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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Dec 22. 2023

노키즈존 시대의 맘충(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_김수영)

맘충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전으로 회귀하고 싶어요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원 때문에 십원 때문에 일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지금은 이렇게(!) 살고 있지만, 사실 내게도 희미하게나마 살고 싶은 방향이 있었다.

경제적 자유를 토대로 한 비혼과 비출산의 길을 걷는 골드미스 같은 거창한 가치관은 못됐다. 나는 가난했고, 사랑하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어떤 조건도 충족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삶을 꾸릴지는 모르더라도 왜 삶을 꾸리는지는 아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사회적인 이슈를 외면하지 않고 목소리를 드높이는 투쟁자까지는 못되더라도, 적어도 온화하고 차분하게 내가 갈 길을 정하고 걸어가는 타의 모범이 될 법한 어른.

법없이도 살 사람.

착한 사람.

누구에게도 민폐 끼치지 않고 불의한 상황에서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고 불이익에 저항할 줄 아는 사람.


그렇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이 말인즉슨, 내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나 하나 잘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얘기다. 온 마을에 사과하고 양해를 구할 일이 넘쳐난다.  



아이와 함께 당근 거래를 하러 가서 기분 좋게 거래를 하고 나오는 길.  "엄마 나 너무 화장실이 급해, 하는 아이의 바짓춤을 부여잡고 편의점도 찾지 못하고 공공화장실을 찾지 못해 어쩔 줄을 모르다 동동 발을 구르는 아이를 보고 눈 딱 감고 저질렀다. 막혀있는 산 뒷길로 들어가 아이의 바지를 내렸다.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시원하다~ 엄마 내가 꽃에 물줬어, 하는 아이를 보며 다음부터는 이러지 말아야 한다고 어떻게 알려줘야 할까 고민했다. 큰 길가로 나와서도 시원했다는 소회를 계속 되풀이하는 아이에게 그렇게 행동하는 건 나쁜 행동이라고 얘기했다.

아이의 눈에 의문이 서린다.

근데 엄마는 왜 하게 했어? 그리고 왜 나는 혼나는 거야?


의문투성이다. 

왜 나는 아이를 위해서 행동하고 나서 고스란히 아이에게 짜증을 낼까. 

민폐. 그놈의 민폐가 무엇이길래 지하철을 타는 걸 좋아하는 아이가 행여나 큰 소리를 낼까, 신발을 신고 다른 사람의 발을 찰까, 움직이며 옆 사람을 만질까 온갖 긴장을 하며 그 순간을 즐기게 하질 못하고 결국 화를 낼까. 막상 아이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거나, 오히려 아이가 자기를 봐주길 즐길 수도 있는데. 그러나 때때로 만나는, 아이에 대한 험악한 시선 한 번. 그 시선 한 번에 아이를 향한 웃음이 열 번 다 잊혀지고 나는 엄격하고 짜증스런 감시관이 된다. 


남편은 오히려 아이랑 나가면 항상 격려받고 즐거운 경험을 하고 온다. 워낙 아이 추워~! 양말 신겨, 하는 할머니의 말에 아이 할머니, 애 안추워! 방금 땀났어. 모르시면서 그래~하고 눙칠 수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를 아빠가 데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빠는 응원받는다.


그러나 나는, 나는 아이의 주보호자이자 어디든 함께 하는 엄마로서, 무엇보다 소시민으로서 사실 맘충이라는 단어가 너무 두렵다. 나는 아이를 꾸미는 것도 좋아하고,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에 비례해서 남들의 유난이라는 시선이 두렵다. 누군들 누구에게 욕먹으며 살고 싶겠는가. 그것도 지극히 규범적으로 온전하길 바라는 이 사회에서. 아이에 대한 지극정성과 사랑이 유난맘과 맘충이라는 편견으로 돌변하게 될까봐 하루하루 아이가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서 어느 누구에게도 욕먹지 않길. 그리고 그래서 내가 살길 바라왔던 것처럼 무난하고 평범하게 살길 바라게 된다. 


나는 왜 나의 작은 아이에게 분노할까. 


아이가 지하철에 앉아 옆에서 뚤레뚤레 살피며 주변을 관찰할 때 자기 핸드폰을 보는 줄 알고 인상을 찌푸리며 생판 처음 보는 이에게 아이씨X! 하고 험한 말을 하는 학생에게는 왜 분노하지 못할까. 

아이가 양옆을 살피고 인도에서 달릴때 부앙 하고 달려드는 오토바이 배달원의 험악한 말투에는 왜 대들지 못할까. 

