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음의 배경음악 12.
학교방송국에도 이념화의 세례가 제대로 된 투사들도 있었지만, 숫자는 많지 않았다. 그래도 대다수는 당시의 엄혹한 정치 사회적 환경에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방송국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딩시의 대학생들 대다수가 공감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1년에 한 번, 가을에 열리는 방송제는 그래서 학생들에겐 억눌린 자유와 민주에 대한 감성을 표출하고자 하는 계기였고, 학교 당국과 기관원들에겐 긴장되는 행사였다. 2학년 때 열렸던 방송제는 그처럼 엇갈린 생각들이 정면으로 부딪힌 시간이었다.
앞의 글에서 나보다 1년 후배 중에 있었다는 기타 고수 S는 방송에 있어서도 그 창의력과 박식함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고, 방송제에서도 가장 비중이 큰 실험구성의 PD를 맡았다. 실험구성은 말 그대로 기존의 틀을 벗어나 다양한 방송 형식을 섞어 주제를 드러내는, 혁신적인 스타일의 방송이었다. 기본적으로는 드라마적인 연기가 뼈대를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노래, 음향 등 여러 요소들이 믹스되어 있었다. 제작의 어려움으로 인해 생방송은 어려웠고, 사전 제작 후 방송제에서는 녹음된 작품을 틀기로 하였다. 물론 그 당시의 대학방송은 비디오는 없는 오디오만의 방송이었다.
S군이 제작한 작품은 ‘삼켜진 소리들’이라는 제목 아래, 의식화 노래를 부르던 가수가 현실의 처절한 환경 속에서 점차 자아를 잃어가다가 결국은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는 드라마가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 존 바에즈의 ‘We shall overcome’ (‘우리 승리하리라’라는 번안곡으로, 당시 운동가요로 많이 불렸다.), 김민기의 ‘길’ 등을 비롯해 여러 문제 있는(?) 곡들이 삽입되었다. 또 시위 현장의 효과음 등 다소 파격적일 정도로 정치 비판적인 음향과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실험구성의 드라마 부분 주인공인 ‘양민수’ 역을 맡았다. 양민수라는 이름은 양희은의 양, 김민기의 민, 한대수의 수 등을 따서 만든 극 중 이름이었다.
방송제 전날, 방송국의 담당 교수와 실무 담당 교직원(우리 학교방송 1기 선배였다.)이 방송제의 사전 점검을 하고자, 리허설이 열리던 학교 강당으로 찾아왔다. 그리곤, 다른 코너는 별 관심 없이 대충 들은 후, 실험구성을 들어보자고 했다. 이미 녹음이 완료되었던 실험구성 ‘삼켜진 소리들’을 들은 두 분은 아연실색했다. 이런 내용이 방송에 나간다면, 학생들은 물론 자신들과 학교의 높은 분들까지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듯싶다. 여성 분이었던 담당 교수님은 꽤 학생들에게 존경받고 있던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만들었느냐, 북쪽에서 좋아할 내용이다.’ ‘wise 하지 못할 바에는 clever 하게 살아라’는 등의 말씀이었다.
결국, 방송제 자체를 취소하기로 하고, 우리는 리허설을 중단했다. 1학년 후배 몇이 나오면서 운동장에 자신들이 붙였던 방송제 안내 포스터를 찢다가 결국 운동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기도 했다. 원래는 방송제를 끝낸 후 회식을 하기로 했던 갈빗집에 모두 모여 앉았다. 술과 음식이 나왔지만,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 없이 우울한 침묵만 이어졌다.
그러다가 내가 방송국장을 맡고 있던 3학년 J선배에게 말했다. “형, 그래도 합시다.” 그러자 내 동기들이 하나, 둘 하자는 동의를 표시했고, 결국은 전 국원이 하자고 입을 모으는 것이, 꼭 로마 콜로세움에서 시민들이 황제에게 검투사를 살리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방송국장 선배가 “그래, 하자!”라고 결정하는 순간 ‘와’하는 함성이 솟았다.
그러나 당장 다음날로 닥친 방송제를, 학교 당국의 가이드라인을 지키면서 준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억울하고 아쉬웠지만, ‘삼켜진 소리들’은 방송을 취소하고, 나머지 코너는 원고를 수정해 검열을 통과해 보자는 것이었다. 주요 멤버들은 집이 비교적 넓었던 S군의 집으로 가서 밤새 수정작업을 했고, 다음날 간신히 학교당국의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다.
방송제 시간이 가까워올 때 강당의 풍경은 가관이었다. 사복경찰들이 우르르 몰려와, ‘1조는 앞쪽, 2조는 뒤쪽, 3조는 전원을 장악하고 지시가 있으면 전원을 차단해라’ 등의 지시를 내리며 ‘병력배치’를 하는 것이었다. 겁이 나는 와중에, 웃기기도 했다.
방송제는 시작되었고, 두 개 코너가 무사히 진행되었다. 실험구성이 나갈 시간, 동기 O군에게 김민기의 ‘길’을 틀어달라”라고 부탁하고, 내가 무대 중앙으로 나갔다. “지금 이 시간은 실험구성 82, 삼켜진 소리들이 나갈 시간입니다. 그러나 삼켜진 소리들은 못 나갑니다. 기재사정 때문이라고 합니다.” 김민기의 ‘길’이 BGM으로 깔리는 중 그런 멘트를 하자 객석이 완전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짭새들 물러가라”부터 김민기의 ‘길’을 따라 부르는 학생까지 심상치 않았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태는 더 확산되지 않고 방송제는 무사히 끝났다.
결국 ‘삼켜진 소리들’은 방송되지 못하고 삼켜졌다. 제목이 그래서였나 보다.
(이미지 : Pixbay)
김민기 길 (← 이곳을 누르면 해당곡이 재생됩니다. 유튜브 링크입니다.)
길
김민기 작사 작곡 노래
여러 갈래 길 누가 말하나
이 길뿐이라고
여러 갈래 길 누가 말하나
저 길뿐이라고
여러 갈래 길 가다 못 갈 길
뒤돌아 바라볼 길
여러 갈래 길 다시 걸어갈
한없이 머나먼 길
여러 갈래 길 다시 만날 길
죽기 전에라도
여러 갈래 길 다시 만날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