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경험은 기억에 남아 상처를 남깁니다. 깊은 상처는 치료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죠. 치료하고 나도 흉터가 남습니다. 저에겐, 아니 가족에겐 절단 사고가 흉터로 남았습니다. 가족이 공유하는 트라우마의 시작은 제가 아니었습니다.
아빠가 공장을 시작한 지 몇 년 되었던 시점입니다. 엄마는 그전까지 가정주부로 지내다가 아빠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공장일을 시작하셨죠. 아빠에게 전화가 걸려오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10년이 넘었는데도요. 아마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후 4시쯤, 대학교 강의실에 해가 붉게 들어오던 늦은 오후였습니다. 아빠에게 전화가 걸려왔어요. 전화를 받았는데, 아빠의 목소리만 듣고도 몸에 긴장이 들어갔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음을 몸이 먼저 직감했던 것 같아요. 엄마가 손을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손이 덜덜 떨리더군요. 조별과제를 하고 있었는데, 선배들에게 집에 일이 생겼다고 하고는 강의실을 뛰쳐나왔습니다. 먼 거리를 어떻게 해서 갔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수술실 앞에 아빠와 고모들, 휠체어에 기운 없이 앉아있는 엄마의 모습이 파편적으로 떠오릅니다. 엄마는 접합수술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결국 손가락을 절단해 봉합했어요.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몇 년 후 또 같은 사고가 났어요. 두 번째로 사고 소식을 전달받았을 땐 아빠에게 화를 냈습니다. 울면서 소리를 질렀어요. 그러니까 공장에 데리고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아빠를 원망했습니다. 그때도 엄마는 접합수술을 하지 못했습니다. 엄마에겐 큰 흉터가 몸에 두 개나 새겨지게 되었어요.
어렸을 때, 저는 엄마의 손을 참 부러워했습니다. 저는 손이 작고 마디가 툭툭 불거져서 예쁘지 않았거든요. 반면 엄마의 손은 길고 매끈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집에 매니큐어 통이 있었던 걸 보면 네일아트 하는 걸 즐기셨던 것도 같습니다. 그랬던 엄마가 사고 후에는 사람들 많은 곳에 손을 드러내는 걸 꺼리셨습니다. 지하철을 타면 가끔 엄마의 손을 가리키며 수군대는 사람도 있댔어요. 그래서 백화점이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갈 때면 엄마의 다친 손을 꼭 잡고 다녔습니다. 가끔씩 비어있는 엄마의 손가락 자리를 보며 그 고통을 짐작할 때면 오금이 저려오곤 했습니다.
자식이 다치는 것이 얼마나 부모에게 불효인 것인지 제가 다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빠는 죄책감에 짓눌려 어깨가 바닥에 닿을 듯 축 쳐졌습니다. 엄마에 이어 저까지 다치게 되니 못난 자신 탓이라며 자책하고 힘들어하셨어요. 제가 퇴원한 후에도 한참을 웃지 못하셨습니다. 엄마는 한동안 공장에 가지 못하셨어요. 다시 일하러 가기로 결심하고 출근했을 때도 한동안 저의 비명소리가 엄마를 따라다녀 힘들었다고 하셨습니다. 3년이 지난 지금도 제가 가끔 놀라서 소리를 지를 때면 엄마, 아빠가 소스라치며 뛰어오십니다. 그럴 때마다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저는 한동안 안전 불안증에 시달렸습니다. 전기장판을 켜면 불이 날 것 같아서 무섭고, 자려고 누우면 집이 무너질까 봐 잠을 못 잤어요.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화재일까 봐 뛰쳐나와서 울었던 적도 있습니다. 여전히 정육점에서 고기 자르는 걸 볼 때나, 기계를 보면 몸이 경직됩니다. 별 거 아닌 척 지나가지만 저는 알지요, 제가 겁먹었다는 것을요.
얼마간은 눈만 감으면 사고 장면이 영화처럼 상영되어 힘들었습니다. 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도 이 때문이에요. 반복 재생되는 영상을 그만 털어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던가요?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감정이 옅어지는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사고 장면이 떠오르는 날이 거의 없어요. 흉터는 조금 남겠지만, 이제 더는 아프지 않습니다. 지나가지 않는 고통은 없다고 생각하니 겁이 좀 없어진 것 같기도 합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정말 맞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