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이해하려 할수록 이해할 수 없기에."

by 문희애

아빠와의 어색한 합숙 생활이 시작되었다. 마치 서로에게 빚이라도 진 사람처럼, 누군가 문을 열고 나갈 때면 영혼 없는 인사가 흘러나오고, 하루에 한 끼는 어쩐지 운명처럼 함께 밥을 먹게 되었으며, 각자 어지른 만큼 집안일을 처리하는 묵언의 가정 내 규칙이 생겼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규칙—서로의 방은 침범 금지. 마치 금단의 숲이라도 되는 듯, 문턱을 넘는 순간 벌이라도 받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누구도 말한 적 없지만, 이미 통과된 법안처럼 굳어져 있었다. 가족의 의무는 다 하지만 서로에게 간섭받지 않는 적당한 거리 두기는 딱 우리 사이를 나타내기 좋았다. 가끔은 그 침묵이 답답하게 느껴졌고, 또 어떤 날에는 그 침묵이 서로를 지켜주는 벽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그날 이후 이 집에 온 뒤, 나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추가됐다. 아빠가 출근하지 않는 날이면 꼭 등장하는 ‘아빠 지인 투어’. 나에게는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나를 너무 잘 아는 것처럼 굴었다. 나는 그들이 알고 있는 ‘희애’와 실제 내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나만 알고 있는 비밀처럼 느껴졌다.


큰집에 갔더니, 처음 보는 이모가(법적으로는 큰 엄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고, 언제 이렇게 컸어?"라고 말한다. (속으로는 언제가 아니라 지금 처음 뵙는데요… 하고 있었다.) 집 앞 슈퍼 아줌마는 저 멀리서부터 나를 보며 “네가 희애지? 아빠 말 잘 들어!”라고 단호하게 소리친다. (아빠 말은 아빠의 숙제인데, 왜 숙제를 나한테 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옆집 라면 가게 아저씨는 뜨거운 육수를 휘휘 저으며 “이제 아빠도 외롭지 않겠네~”라고 말했다. (그 말투가 마치 내가 아빠의 외로움 해결사라도 된 듯했다.) 이쯤 되면 아빠는 동네에 “우리 딸이 옵니다” 현수막이라도 걸어둔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사람들의 반가움이 나를 향하고 있는데도, 정작 나는 그들 사이에서 벽에 붙은 포스터처럼 낯설고 평면적인 존재였다.


이해할 수 없는 투어지만 그러려니 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엄마의 미션인 "아빠 말 잘 듣고 있어."가 유효했기 때문이다. 이런 지루하고 똑같은 일상도 곧 끝나겠지 생각하며 하루들을 보냈다. 이곳에 와서 하나 생긴 삶의 지혜는 억지로 많은 것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이해하려 하면 많은 것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주말, 또다시 ‘아빠 지인 투어’가 있을 줄 알고 마음의 체력을 미리 비축해 두었는데, 아빠가 뜬금없이 말했다. “희애야, 오늘은 학교 갔다 오자.” 처음엔 또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는데, 알고 보니 곧 다가올 입학을 앞두고 학교에서 하는 ‘입학식’라는 행사였다. 처음 듣는 단어였다. 입학은 들어봤지만 ‘입학식’라는 건 8살 인생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집에서 새로 터득한 생존 전략—“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을 적용해,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은 어떤 ‘입학식’ 인지 묻고 싶은 마음이 계속 입술 끝에서 간질거렸지만, 이상하게 그 질문이 우리 사이의 얇은 평화를 깨뜨릴 것만 같았다.


‘아빠 지인 투어’의 버전이 끝나고 드디어 모르는 사람들 세계로 들어왔다. 조그마한 동네에 갇혀 지내는 줄 알았는데, 학교만 와도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진짜 ‘내 이야기’가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아빠와의 어색한 합숙도, 동네 사람들의 과한 관심도, 모두 이 새로운 세계—학교—로 들어가기 전의 예행연습처럼 느껴졌다. 학교 운동장에 발을 딛는 순간, 희애는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람은 많은데, 그중 어느 누구도 자신을 알고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이렇게나 편안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처음으로, 내가 어떤 ‘역할’이 아닌 그냥 나로 있어도 되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또 한편으로는 익숙하지 않은 세계는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희애를 긴장시켰다. 모든 어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또래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다니는 사이, 희애는 아빠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멈춰 섰다. 아빠도 조금 어색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 짧은 순간,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곳이 되어버린 것 같은 묘한 공기가 스쳤다. (처음으로 나는 우리 사이의 거리가 생각보다 조금 더 가깝다고 느꼈다.)


나와 아빠가 온몸으로 긴장감을 나타내던 그때, 운동장 한편에서 공이 굴러오더니 희애의 발끝에 멈췄다. 한 아이가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말했다. “그거 좀 줄래?” 아빠 지인이 아닌, 정말 모르는 첫 번째 사람. 희애는 잠시 망설인 뒤 공을 내밀었다. “고마워! 너도 오늘 입학식 왔어?” 희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나는 성찬이야.”


그 아이는 너무 자연스럽게 웃었다. 희애는 그 웃음이 조금 낯설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웃음에는 아무런 의무도, 아무 기대도, 아무 배경 이야기도 붙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 반짝였다. 희애는 성찬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낯선 건 한없이 조용한데, 또 한없이 시끄럽다." 모든 게 처음 보는 풍경이라 모든 소음이 선명하게 들리는데, 마음 한구석은 유난히 적막 속에서 크게 두근거렸다.


이런 복잡한 감정을 겪는 동안에도 질문하지 않았다. 왜 이러한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그냥 당연한 순서겠지 하며 넘겼다. 생각해 보면, 어쩌면 오늘의 낯섦은 내가 앞으로 익숙해질 것들을 미리 알려주는 작은 신호 같았다.


그때 아빠가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친구 생겼네.”


희애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아주 작은 봄이 하나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따뜻한 기운이 아주 천천히, 그러나 또렷하게 퍼져 나갔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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