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으로 쓴 글이 9월 말. 1달이 좀 넘는 기간 동안 과제와 시험에 치여 살았다. 과제와 시험은 정말 나를 치려한 것은 아니었을텐데, 어쩌면 과제와 시험에 내가 치이도록 한 것은 내 선택이 아니었나 이제야 생각해본다. 그 1달 동안 나는 심장이 이상하게 뛰는 걸 경험했다. 부정맥이라고 해야하나. 서른 여섯 해를 살면서 이전에도 2번 정도 겪어본 이 증상은 한약을 먹으면 생기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약을 먹지 않는 상태에서 생겼다. 어느 날 문득 느낀 아무 이유없이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 '왜 이러지?' 이제는 좀 나아졌나 싶으면 또 쿵, 그러다 어떨 때는 쿠루릉쿵쿵, 믿기 힘들겠지만 정말 이렇게 뛰었다. 겪어보면 안다, 절대 쿵쿵쿵쿵쿵 같은 강도로 떨어지는게 아니다, 쿠루릉쿵쿵.
-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니 아무래도 스트레스가 원인인 것 같은데 그건 참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아니, 살면서 이 보다 더한 스트레스도 많았는데 이 정도 스트레스에 이런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 인정이 어려웠던게 아니라 사실은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이 정도 스트레스에는 끄떡없는 사람이어야 했을테니까.
어쨌든 그렇게 '심장 쿵' 증상 완화를 위한 내 나름의 조치에 들어갔다. 우선 교감 신경 항진으로 이 증상이 발현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가정 하에 1) 스트레스 상황과 멀어지기 2)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수면 패턴을 습관화하기 3) 자율 신경 실조증에 좋다는 '대추차'를 매일 한 잔씩 마시기 4) 가능한 많이 걷기를 실천하였다. 다행히 학기가 끝나고 일주일 가량 여유 시간이 주어져 과제와 시험으로부터 멀어졌고, 그 시간 동안 크라이스트처치에서 트래킹하기 좋은 곳을 찾아 오래 오래 걸었다. 피곤해서였는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패턴도 하루 이틀 고생한 뒤로는 자리를 잘 잡았다. 마지막으로 대추는 한인마트에서 말린 대추를 공수해와 손수 대추고를 만들었다.
'서른 여섯의 나는 도시의 커리어우먼으로 와인의 맛을 논할 줄 알았는데, 서른 여섯이라는 조금은 이른 나이에 건강 차를 손수 만들어 먹는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자조 섞인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그게 결코 싫지만은 않았다. '뭐, 사는게 내 뜻대로 되었더라면 이 대추차의 단 맛도 결코 모르고 살았겠지.'
- 그렇게 내 나름의 노력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학기가 끝났기 때문인지 정확한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서서히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증상의 빈도와 정도는 줄어들었다. 아주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굳이 생각하지 않으면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괜시리 불안해지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 중에서 내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어떤 생각이 있었고, 이는 많이 걷던 어느 날 나를 찾아왔다.
- 표지판이 불친절하게 되어 있던 그 트래킹 코스에서 유독 많이 헤매던 나는, 내 인생에서도 헤매던 어느 날이 생각났다. 너무 괴로웠던 그 시기에 절에 가서 불상 앞에서 '부처님, 다 제 잘못입니다. 다 제 욕심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답은 사실 내가 다 알고 있다. 놓지 못하는 내 욕심이고 그것이 괴로움을 짓는 것이다. '그래, 욕심을 버려야지. 너무 잘하려는 그 욕심을 버려야지.' 하다 이건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깊이, 대체 그 욕심 안에는 무엇이 있길래 나는 이 정도 스트레스에는 끄떡없는, 당연히 잘해야하는 나라는 사람의 표상을 만들어둔걸까? 인생에서 아쉽게 헤맸던 시간은 제하고, 이제라도 열심히 해서 언젠가는 와인의 맛을 논하는 도시의 커리어우먼이 되기 위해서?
그러다 내 인생은 특별하길 바라는 (어쩌면 특별해야 한다고 믿는), 내가 많은 걸 누리길 바라는, 그래서 많은 걸 이뤄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가 보였다. 나이가 들며 욕심도 줄어든다 생각했지만 이뤄야 하는 '많은 것'들의 가짓수가 조금 줄어들 뿐이었지, 내가 이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목표'라는 이름으로 내가 늘상 버려야한다 생각하는 '욕심'에는 해당사항이 없는 내용인양 나와 함께 해왔다. 그렇다고 그 책임감이, 목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언제나 최선을 다하기 보다는 최선을 넘어서 '탁월함'을 지향했던 내 안에는 그런 생각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나를 성장시켰고 내가 무언가를 도전함에 쉽게 포기하지 않게 하기도 했고, 내 몸에 부담을 주기도 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 좀처럼 인정하기 싫었지만 특별하고자 했던 내가 내 안에 있다는 것, 특별한 인생이기를, 특별한 존재로 사랑 받기를, 대우 받기를 바라는 내가 내 안에 있다는 것. 이것들을 인정하고 나서 여러가지가 이해됐다. 인생이 내 맘처럼 되지 않을 때는 짜증이 나고 의기소침해졌다가 조금 내 맘처럼 흘러가면 지난 시간의 보상이라며 마치 맡겨놓은 물건을 되돌려 받은 것처럼 의기양양해 하는 그 얄팍한 마음과 내 틀에 맞지 않은 나와 다른 사람에게는 이건 예의와 상식에 어긋나는 것 아니냐며 화가 나는 내 기질도 모두 이 뿌리에서 시작된 열매들이 아닌가 싶어졌다.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뭐 그렇게 대단한 인생을 살려고 건강을 해치며 이러는건지.'
Mt. Vernon 트레킹 코스에서 만난 View point
- 이 즈음이 되어서야 나는 담당 GP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은 웬만한 병은 GP를 기다리는 동안 다 낫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어쩌면 인간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회복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의료환경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