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마음보다 따뜻한
2주간의 입원치료를 마치고 열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퇴원을 시켜주었고, 카메룬에 돌아가기 전 며칠은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있었다. 제일 걱정했던 병원비, 치료비는 코이카에서 지불해 주었다.
1년 새 시커먼스가 다 된 딸을 본 부모님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을 하고 나를 꼭 안아주셨다. 군인이 된 남동생도 눈에 눈물이 맺힌 채 나를 안아주었는데, 말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깊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사이에 현지에서 겪었던 지난날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할 이유와 사건이 너무 많다.
그리고 한국에서 누리는 평범한 그 당연한 것들이 현지에서는 특별한 일이라고도 이야기하며 모든 것에 감사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마치 내일모레 세상이 끝날 것처럼 그립던 김치찌개와 짜장면 짬뽕, 떡볶이, 어묵 등 먹고 또 먹었다.
늘 노란 석회수가 나오던 세면대 물만 보다가 투명한 한국의 수돗물을 보니 그냥 먹어도 되겠더라. 붉은 흙에 뒤덮인 현지의 길만 걷다가 깔끔한 포장된 길을 보니 내 더러운 신발을 벗고 걸어야 할 것 같았다. 바푸삼에서는 내 피부색이 그리 하얄 수가 없었는데, 한국으로 돌아오니 얼마나 살이 그을었는지 손바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1년 뒤에 다시 돌아올 한국이니, 어서 빨리 떠나자.
이제 본부에 가서 퇴원 및 출국 보고 후 돌아갈 일만 남았다.
대한항공을 타고 거의 16시간 이상 이동해서 프랑스 파리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8시간만 가면 카메룬인데, 에티오피아 항공을 타고 벌써 2시간째 앉아있는데 출발을 안 한다.
내 양옆에 앉은 카메룬 Madame et Mousieur는 출입문 폭만큼 거대한 엉덩이를 내 자리에까지 걸쳤다.
한 자리에 대한 가격을 다 지불했는데도, 나는 3분의 1만 앉을 수 있단 사실이 경이로웠다. 사실 그 엉덩이들이 내 몸통을 조여 안전벨트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도 없었다. 시외버스를 방불케 하는 왁자지껄한 소음과 뭔가를 손에 들고 먹으며 쓰레기를 바닥에 내버리는 걸 보니 아프리카에 다 왔구나 생각했다.
피곤했지만, 몇 시간씩 지연돼도 불평 없이 받아들이며 그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아프리칸들의 긍정적인 모습이 참 대단하게 보였다.
출발하지 않는 비행기에 앉아서 해가 지기 전에 제발 출발하기만을 바랐다.
드디어 출발하는 비행기는 놀이기구처럼 기류를 심하게 타 흔들거렸고 기체 내에 소음도 꽤 컸다.
기류를 탈 때마다 바이킹을 타듯이 심장이 철렁했는데, 손잡이라도 잡고 싶은데 양옆에 앉은 이 분들의 뱃살을 들고 손잡이를 잡기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주기도문과 시편 23편을 번갈아 외우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수밖에는 없었는데, 옆에 앉은 madame이 나를 보며 낄낄 웃더니 쁠랑뗑 과자를 건넸다. 그리고 어디를 가느냐고 말을 걸어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무서운 것도 잊어버리고 한 참 그 아줌마랑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폭신한 아줌마 옆구리 살에 기대어 자다 깨다 하니 이제는 내 집 같은 카메룬이다.
오늘 바푸삼 가기엔 너무 늦어, 야운데 동기단원 집에서 하루 신세를 지기로 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를 보는 사람마다 놀라고 반가워하고 이렇게나 나를 기다린 거야?
보는 사람마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 보듯이 노래를 부르고 껴안고 춤을 추고 난리다.
"오~~~ 마쉐리(Ma Chere), 초이, 어디 갔었니? 우리는 네가 정말 죽은 줄로만 알았다. 전화 좀 해주지 그랬니? 네가 출근하지 않던 어느 한 날 바푸삼 근처에서 중국인이 한 명 살해되었는데, 우리는 다 네가 살해를 당한 줄 알고 걱정이 많았다."
"살해되었다고?!!!"
"시누아(Chinois)가 죽었다 하고 너는 오지 않고 우린 모두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이제 다시는 어디 가지 마라. 한국도 가지 말고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우리랑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