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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내 젊음의 배경음악 10.

by 들꽃연인

전두환 정권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대학생활은 낭만도 웃음도 없었을 것 같지만, 그래도 그 시절은 그 시절 대로 추억의 페이지들을 남겼다.


대학 1학년. 그때는 우리가 세상 모든 일을 다 아는 듯, 성인인 듯 생각했지만 지금 보면 미숙하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감정적인 면에서는 사춘기도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거칠고 충동적인 때도 많았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그 젊은 시절이 더 아름다웠고, 그리운 추억의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대학 1학년 여름, 첫 방학을 맞아 소나무 여섯 친구는 배낭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안되었고, 국민소득도 다른 나라 여행을 꿈꾸기 어려웠던 그때 우리의 배낭여행은 배낭을 메고 설악산이나 제주도를 가는 것이었다. 그것도 감지덕지였을 때였다. 우리의 첫 배낭여행지는 설악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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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끝난다는 소식은 있었지만, 아직 먹구름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던 7월 중순, 부모님의 걱정을 뒤로하고 청량리 역에서 만났다. 역 대합실에서 또 한 번 화음을 맞춘 ‘소나무야’를 부르고 완행열차로 출발했다.


기차가 진행하면서 날씨는 점점 좋아져 장마가 끝났음을 실감했고 춘천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렸다. 장마 때 물을 가두어 놓았던 소양강댐이 댐 준공 이래 처음으로 물을 방류하는 장관을 보며 소양호를 가르는 배로 청평사라는 절이 있는 호수 한 편의 산에 도착했다. 깨끗하고 경치 좋고 물소리는 청아한 것이 온몸의 찌든 때가 씻겨나가는 듯했다. 청평사를 구경하고, 텐트를 치고, 저녁을 지어먹고, 설거지하고, 처음으로 야영을 했다. 장마가 끝난 직후여서인지, 우리 외에 사람은 없는 듯했고, 그 와중에 두 명씩 교대로 불침번을 서는 등 어설픈 요란을 떨었다. 그나마 불침번은 그날 하루로 끝났다.


다음날 드디어 설악산 입구에 도착해 고된 산행을 시작했다. 산에서 2박을 하며 꼬박 3일간 내설악을 거쳐 대청, 소청을 통해 설악동으로 내려오는 매우 힘든 코스였다. 기진맥진 산을 기어가듯 올라가다가도 중간중간 설악의 깊은 속살에 감탄하기도 하고, 옥녀봉 아래의 옥녀탕에 천둥벌거숭이들처럼 뛰어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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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지기 시작해 텐트를 쳐야 되는 늦은 시간, 길이 엇갈려 친구 B를 잃어버렸는지 알았다가 지쳐서 길가에 누워있는 B와, 밑창이 떨어져 빼꼼 입을 벌리고 있던 그의 농구화를 발견해 눈시울이 젖었던 일도 있었다. 내가 발목 인대를 접질려 거의 걷지를 못해 Y의 넓은 등에 업혀 산길을 한참 간 적도 있었다. Y는 배낭이나 짐이 아무리 무거워도 사람보다는 가볍다고 툴툴대기도 했다. 왜 자기만 계속 밥을 하냐고 투덜거리면서도 계속 밥을 했던 S, 좋은 경치만 나오면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며 ‘아빠 땡큐’를 연발했던 H, 잠시만 여유가 생기면 콧소리를 내며 두성 발성 연습을 했던 J.


그래. 그때 우리 모두 젊었었다.


설악동을 내려올 때는 이미 달이 떠있었다. 이제 꿀맛 같은 휴식까지 얼마 남지 않았단 생각에 다들 엄청난 속도로 달리듯 걸어 내려왔다. 속초의 허접한 여인숙에 자리를 잡자 며칠 만에 만난 문명(?)이 편안하고 달콤했다.


하루 밤 휴식 후, 마지막 목적지인 낙산해수욕장에 도착해 텐트를 쳤다. 바다에서 놀다가 어두워지자 누구는 카드나 화투를 치고, 누구는 천막 나이트를 가고, 그리곤 밤이 깊도록 민주주의와 데모, 김민기론(論), 축제 이야기, 사랑론, 여성의 정조 이런 것들에 대해 잡담인지 대화인지 모를 이야기들을 늘어놓다 거의 밤을 새웠다.


젊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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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흘러가며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한 동녘하늘은 고운 모래밭과 잔물결을 일으키는 바다와 어울려 참으로 삽상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떠오르는 해를 맞으러 의상대로 향했고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경건한 기대로 일출을 기다렸다.


잠시 후 해가 뜨기 시작하면서 얕은 구름과 바다 모두 새빨갛게 변했다. J의 말대로 구름은 햇빛을 받아 들판을 뒤집어놓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가 모두 붉어진 가운데서 새빨간 공 같은 태양이 솟아올랐다. 햇빛에 비친 바닷물결의 움직임이 현란했다. 해는 원형이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구름 속으로 숨었다. 해를 좀 더 오래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젠 우리도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을 자신 있게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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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Pixabay, 직접 촬영)


내나라 내겨래 (← 이곳을 누르면 해당곡이 재생됩니다. 유튜브 링크입니다.)


내 나라 내 겨레

김민기 작사, 송창식 작곡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 누구의 머리 위에 이글거리나 /

피맺힌 투쟁의 흐름 속에 / 고귀한 순결함을 얻은 우리 위에 /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 누구의 앞길에서 환히 비취나 /

찬란한 선조의 문화 속에 / 고요히 기다려온 우리 민족 앞에 /

숨소리 점점 커져 맥박이 힘차게 뛴다 / 이 땅에 순결하게 얽힌 겨레여 /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 /


숨소리 점점 커져 맥박이 힘차게 뛴다 / 이 땅에 순결하게 얽힌 겨레여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 /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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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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