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이 시린 봄의 시작 (1편)

모든 것이 바뀌기 전, 마지막 겨울의 숨

by 문희애

울컥불컥한 아저씨와의 만남 후, 오래지 않아 찾아온 어느 날이었다. 코끝이 시린 겨울이 채 물러나기도 전에, 작은 씨앗들마저 몸을 일으키는 봄의 초입. 이제 봄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가 되었음을 알리기라도 하듯, 겨울은 순식간에 힘을 잃고 사라져갔다. 내 몸의 일부처럼 목 끝까지 지퍼를 올려 잠그던 패딩은, 한낮 태평하게 떠 있는 햇살 아래에서는 투박하게 손에 걸린 채 흔들리고 있었다. 계절은 언제나 그렇듯 정확했고, 분명한 변화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도 희애는 몰랐다. 날씨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도 곧 거대한 변화가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어린이집 졸업식을 끝내고, 나는 당연히 집 근처 초등학교에 입학할 줄 알았다. 친구들과 같은 학교에 가자는 약속이 의미 없는 약속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엄마는 어느 학교에 보낼지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고, 나는 답답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몰라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이른 아침 나를 흔들어 깨웠다. “희애야, 준비하자. 오늘 가야 할 데가 있어.” 유난히 신경을 곤두세운 씻으라는 말투, 한 상 가득 차린 따뜻한 밥상,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외삼촌과 엄마. 잔머리 하나 없이 반듯하게 묶인 머리와 처음 입어보는 낯선 치마. 이상하리만큼 과한 정성. 이상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쫓기듯 집을 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아 기차역으로 향했다. 주변이 흐릿하게 스쳐 갔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기차 안이었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못했고, 좋아하거나 슬퍼할 틈도 없었다. 정시에 출발하는 기차처럼, 모든 건 너무 빠른 속도로 굴러갔다. 그때 엄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희애야, 엄마랑 진짜 아빠한테 갈 거야. 거기 가면 희애 방도 있고, 좋은 친구들도 있고…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어.” 엄마 목소리가 조금 떨렸던 것 같다. 그 말조차 완전히 이해하기엔 내 마음도 정신도 갈피를 못 잡았다.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덧 기차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탔다. 맨 뒷자리에서 엄마의 당부가 이어졌다. “희애야, 우리는 서울에서 지낸 거야. 대구라는 말 절대 하면 안 돼.” “아빠한테는 엄마랑 둘이 살았다고 해야 해. 외삼촌 얘기도, 그때 만났던 아저씨 얘기도 절대 하면 안 돼.” “그리고… 아빠가 엄마에 대해 물어보면 그냥 기억 안 난다고 해. 알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 손이… 내가 아는 온도가 아니었다.


버스에서 내려 몇 걸음 걷자, 아파트 단지 앞에 도착했다. 엄마는 내 눈높이에 맞춰 앉아 말했다. “희애야, 아빠 만나면 인사 먼저 하고… ‘보고 싶었어요’라고 말해. 알겠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보고 싶었다고 말해야 한다니. 당황스럽고 어색했지만, 엄마의 비장한 표정에 눌려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5동, 4동을 지나 3동 앞에 다다른 순간, 멀리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엄마는 그를 보자 내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손 안이 아릴 만큼 꽉. 숨이 차게 따라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바로 앞이었다. 그는 내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였다. 놀라 뒤로 물러서는 나를, 그는 조심스럽게 어깨로 붙잡으며 말했다. “많이 컸네. 잘 컸어. 보고 싶었다, 희애야.” 그 말 한마디만으로 희애는 알 수 있었다. 그때의 울컥불컥한 아저씨와는 달리, 이 사람은 진짜 나의 아빠라는 것을. 반갑지만 미안함이 섞인 목소리, 눈빛의 끝이 떨리는 진심.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감정은 늘 가장 먼저 닿는다.


오는 길 내내 불안해 보이던 엄마는, 아빠 앞에 서자 돌처럼 굳은 얼굴이 되었다. 흔들림 없는 눈빛, 단단한 목소리. “올라가서 얘기해. 희애 추워.” 아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한 켤레뿐인 캐리어를 받아 들었다.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 생활의 흔적이 거의 없는 텅 빈 거실이 맞이했다.


사람이 사는 집이 맞는지 의심될 만큼의 공허함. 눈이 마주친 엄마와 나는 동시에 멈칫했고, 그 분위기를 의식한 아빠가 서둘러 말을 꺼냈다. “혼자 살다 보니까… 뭐가 필요 없더라고. 희애 물건으로 천천히 채우면 되니까.” 엄마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를 거실 끝으로 데리고 가 앉혔다. 아빠는 맞은편에 앉아 오래, 깊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낯설고 무거워 나는 아빠의 양말 끝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켰다.


모든 것이 어색했고, 너무 조용했다. 엄마와 아빠 사이로 설명되지 않는 공기가 흘렀다. 말을 꺼내면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얇고 투명한 막 같은 정적. 그 침묵을 견디다 못한 듯 아빠가 낮게 입을 열었다. “희애야… 우리, 이제부터 잘 지내보자.”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고개만 아주 천천히 끄덕였다. 그 순간 내 안 어딘가가 미세하게 울렸다. 좋아서도, 싫어서도 아닌,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스쳐갔다.


그리고, 나는 또 알지 못했다. 이 조용한 시작이 곧 모든 것을 바꾸게 될 거라는 사실을.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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