예쁜 포토존에서 아이의 사진 촬영을 하고 있을 때 자기들은 동영상을 찍으려고 삼각대를 설치하면서 적당히 좀 찍으시라는 투로 비아냥대는 커플의 얼굴을 왜 바라보지 못할까. 

아이에게 채 밥을 식히지 못해 뜨거운 밥을 먹이고 앗 뜨거 하는 아이에게 미안해, 미안해 하는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너희 엄마는 조심성도 없고 영 글렀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식당 사장님의 말에 왜 웃어보였을까.

왜 그들에게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나의 아이를 더 단단히 채근할까.


아이의 맑은 눈동자를 보면서 항상 모범적으로 살아야지, 하면서 왜 비굴하고, 옹졸하게 굴까.


한 번은 하원하고 별로 놀이터도 가지 않던 아이가 웬일인지 놀이터에서 친구들이 타고 있던 그네를 바라보면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자고 했다. 그러다 너무 오래 타는 걸 보며 "엄마 나도 그네 타고 싶어."하고 말했다. 내가 어떻게 했겠는가. 친구들의 앞에 가서 이제 얘도 타면 안될까? 하면 그 친구들의 엄마들이 눈을 부라릴까봐 용기낸 아이를 질책했다. 더 기다려! 친구들이 양보할 때까지. 해가 뉘엿뉘엿 저물때까지 친구들은 그네를 탔고, 아이는 기다리다 못해 집으로 가자고 울먹거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얼마나 밉던지. 

그 때 더 슬펐던 것은 아이가 울먹거리며 집으로 들어가자, 다른 엄마 하나가 달려와서 나를 붙잡는 것이다.


"아이 울려서 들어가지 말고 태워. 우리가 갈거야."

그러면서 자기 아이에게 얼른 내려! 저 친구 오래 기다렸잖아. 했더니 군말없이 내리는 친구를 보며, 저렇게 쉬운 것을 나는 왜 못했을까. 자책했다.



아이가 지금보다 더 어려 수유부일때, 이유식을 들고 만난 선배 엄마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났는데 갑자기 그녀가 소독티슈로 온갖 테이블이며 의자를 닦기 시작했다. 왜요? 뭐하는 거에요? 하는 내 말에 살포시 웃으며 얘기했다. 

이런 것까지 내 애가 했다고 맘충이라 오해받기 싫어.


당당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어도, 싫은 건 싫은 거다. 나나 내 아이가 욕먹는 게 싫어서 평범보다 더 과도하게 도덕성을 따지고 더 엄격하게 검열한다. 누가 흘린지도 모르는 음식물까지 닦아내며 싱긋 웃어보이는 그녀에게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 뒤로 아이가 이유식을 먹을 때가 되자 나 역시도 일회용 테이블보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맘충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전으로 가고 싶다. 엄마들을 어떤 식으로나마 규정하는 말이 없던 때로. 그 차마 이름을 부르지 못할 단어가 나오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덜 불안하고 덜 검열하고 덜 감시했던 때로. 노키즈존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전으로. 예스키즈존이니 어서 오세요~ 하는 식당의 소개에 안심하고 발을 디디지 않을 때로. 


아이만 그냥 키우기도 힘든데 남들의 뾰족한 시선을 받으며 지구 온난화 시대에 일회용품을 많이 써서 지구온난화를 가속시키는 주범으로 각인될 때.

고학력 저출산 시대에 아이들을 낳고 기르기도 힘든데 아이를 길러내고 있다며 마치 내가 전근대적 문화를 이끌어가는 표본처럼 취급받을 때.

누구의 도움받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둘째는 언제 낳냐며 애 하나는 외로운데 하나 더 낳지 그러냐고 아이가 불쌍하다고 갑자기 아이 생각은 하지 않는 이기적인 모성애로 몰릴 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를 잡으러 다니는 나를 보면서 아유 내가 저런 거 힘들까봐 애를 못 낳겠어 하면서 반면교사로 삼는 것을 대놓고 드러낼 때. 


나는 왜 분노하지 못하는가.


나는 얼마나 작으냐.


평생을 옭아매온 남의 시선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오히려 아이에게 화를 내고, 아이만 타이르고.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사람이 되고싶은 엄마들의 아이는 얼마나 외로울까.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기 위해 내 아이를 미워해야 하는 나는 얼마나 괴로울까.

돌이켜 시간을 회고하는 지금도 너무도 부끄럽다.


다른 사람에게 맘충이 되지 않기 위해 내 아이에게 맘충이 되어가는 나는 얼마나 잔인한가.

나는 얼마나 작은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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