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음의 배경음악 8.
대학연합 서클로 독서서클을 시작했지만, 대학 내에서도 서클을 하나 가입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가 나온 고등학교의 동문회가 신입생 환영회를 열었다. 거기 참석한 선배들에게 어느 서클을 가입하는 게 좋으냐고 물었더니, 대다수가 대학방송국을 꼽았지만, 거기는 들어가기가 힘들다고 부연들을 했다. 그런데 그날 참석한 선배 중 그 당시 방송국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선배가 두 분 계셔서 여러 가지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대학방송국을 들어가기 힘들다는 말은, 입시에 다소 불만족하던 나를 자극하기도 해서 대학방송국에 아나운서로 지원을 했고, 몇십 대 일로 기억되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방송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유홍준 선생께서 그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소동파의 시구를 약간 변용해 쓴 표현인데, 인생 곳곳에 고수들이 있더라는 말일 것이다. 대학방송국에 들어갔을 때의 내 느낌이 그랬다. 여러 면에서 뛰어난 선배, 동기들이 많았고, 심지어 여성 국원들은 미모도 대단했다. 또 기타 연주의 고수들도 여럿이었는데, 예비역 선배, 3학년 선배, 그리고 내가 2학년 때 들어온 1년 후배 등 각각 대단한 기타 선수들이 있어서 나 정도는 명함도 내밀기 힘들었다.
노래 잘하는 국원들도 많았다. 난 교회나 학교 중창단 외에는 노래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고, 특히 내가 다니던 교회의 여학생 중에는 나와 하모니를 맞출만한 여학생이 없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런데 학교방송국에는 팔방미인들이 많아 예비역 선배 중에는 성악가 뺨칠만한 실력의 선배가 있었고, 내 여자 동기 중에도 노래 실력이 뛰어난 친구가 있어, 내가 바라던 여성과의 하모니 갈증을 풀어주었다. 내가 3학년 때 들어온 여성 2년 후배 중에는 진짜 가수보다 뛰어날 정도의 실력을 가진 친구도 있어서 인생도처유상수라는 말을 실감하게 했다.
자연히 학교방송국에서나, 캠퍼스 벤치에서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일도 많았고, 노래를 좋아하는 나는 그런 순간들이 정말 즐거웠다. 심지어 겨울방학에도 거의 매일 학교 방송국에 나와 석유난로에 쥐포를 구워 먹으며 같이 노래를 하곤 했던 기억도 있다.
방송국의 여학생들은 성적 장학금을 받는 우등생들이 많았고, 미모뿐 아니라 행동들도 세련되어서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남자 국원들은 거의 방송국에 목숨을 거는 열성파들이 많아, F학점을 줄줄이 받는 것이 자랑인 것처럼 되어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방송활동뿐만 아니라, 저녁에 선후배들이 서로 어울려 술잔을 나누며 학교방송에 대한 애정을 토로하는, 거의 매일의 술자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방송활동에는 열심이었지만, 방과 후의 술자리까지 끌려 다닐 여유는 없었다. 넉넉지 않은 집안 사정 때문에, 성적 장학금을 받는데 치열하게 몰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를 선배들은 약간 이단아처럼 바라보았으나 방송 자체는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그러던 1학년 가을의 어느 늦은 오후. 모두가 나간 썰렁한 방송국에서 나는 느지막이 편집을 마쳤다. 쌀쌀하고 쓸쓸한, 낙엽과 바람이 대지를 훑고 지나가는 11월에는 누구나 약간은 센티멘탈하게 된다. 거기에 약간의 객기까지 발동된 나는 평소의 범생이 스타일과 다른 엉뚱한 행동을 했다.
방송국에서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은 모든 기기를 끄고 나와야 하는데, 방송국이 있는 건물 바로 앞, 잔디밭 쪽의 스피커만 나오게 하고 음악을 튼 것이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의 주제가였던 <날이 갈수록>. ‘가을 잎 찬바람에 흩어져 날리면 캠퍼스 잔디 위엔 또다시 황금물결’ 이런 가사의 노래였다.
그 노래의 두 곡쯤 앞 노래에 LP 바늘을 올려놓고, 천천히 방송국이 있는 건물을 나가 잔디밭쪽으로 향했다. 그리곤 ‘캠퍼스 잔디 위엔 또다시 황금물결’ 하는 가사를 들으며 노랗게 물든 잔디밭을 걸어 나갔다. LP의 바늘은 한 면의 곡들이 다 끝난 후 Auto Reverse로 원위치되었고, 다음 날 아침에는 내가 가장 먼저 방송국에 들어가 아침에 방송 기자재를 켠 것처럼 행동해, 내 젊은 날의 작은 일탈과 정신적 사치는 완전범죄로 마무리되었다.
(이미지 : Pixabay, 소장 사진)
송창식-날이갈수록 (← 이 곳을 누르면 해당 곡이 재생됩니다. 곡 유튜브 링크입니다.)
날이 갈수록
김상배 작사, 작곡, 송창식, 이동원, 김상배, 김정호 등 노래
가을잎 찬바람에 흩어져 날리면 / 캠퍼스 잔디 위엔 또다시 황금물결
잊을 수 없는 얼굴 얼굴 얼굴 얼굴들 / 루루루루 꽃이 지내 루루루루 가을이 가내
하늘엔 조각구름 무정한 세월이여 / 꽃 잎이 떨어지니 젊음도 곧 가겠지
머물 수 없는 시절 우리들의 시절 / 루루루루 세월이 가내 루루루루 젊음도 가내
루루루루 꽃이 지내 / 루루루루 가을이 가내
루루루루 세월이 가내 / 루루루루 젊음도 가내
루루루루 루루루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