는 사춘기 말 잘 듣는 아들이 되었고 뱃속 조카는 10살이 되었다. 이 가족은 늘 주말마다 캠핑장으로 향한다.
제부는 자기만의 감성을 만들어가며 조명을 넣고 장비를 사서 모은다. 그 영역은 누구든 절대 침범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